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날, '빨갱이 남로당' 박정희와 나의 부친 이야기 평등 공산(共産) 세상을 만들겠다고 모든 걸 걸었던 부친의 꿈은 北이 아닌 南에서 이뤄졌다. 이민복(대북풍선단장)
. 탈북하여 남한에 오니 견학 코스 중에 동작동 국립묘지 방문도 있다. 박정희 묘도 참배하였다. 북한에 있을 때 가장 많이 욕했던 이의 앞에 서니 어색할 정도였다. 기타 국립묘지들을 다 돌아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벌써 30년 가까이 돼 오지만 내 안에서 이런 질문이 아직도 맴돈다. 적화 통일되면 인정사정 없는 공산당은 이 묘들은 다 없애버리겠지. 반대로 자유 통일되면 북한의 혁명열사, 애국열사, 625전사자 묘들도 없애야 할까. 나는 없애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비극이지만 역사이기에 남겨야 한다고 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남북한, 좌우익 화합 차원에서라는 것이다. 김 부자와 북한을 위해서 죽은 이들은 어쩌면 주어진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다. 불변할 反사회적 인간처럼 마냥 나쁜 이들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고 본다. 나름대로 지상 낙원을 만들자는 이상가들이 적지 않았다. 죽은 이들은 그렇다 치고 그 남은 연고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은 자들을 나쁜 놈이라고 하면 남은 연고들은 이유를 떠나 좋아할 리 없다. 좋아할 리 없는 정도가 아니라 반기를 들어 불안이 조성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긴 입장, 대승적 입장에 서야 한다고 본다. 사기 치고 과장된 것들만 정리하고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빨갱이는 무조건 다 나쁠까. 변함이 없는 상태로 보면 나쁘다. 하지만 만물이 변하듯이 빨갱이도 변한다. 변하면 빨갱이가 아니었던 이들보다 더 反빨갱이로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남로당 군사 총책이었던 박정희가 대표적이다. 죽일 수밖에 없던 때에 그를 죽였더라면 오늘에 대한민국이 안될 수도 있다. 박정희에 대한 것은 다 알기에 생략하고 저의 집안 얘기를 하려고 한다. 부친은 남로당 군(郡) 선전부장을 할 정도로 빨갱이였다. 빨갱이가 되고 싶어서라기보다 운명이 부친을 선정하였다. 고을에 면장감은 부친이라고 할 정도로 영특한 대상을 포섭한 것은 북한 중앙당 파견 김복동이란 공작원이었다. 그때가 1946년이다. 남한은 정부도 없이 좌우익으로 피 터지게 싸우고 있을 때 북한은 벌써 '림시인민위원회'라는 정부를 세우고 남한까지 먹을 시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친 고향에는 공산 혁명의 백전 노장 팔로군 출신 김복동을 파견한 것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지향하던 '똑똑하다'는 부친은 평등 사상에 금방 매료가 된다. 산이 없는 허허 벌판의 호남이 고향인지라 공동 무덤을 파 아지트로 잡고 투쟁하였다고 한다. 중앙당에서 지급한 권총도 세 자루 있었다고 한다. 권총 이름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소련제 떼떼 권총과 육혈포. 장장 그때를 회상하여 입버릇처럼 주로 얘기한 것은 '5·10 망국 단독선거 반대 투쟁'이었다. '4·3 사건' 역시 이러한 일환으로 제주도에서 일어난 건이다. 그럼에도 북한과 남로당이 주도한 것이 아닌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 부친의 생생한 증언 역사이다. 부친은 부친대로 이것이 옳은 줄로 알고 목숨 걸고 투쟁하였다. 6·25 전쟁으로 인민군 치하가 되자 부친은 당연히 고향 간부가 된다. 연설을 멋들어지게 잘하여 남로당 군 선전부장이 된 것이다. 지방 빨갱이가 학살 만행에 악질이었다고 한다. 사실들이다. 하지만 예외도 있었다. 부친의 경우가 그렇다. 못 살던 이들이 부자들을 죽이자고 나서니 부친이 이렇게 말렸다고 한다. "죽이지 말아! 마을 사람인 그들을 죽이는 것은 너의 가족을 죽이는 것과 같다!" 학살이 만연했던 주변과 달리 부친이 관할했던 곳은 만행이 없었다. 그 아들로서 자유를 찾아 탈북하여 부친 고향에 가니 이 점을 높이 산다. 그때 살아난 부자 출신의 어떤 할머니는 저를 돕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물러갈 때 부자들이 부친에게 권고했다고 한다. 