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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10,5-7.13-1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6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7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는 멸망시키려는 생각과 적지 않은 수의 민족들을 파멸시키려는 생각뿐이었다.”
13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나는 민족들의 경계선을 치워 버렸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왕좌에 앉은 자들을 힘센 장사처럼 끌어내렸다.
14 내 손이 민족들의 재물을 새 둥지인 양 움켜잡고, 버려진 알들을 거두어들이듯 내가 온 세상을 거두어들였지만 날개를 치거나 입을 열거나 재잘거리는 자가 없었다.”
15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마치 몽둥이가 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휘두르고 막대가 나무도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지 않으냐?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깊고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 찬양의 기도요, 뒤 장면은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를 부르시면서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곧 아버지께서 우주의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동시에, 모든 피조물의 소유권을 가지신 분임을 고백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드리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마태 11,25)
이 고백은 하느님의 뜻은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드러내주셔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주신다고 해서 모두가 알게 되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알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나는 모른다'라는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묻습니다.
그리고 ‘모른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는 안다'라는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주권자이기에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감추시고'와 '드러내시고' 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 진리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알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찬양을 나타내는 감격스런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말합니다.
곧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시는’ 아버지의 뜻과 섭리에 대한 완전히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 11,26)
오늘 우리도 이렇게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일하셨음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하는 일입니다.
당신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일입니다.
비록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는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드리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라고 말씀하신 사도 바오로처럼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장막에 머무는 길은 우리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라’(수도규칙 머리말 30)고 제시하신 성 베네딕도의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
(마태 11,26)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매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안다는 모름>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 드립니다.”
(마태 11,25)
제 생각에 대표적인 교만이 바로 내가 옳다는 교만과 안다는 교만입니다.
진정 올바른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올바르지 않으면서 옳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은 옳지 않다고 하며 자기만 옳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에 대해서 비유를 가지고 비판하셨지요.
바리사이와 세리가 모두 기도하러 성전에 갔는데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지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루카 18,11ㄴ)
이에 비해 세리는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이렇게 기도하지요.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루카 18,13ㄴ)
‘오, 하느님!’ 하며 둘 다 하느님을 불렀지만 누가 실제로 기도했고, 하느님을 뵈었습니까?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리 앞에 있었고, 하느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리를 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런 교만한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이지 않으신다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또 다른 교만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안다는 교만, 곧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교만인데,
마찬가지로 진정 하느님을 잘 알고 진정 지혜롭고 슬기롭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서 잘 안다고 더 나아가서 다 안다고 하니 그것이 문제지요.
그러나 아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곧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지혜로운 것이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지혜로운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지혜는 겸손과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자기를 잘 아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인데, 자기를 잘 안다는 것은 자기가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할 때 모르는 것을 물을 겁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반대로 자기는 잘 알고 있으며 다 안다고 자신하고,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잘 알고 다 안 결과가 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의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행히 이렇게 교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교만이 하늘을 찌를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고, 다만 땅에서 교만하고 그래서 땅만 보고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고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할 바에는 얼치기로 겸손하지 말고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이 제대로 겸손해야 합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는 모든 것을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귀찮을 정도로 모든 것을 물어댑니다.
지금은 군대에 가 있는 손주와 그 할머니와 함께 어디를 간 적이 있는데, 가는 내내 눈에 보이는 족족 할머니에게 그것이 뭔지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 못할 정도였는데, 그런데 그때 저는 모든 것을 모르고, 그래서 모든 것을 묻는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모든 것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주님 말씀을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조금 알고 일부 아는 것으로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닌지, 안다는 모름이 나의 교만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일을 하라>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는 것을 제대로 쓰지 않으면 아는 것이 병입니다.
오히려 모르는 게 약입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은 사라지고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는 종종 ‘내가 무엇을 했다.’고 으스댑니다.
그러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철부지처럼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셨다,’고 합니다.
진정 우리가 하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필요에 쓰십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내가 커지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필 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배척받았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사람, 별 볼 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함이 있었고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겸손이 있었기에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부 고위직 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살아온 면모가 드러납니다.
잘난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로라하는 사람이 감추어진 부정이 더 많게 보입니다.
자녀를 위한다고 좋은 학군으로 위장전입을 하고, 절세를 노린 쪼개기 증여, 부모 찬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평범한 이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입니다.
