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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26,7-9.12.16-19
7 의인의 길은 올바릅니다.
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
8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9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당신의 판결들이 이 땅에 미치면 누리의 주민들이 정의를 배우겠기 때문입니다.
12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평화를 베푸십니다.
저희가 한 모든 일도 당신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신 것입니다.
16 주님, 사람들이 곤경 중에 당신을 찾고 당신의 징벌이 내렸을 때 그들은 기도를 쏟아 놓았습니다.
17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 주님, 저희도 당신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
18 저희가 임신하여 몸부림치며 해산하였지만 나온 것은 바람뿐.
저희는 이 땅에 구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누리의 주민들을 출산하지도 못합니다.
19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이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이는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의 짐’과 ‘율법의 짐’을 지고서 잠자리에 누워서까지도 신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안식'으로의 초대는 이러한 인간의 비참을 보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다함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안식'으로 초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고자 오늘 우리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마태 11,29)
‘멍에’란 자신의 몸 위에 걸쳐지지만, 짐을 편하게 지거나 끌게 합니다.
그것은 짐을 함께 지거나 함께 끌며, 짐 아래에 눌리지만 짐을 가볍게 합니다.
자신의 몸 위에 놓이지만 온유하고, 짐 아래에 놓여 겸손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가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었듯이,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에게서 배워라.”는 말씀은 단지 ‘당신을 모방하라’ 혹은 ‘당신의 경험을 배우라’는 의미가 아니라, 당신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진리를 배우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길'을 제시하는 스승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바로 '길'이십니다.
그리고 '길'이신 당신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마음을 제자들 안에 건네주십니다.
이 마음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으로서 타인을 섬기며 고난을 겪어서 타인의 아픔을 아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안식'으로 초대할 수밖에 없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 11,29)
이는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얻을 것이다'의 원어의 뜻은 '찾다', '발견하다'는 뜻입니다.
곧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찾고 발견되는 것이며, 그분이 이를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만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쉼', 이를 두고 그레고리우스는 ‘관상’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란 단순히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도 바오로가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품으십시오.”(필립 2,5)라고 했던, 바로 그 '마음'을 선물로 건네주십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라고 고백했던 바로 그 '마음'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 마음'에서 사랑을 퍼 올리는 그분의 제자들입니다.
그 사랑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 마음'이 이미 안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30)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고수 짐꾼의 편하기 짐 지는 비결>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30)
오늘 주님 말씀은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졌을지라도 우리가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기쁜 소식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런 기쁜 소식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누구에게 찾아가지 말고 당신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삶이 너무 고달프고 힘들 때 우리는 누가 생각납니까?
즉시 엄마가 생각나고 엄마 품에 안기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엄마보다도 주님이 더 완전한 안식을 주신다!
이렇게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믿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구에게 갑니까?
주님입니까?
엄마입니까?
다른 누구입니까?
주님이 아닌 다른 누구라면 왜?
그의 안식이 주님의 안식보다 낫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주님의 안식이 아무리 완전하고 탁월할지라도 멀리 있는 휴게소처럼 내게는 멀거나 내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의 안식은 사실 우리가 얻기 쉽지 않다는 면에서 멀리 있기도 하고 우리 입맛에 맞지 않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안식을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안식은 겸손과 온유로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기가 쉽습니까?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겸손하고 온유하기는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지요.
주님께서도 고생을 아니 하고 짐을 지지 않게 해주심으로써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지 않고
짐을 지되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마음으로 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안식은 얻기 쉬운 것이 아니라 어렵고, 이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어차피 져야 할 짐을 가볍게 지는 비결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져야 할 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가 져야 할 자기 십자가를 남의 십자가라고 하거나 내가 왜 그것을 져야 하느냐? 왜 나만 이런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이렇게 분노하기도 하고 따지기도 하며 거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것이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마음이 아니지요.
그리고 이런 마음일 때 짐이 더 무겁고 견디기 힘듭니다.
요즘처럼 후텁지근하게 더울 때 ‘왜 이렇게 더운 거야!’하며 짜증 내면 더 더울 뿐이지요.