당신을 우리가 보증하겠으니 북으로 가지 말라! 하지만 평등 공산 사상으로 신념화되었던 부친은 인민군 6사를 따라 월북하였다. 월북하였어도 남은 부인과 딸, 친척은 아무런 해코지를 당하지 않았다. 탈북하여 온 나도 현재 부친 고향에 가는 것이 아무런 지장이 없다. 선산까지 인계 받아 관리하며 조상을 그리며 꾸미고 있다. 평등 공산 사상이 좋아 월북한 부친의 인생 마감은 어떻게 되었을까. 남로당 당수 박헌영을 미제 간첩으로 처형할 만큼 남 출신들의 운명은 비극 그 자체이다. 그 속에서 살아 남아 공산대학을 나오고 통일되면 '남원군 당비서'(군수 격)될 임명 간부였다. 하지만 부친은 공산주의 북한을 살아보고 남긴 마지막 결론이 이렇다. "정치(공산주의)는 최대의 협잡이야!" 최대의 사기라는 것이다. 그 아들인 내가 이것을 다듬어 결론하면 '공산주의는 공상주의, 사회주의는 사기주의'이다. - 이제는 지나간 역사이다. 또 지나간 가정사이다. 그럼에도 빨갱이었던 부친에 대해서 할 말이 무엇이 남았을까. 옳고 그름을 떠나서, 좋고 나쁨을 떠나서 평하고 싶다. 부친은 뭔가 새로운 좋은 세상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 이상인으로서 가정 교육에서 남다른 차이가 나타난다. 부친은 술, 담배를 본인도 하지 않았고 자식에게도 엄격하였다. 학급에서 담배 피우지 않은 학생은 지금도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3명밖에 없었다. 금희상, 김옥균, 나인 이민복이다. 금희상은 부친 금성모 역시 남 출신이었다. 하지만 금희상은 종래 왕따시킴에 굴복하여 담배를 피웠다. 김옥균은 학교 악대로 동원되어 왕따 될 조건이 안되 고수되었다. 마지막 남은 나는 왕따보다 더 무서운 부친 때문에 고수되었다. 한편 학교 씨름 선수 출신이었기에 고수된 것도 있다. 부친은 항상 아들인 나에게 '남자는 반드시 대학을 나와야 한다.' 물론 아래 여동생도 준 의사였다. 고향 정세를 잘 아는 부친은 - 남조선 사람들의 실력이 대단하다. 실력이 낮아 가지고는 그들을 지도할 수 없다고 강조하셨다. 이 덕에 책 보는 것이 취미, 도서관에서 사는 학생으로 되었다. 학교 적으로 2등의 실력으로 북한 최고의 기술대학인 김책공업대학 반도체 공학부 응시도 하였다. 물론 남 출신이란 가정 토대가 걸려 중앙 대학을 갈 수가 없었다. 쳇바퀴 돌리듯 여유가 없는 북한에서 자습으로 대학 나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자습 즉 검정으로 대학을 나왔고 과학원 연구원이 되었다. 부친도 사리원, 평성 공산대학 수석 졸업생이다. 아들인 내가 탈북하여 남한에 오니 친척들이 엄청 많다. 부친 형제 중에서 대학을 나온 이는 월북하였던 부친 외에 없다. 그 자식들도 엄청 많지만 대학을 나온 것은 북한에서 온 내가 유일하다. 물질적으로는 부자들인지 모르겠지만 교육 수준은 월북하였던 부친과 그 자녀가 훨씬 앞서 있는 것이다. 조상을 모시는 관점도 남북한 가족이 매우 달랐다. 흔히 민속 전통을 말살한 북한보다 남한 사람들이 조상을 잘 모시고 산다. 하지만 우리 가문만은 정반대로 나타난다. 선산을 상속 받은 장자는 남한의 큰 삼촌의 맏아들이다. 하지만 그 많은 재산과 선산을 받고도 해 놓은 것이 앉은 돌 비석 하나이다. 보다 못해 북한에서 온 내가 관리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돌아가시기 전에 선산을 그냥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3분의 1 가격으로 싸게 파신다고 하셨다. 탈북하여 온 내가 기꺼이 샀고 장자가 되었다. 조상을 모시는 정신은 월북하였던 부친으로부터의 영향이다. 가정적으로 남은 인생은 선산에 온 재산과 정성을 투자해 조상을 '영원토록' 그리게 하려고 노력하고 준비해두고 있다. - 선산을 포클레인으로 가꾸기 위해 동트기 전에 나가니 마을마다 새빨간 등이 보이는 것이 인상 깊다. 호남벌 평야이니 사방 마을들이 빤히 보인다. 그 새빨간 등은 '빨갱이' 등이 아니다. 십자가이다. 호남 지역은 유난히 기독교회가 마을마다 있다. 평등 공산 세상을 만들겠다고 모든 걸 걸었던 부친 생각이 난다. 김일성은 '쌀은 공산주의!'라고 했다. 그 빨갱이 세상에서 쌀은 고사하고 옥수수도 없어 대량 아사했다. 하지만 빨갱이와 꼭 반대되는 십자가 세상에서 쌀은 넘친다. 부친이 그렇게 만들려고 했던 인생 념원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훨씬 전에 돌아가셨지만 아마도 생전 보셨다면 군말 없이 인정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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