불법으로 물질을 챙기고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서로를 헐뜯고 깎아내리기도 합니다.
존경받아야 할 무리에서 뻔뻔한 사람이 생각 외로 많아 평범한 사람들을 허탈하게 합니다.
그러나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야말로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많아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는 것이 남을 등쳐먹는 데 사용되지 않고, 남을 풍요롭게 하는데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알기 때문에 순수함을 회복하고 더 많이 사랑할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 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 10,15) 단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전할 수 있는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작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참 재미있는 우리 말이 있습니다.
철부지입니다.
철부지의 어원은 절부지(節不知)입니다.
절은 계절을 뜻하니, 절부지는 계절(season)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일년 농사를 성공하려면 절기를 잘 파악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는 사람을 철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철부지는 사리를 분별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아이를 의미합니다.
철부지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들은 개념이 없다는 것,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한다는 것, 아직 세상 물정 모른다는 것, 뭐가 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순종적입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아직 작고 힘이 없다 보니 철저하게도 의존적입니다.
늘 부모에게 물어보고, 부모가 가자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옵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사랑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고 철이 들어가면서, 이것저것 어설프나마 배워가면서 슬슬 자기주장이 생기고, 고집도 늘어갑니다.
때로 뺀질거리며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부모가 한마디 하면 전에는 절대 그러지 않았는데, 이젠 꼬박꼬박 말대답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미워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자 한다면, 그분의 지속적인 축복을 원한다면, 인간을 한 그분의 한없는 측은지심의 손길을 느끼고자 한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철부지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지닌 천진난만한 성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대들고 튕기는 것이 아니라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의 신비를 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있어 보이기 위한 세상 사람들의 투자는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부실함과 결핍과 약점을 애써 감추려고 기를 쓰니 에너지 소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매일의 삶이 늘 부담스럽고 피곤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없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목과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자칭 지혜로운 사람들,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통해 한 분야의 최고봉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유치원생보다 못한 사고를 하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기에 요즘 와서 자주 생각하는 것이 편식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한 과목에 집중하지 말고, 여러 과목에 골고루 신경써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를 쓰며 쌓아 올리고자 노력하는 학문적, 세상적, 인간적 지혜 위에, 인문학적, 영적, 정신적, 신앙적 지혜가 가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나라에는 소외계층이 없습니다>
1)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인간 사회의 ‘기득권층 사람들’을 뜻합니다.
‘철부지들’은 ‘사회적 소외계층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것’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사업, 구원의 진리, 예수님의 복음, 하느님 나라’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는 기득권층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외면하고 배척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이 보지 못하게 구원의 진리를 감추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외면하고 안 보는 것입니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는 소외계층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구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는 소외당하지 않고 구원받게 되는 것에 대해서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득권층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고 예언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감사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기득권층 사람들도 제대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일, 그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 소외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라도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소외당하지 않고 똑같이 구원을 받으니 선하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2)
기득권층과 소외계층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 말씀은 ‘마리아의 노래’에 들어 있는 찬양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루카 1,51-53)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은 축복하고, 교만한 자들과 통치자들과 부유한 자들은 저주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소외계층 사람들이 소외되지 않고 구원받는 것을 찬양하는 말씀이고, 또 기득권층 사람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교만한 자들도 교만을 버리고 진심으로 겸손해지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통치자들과 부유한 자들도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재물을 내려놓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더욱더 움켜쥐고만 있다면, 심판 날에 하느님 앞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빼앗기는) 초라한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한 그 자신들이 자초한 일입니다.
3)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라는 말씀은 18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 18,14)
하느님 나라에는 소외계층이 없고, 그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그 나라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고, 힘 있는 사람도 없고 힘없는 사람도 없고, 유식한 사람도 무식한 사람도 없고,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습니다.
혹시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도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특별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잘못되어 있는 그 마음부터 버려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주고 미리 체험하게 해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발언권이 없거나 약한 소외계층 사람들이 분명히 있고, 실제로 소외당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회 안에 소외계층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곧 기득권층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속의 안 믿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신앙인들부터 회개해야 하는 것처럼, 세속의 기득권층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교회 내부의 기득권층 사람들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4)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구원사업’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버지와 당신은 완전한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고, 당신이 하시는 일들은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이고, 예수님의 뜻은 곧 아버지의 뜻이고, 예수님의 일은 곧 ‘하느님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를 쓰시는 것도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당신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예수님을 따르는 길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참되고 유일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종, 주님의 도구’인 우리들 - “거룩한 철부지의 삶”>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보이셨나이다.”