그런데 일부러 불한증막에도 들어가는데! 하며 받아들이면 덜 괴롭지요.
이렇게 어차피 져야 할 내 짐이요 내 십자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바로 온유의 마음이고 겸손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 십자가 곧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는데,
프란치스코는 더 나아가 그 십자가를 주님의 십자가로 지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매일 지는 일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이 바로 겸손과 온유한 마음을 넘어 사랑으로, 그것도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짐을 지는 것인데,
이것이 더 완전한 고수 짐꾼이 편하게 짐을 지는 비결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하던 일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 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던 일을 남이 권하면 오히려 안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면 신이 나고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면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이 들고 능률도 떨어집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신이 나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 앞서 해야 할 일을 먼저 할 소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더군다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멍에와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분의 멍에와 짐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짊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드셨겠지만, 사랑의 극진한 표현이었기에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30)
율법 학자들은 율법의 규정이라는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에게 짊어 지게 하고 내용보다는 형식에 매여 백성을 힘들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의미와 내용을 자발적으로 지키고 또 가르침으로써 편한 멍에와 짐이 되게 하셨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상당히 많았는데 248조항이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금령으로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계명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계명을 다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조항의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였고, 그 두 계명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더 힘든 요구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언정 그 멍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1요한 5,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일상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불편한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멍에는 주님과 깊은 만남 안에서 오는 위로와 평화의 원천입니다.
기쁨을 위한 희생과 봉헌의 기초입니다.
혹 힘들고 지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정령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신 주님을 꼭 붙잡길 바랍니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주님 말씀을 기억하며 의탁하시길 바랍니다.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말씀에 힘입어 희망을 간직합니다.
더 큰 사랑을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갖은 시련 속에서도 하루 하루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늘 쌩고생을 반복하고 무거운 삶의 무게에 허덕이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한번 뿐인 소중한 인생이기에 매일 매순간을 축제 즐기듯, 수행여행 가듯 가슴 설레며 살아야 마땅한데, 어렵고 지루한 숙제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그에 대한 명쾌한 정답이 오늘 복음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 28-30)
우리가 이 좋은 세상, 이 좋은 시절을 힘겹게 살아가는 이유는 주님께로 나아가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시시각각 주님의 현존 안에 살면서도 그분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시고,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신다는 진리를 잊지 않고 산다면, 그 어떤 수고나 고생, 시련과 상처에도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를 맞이하며 치매로 고생하는 어르신을 봉양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늘 환하게 웃으며 열심히 기도만 하는 순한 치매도 있다지만, 그런 치매 환자는 백 만 명 중의 한 명 꼴입니다.
현실은 어떻습니까?
수시로 의심하고, 공격하고, 다투고, 힘들게 합니다.
끊임없이 이리 저리 배회를 하고 가출을 시도합니다.
폭력과 욕설을 거듭하는 치매 환자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케어하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노고가 만만치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지옥과도 같습니다.
대체 하느님 뭐하시나, 상태가 저 모양인데, 사람 노릇도 못하시는데, 빨리 데려가시지 않고,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특별한 형제를 봤습니다.
어르신을 마치 사랑하는 아기 다루듯이 대하십니다.
동화책도 읽어드리고, 식사를 거부하시는 어르신을 살살 달래가며 법을 떠먹여 드립니다.
수시로 게임도 하고 퀴즈도 내며, 어르신과 함께 하는 하루를 놀이하듯 재미있고 기쁘게 지냅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 가족들, 또래 환자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납니다.
두 분 주변은 언제나 웃음꽃이 활짝 피어납니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것, 분명 무거운 짐이 확실합니다.
그들을 하루 온종이 케어한다는 것, 쌩고생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주님께서 굳건히 현존하고 계시고, 그 어르신 안에도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그 일을 기쁨이요 축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굳은 일, 힘든 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에도 큰 의미가 있음을 확신하고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임한다면, 그 일이 곧 복음화요 주님의 일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런 고생 저런 시련 속에서도 하루 하루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매일 주님 앞으로 나아가며, 그분 현존 안에서 살아가며, 천진난만한 어린이처럼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겨드리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성당은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30)
1)
이 말씀은 루카복음에 있는 ‘희년선포 말씀’에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8-19)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기쁨’과 ‘해방’과 ‘자유’를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 구원에서 배제되는 사람도 없고, 그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따라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과 “무거운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입니다.