(마태11,25)
행복은 선택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그 어디든 가까이 내 삶의 자리에서 행복을 선택해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종으로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겸손과 온유의 마음으로, 찬미와 감사의 마음으로 살면 참행복한 삶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가르침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고, 자신에게 떳떳하게 행동하면, 누군가를 가르치는 어른이 되고, 일상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다산>
다산의 말씀도 멋집니다.
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일 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을 때 참기쁨, 참행복의 주님의 종으로 살 수 있겠습니다.
“군자는 세가지 즐거움이 있다.
부모형제에게 탈이 없는 것, 하늘과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 영재를 가르치는 것이다.”
<맹자>
역시 맹자다운 말씀으로 주님의 종으로서 손색이 없는 삶입니다.
무엇보다 닮고 싶은 것은 하늘과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입니다.
부끄러움없이 하늘을 바라볼수 있다면 참행복한 주님의 종들입니다.
자주 자신을 성찰하라고 눈 들면 어디나 하늘입니다.
18년 전 “언제나”라는 고백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언제나
높이보다는 깊이를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을
드러나기보다는 드러나지 않음을
복잡함보다는 단순함을
특별함보다는 평범함을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을
시끄러움보다는 고요함을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을
부수적인 것보다는 본질적인 것을
보이는 것보다는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라!”
-2006.
이에 앞선 “수묵화水墨畵처럼” 이란 글도 마음이 끌립니다.
“천연색 사진보다
빛과 어둠이 신비로이 조화된
흑백 사진이 좋듯이
천연색 마음 들떠 가볍게 하는 봄, 여름, 가을 풍경보다는
수묵화처럼
깊고 고요한 넉넉하고 편안한 겨울 풍경이 좋네.”
이래서 고독과 침묵을 사랑하는 수도승들은 겨울을 유난히 좋아하는가 봅니다.
문득 나이 50이 넘으니 겨울산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어느 수녀의 말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도구로서 묵묵히, 겸손히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이런 주님의 종으로서 제분수를 모르고 기고만장한 모습은 정말 꼴불견입니다.
바로 제1독서, 하느님 징벌의 도구인 아씨리아가 제 분수를 많이 벗어났고 주님의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에 이어지는 분수에 넘친 아시리아에 대한 주님의 질책이요 이와 아랑곳없는 무지한 아시리아의 자기확신입니다.
의인화된 아시리아 제국의 교만한 행태가 오늘의 제국을 보는 듯 합니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하느님을 망각한 제 분수를 잊은 교만한 제국의 행태요, 정말 겸손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지도자를 보고 싶습니다.
지도자의 외로움과 고독은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요, 희망이자 빛’이신 주님을 찾으라는 신호입니다.
각계각층 지도자 위치에 있는 분들은 정말 기도해야 할 난세 중의 난세입니다.
다시 제분수를 잊은 아시리아의 건방진 행태에 대한 주님의 신랄한 질책입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아시리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오늘 복음의 주님의 겸손한 종, 주님의 참 좋은 도구인 예수님이 우리가 본받을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앞서 무도無道하고 사악한 불신의 세 도시를 꾸짖던 자세와는 판이합니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유일한 감사기도이자 찬양기도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께 감사하는 당대의 철부지 제자들은 바로 오늘 우리가 소망하는 모습입니다.
아버지란 젊잖은 호칭이지만 원래 아람어는 “아빠”입니다.
얼마나 아빠 하느님과 친밀한 부자관계의 예수님인지 잘 드러납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우리 또한 주님의 참 좋은 종으로, 도구로 살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가리키는 바 하늘나라의 신비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는 일상화된 감사찬양기도의 아름다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같이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삶을 택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늘나라의 신비를 사는 철부지 ‘거룩한 바보’의 삶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
참 마음 설레게 하는 말마디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사는 철부지야 말로 참행복, 참부자, 참자유인입니다.
역설적으로 대우大愚의 사람이자 동시에 대지大智의 사람들입니다.