여기서 ‘안식’이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 생명, 평화, 행복, 기쁨 등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의 구원이 나에게는 필요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논쟁을 벌였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ㄴ-32)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요한 8,3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요한 8,34ㄴ-3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면, 즉 당신을 믿고 회개하고 당신의 가르침대로 살면 참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자기들은 자유를 잃은 적이 없다고, 자기들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감방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열쇠를 주어도, 이곳은 감방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면, 예수님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요한 9,39-41)
보아야 할 것을 보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구원받기를 거부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평화와 안식을 얻어 누리려면, 지금 자기가 무거운 짐과 멍에의 억압 속에 있다는 것부터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무거운 짐도 없고 멍에도 없다. 나는 자유롭게 잘 살고 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 것입니다.
그러다가 심판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가 온갖 죄와 죽음이라는 짐과 멍에의 억압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평화와 안식을 외면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임종 순간에 그것을 깨닫고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그 순간에라도 회개하고 신앙을 받아들이고 임종을 맞이한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냥 후회만 하면서 생을 마치는 경우가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인생의 모든 고통에서, 또 죄와 죽음이라는 억압에서 해방되기를 희망하고, 그 해방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예수님만이 참 안식과 해방과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4)
예수님 말씀에서 ‘내 멍에’는 반어법적 표현입니다.
멍에 자체가 하나도 없는 것이 진짜 해방이고 안식입니다.
따라서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나의 계명과 가르침대로 살면 온갖 멍에와 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너희의 멍에를 벗겨서 편안함과 가벼움을 주는(참된 안식을 주는) 열쇠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결코 멍에가 아닙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무거운 멍에를 당신의 가벼운 멍에로 바꿔 주시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무겁든지 가볍든지 멍에는 멍에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멍에와 짐을 완전히 없애 주시는 분입니다.
성당은 주님과 함께 안식을 누리는 곳, 즉 안식처입니다.
만일에 신자들이 성당에 와서 안식을 누리기는커녕 여러 가지 부담만 잔뜩 얻는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사목자들의 잘못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 - “주 예수님”>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습니다.”
(시편 90,1)
오늘 말씀 묵상 중 떠오른 시편 성구입니다.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안식처를 찾습니다.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 안식처에 고요히 편안히 머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저에게 날마다 고요한 밤에 일어나 강론을 쓰는 난향기 은은한 집무실은 주님의 안식처를 상징합니다.
장마철 힘차게 쏟아지는 장대비가 흡사 하느님의 오케스트라를 듣는 듯 마음 안에 열정을 샘솟게 합니다.
저에게는 하루중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안식처 대신 정주처, 피난처로 명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제 받은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신부님, 안녕하셔요? 저는 며칠간 휴양림에 가서 푹쉬고 왔습니다.
그곳에서는 tv는 물론 핸드폰도 안터지는 첩첩산중이였습니다.
불편함 보다는 편안한 마음이 더했습니다.”
휴양림이 상징하는 바 안식처요, 언제 어디서나 ‘마음의 휴양림’을 늘 지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교황님이 젊은 사목자들 모임에 주신 메시지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Let your youth be a gift for Jesus.(네 청춘이 예수님을 위한 선물이 되도록 하라.)”
청춘(youth)대신 인생(life)을 넣어 “네 인생이 예수님을 위한 선물이 되도록 하라” 해도 너무 잘 어울립니다.
이웃에게 '주님의 안식처'가 되는 선물 인생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보람차고 행복하고 아름답겠는지 간절히 소원하는 마음입니다.
아마도 마산 출신 이은상의 국민 가곡 ‘가고파’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10절까지 이어지는 구구절절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참 간절하고 애절합니다.
어제 잠시 불러본 ‘가고파’로 시작해 ‘보고파’로 끝나는 2절까지만 인용합니다.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가고파와 보고파의 대상인 고향은 대부분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실향민입니다.