정말 살 줄 하는 진짜 지혜로운 자들은 철부지 제자의 삶을, 주님의 충실한 종의 삶을 원할 것입니다.
이어 우리가 평생 추종하는 예수님의 신원이, 아버지와의 관계가 은혜로이 계시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이처럼 아버지와 독보적인 관계에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우리 삶의 참보물이자 참행복이신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의 최고의 종이자 도구인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날로 깊이함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예수님과의 우정이 깊어 갈수록 날로 거룩한 철부지의 삶, 겸손과 온유, 감사와 찬양의 삶, 주님의 충실한 종이자 도구로서의 삶일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 은총이 날로 예수님과의 우정을 깊이해 줍니다.
늘 바쳐도 늘 좋고 새로운 제 좋아하는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포기한다면, 부활은 허황된 꿈일 뿐입니다>
연령회에서 11월 위령성월을 ‘죽음에 대한 교육’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에게 죽음이란?’이라는 주제는 본당신부님이 하는 거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까지 죽음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지 않았습니다.
강의 부탁을 받으면서 ‘신앙인에게 죽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말에 ‘죽음’과 관련된 단어가 있습니다.
자주 듣는 말이 ‘돌아가셨습니다.’입니다.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여행을 가듯이, 죽음은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운명하셨습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관계가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말에 죽음은 어딘가로 떠나는 여행과도 같고, 이 세상과의 관계가 끝났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딘가로 떠났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갔다 오라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제사를 교회는 ‘우상숭배’라고 여겼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 복자는 제사를 거부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제사’를 조상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인정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설과 추석’에 차례를 지낼 수 있도록 예식을 마련하였습니다.
‘연도’는 죽은 이를 위한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연도는 고인의 유족들에게는 깊은 위로가 됩니다.
연도는 이제 하느님의 품으로 가는 이를 위해 성인들의 통공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구약성서 마카베오서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엘아자르의 이야기입니다.
마카베오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엘아자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도 많고 풍채도 훌륭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사람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럽혀진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자진해서 형틀로 나아가며 돼지고기를 뱉어 버렸다.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엘아자르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일곱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마카베오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어떤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채찍과 가죽 끈으로 고초를 당하며,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은 일이 있었다.
"이 사악한 인간, 당신은 우리를 이승에서 몰아내지만,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우리 형제들은 잠시 고통을 겪고 나서 하느님의 계약 덕분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소.
그러나 당신은 주님의 심판을 받아 그 교만에 마땅한 벌을 짊어질 것이오.”'
일곱 형제와 어머니는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위령기도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신앙인들에게 죽음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사람들은 깊은 위로를 받습니다.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지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서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섰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섰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입니다.
부활은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나의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포기한다면 부활은 허황된 꿈일 뿐입니다.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과의 기도를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대화의 한자어를 보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Dialogue인데, 어원상 고대 그리스어 dia(통과하다, 사이로)와 logos(말, 말씀)에서 왔습니다.
직역하면 ‘말을 통과하다’, ‘사이로 말하다’로, 말이란 서로를 통과해서 나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한쪽에서 일방적이 되어서는 대화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화를 잘 하십니까?
예전에 휴대전화가 없었을 때는 공중전화 줄이 길게 서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휴대전화가 나오고서는 길을 걸어가면서 길게 통화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화로 길게 통화하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메신저를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또 메신저로 소통할 때도 유행어와 이모티콘 표현이 가득해서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대화하지 않는 시대에 사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 대화가 없어진 것은 아닐까요?
꼭 필요한 대화이지만, 대화가 없다 보니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해도 많습니다.
이런 대화 부족이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잠시 기도하는 것도 어려워하며, 메신저를 통한 간단한 대화처럼 짧은 기도에만 익숙해져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미사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성체만 마치고서는 밖으로 나가시는 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주님 곁을 떠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짧은 기도, 짧은 만남을 통해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있을까요?
계속된 오해와 불통으로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식사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전교 활동 가운데에서도 홀로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당신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고, 어렵고 힘든 시간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범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바쁘다고, 힘들다고 대화를 멈춰버리면 당연히 주님과의 관계도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 대화도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가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불평불만만 하고 있다면 과연 대화가 가능할까요?
대화가 되지 않고 가까운 관계도 되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기도를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이렇게 계속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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