저는 서품식 때 가족 사진을 집무실 책상 위에 놓고 지내니 흡사 고향을 옮겨 놓은 듯 합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바로 영원한 안식처를 찾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고향을 찾듯, 본향을 찾듯이 알게 모르게 무수한 이들의 주님의 집인 여기 요셉 수도원을 찾습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영원한 안식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인 예수님 안에서 살 수 있기에 영적 실향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기도가 참 아름답고 위로가 됩니다.
우리 하느님이 명실공히 우리의 안식처가 됨을 감사로이 깨닫게 됩니다.
주옥처럼 빛나는 시같은 기도 구절들 길다 싶어도 다 인용합니다.
참으로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살고자 하는 모두가 바칠 수 있는 기도입니다.
“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평화를 베푸십니다.”
“저희가 임신하여 몸부림치며 해산하였지만, 나온 것은 바람뿐, 저희는 이 땅에 구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누리의 주민들을 출산하지도 못합니다.”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이다.”
바로 이런 주님을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아니 날마다 만납니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이자 피난처이신 주 예수님입니다.
먼지 속 형제들이여, 깨어나 환호하십시오.
주님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이슬' 하니 오래 전 ‘별꿈’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풀잎들 밤새
별꿈 꾸며 잠못 이루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방울들”
<2001.10.1.>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 영롱하게 빛나는 별꿈 인생을 살게 합니다.
당신의 안식처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초대가 반갑고 고맙습니다.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는 구원에로의 초대요 환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당신의 초대에 응하는 자에게 주시는 무상의 선물이 주님의 안식입니다.
단 하나의 조건이 붙습니다.
평생 주님의 사랑의 배움터인 공동체에서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 불편한 멍에는 주님의 편한 멍에로, 내 무거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바꿔집니다.
온유와 겸손이 깊어지면서 주님을 닮을수록 날로 자유롭고 편안한 삶에 온전한 안식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값싼 은총은, 안식은 없습니다.
평생 온유와 겸손의 훈련과 더불어 주님의 참 안식의 선물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를 날로 자유롭고 평화롭고 홀가분하게 하는 주님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의 안식처에서 심신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과의 일치가 바로 안식이자 치유입니다.
평생 지니고 평생 화두로 삼고 지내야 할, 가훈으로 정해도 기막히게 좋을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9-30)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고난과 고통이 찾아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안전한 곳>
마트에 가면 음식 시식코너가 있습니다.
과일을 주기도 하고, 떡갈비를 주기도 하고, 나물 비빔밥을 주기도 합니다.
물건을 사고 나오려는데 과일 시식 코너의 자매님이 제게 인사했습니다.
뉴저지에서 왔는데 아직까지 성당엘 못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사제복을 입었기에 저를 알아보았습니다.
저도 뉴욕에서 왔기에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자매님은 일이 정리되면 성당에 오겠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마트에서 일하는 교우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모두 저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성당에서 교우들을 만나는 것도 감사할 일이지만, 이렇게 삶의 현장에서 교우들을 만나는 것도 기쁨입니다.
댈러스 중앙일보 창간식에도 다녀왔습니다.
대표가 신자이기도 했고, 댈러스 오기 전에 저도 신문사에서 있었기 때문에 다녀왔습니다.
창간식에 온 분들 중에서 신자 분들은 제가 있는 테이블로 와서 인사했습니다.
타 지역에서 왔기에 저를 처음 보았지만, 제가 사제이기 때문에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마트와 신문사 창간식을 다녀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신자들이, 좋은 사제를 만들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좋은 사제들이 좋은 신자를 만들지 않을까?”
교우들이 최고경영자로서 사제를 맞이하려고 하면 사제는 성공과 긍정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우들이 선포자로서 사제를 맞이하려고 하면 사제는 십자가와 겸손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밀알 하나로 남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이 되는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성공과 부흥의 말씀은 파장이 되어 잠시 머물겠지만, 십자가와 겸손의 말씀은 가슴에 남아 행동의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토요일마다 청년 교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1명이나 2명이 함께 했는데 요즘은 15명이 넘게 온다고 합니다.
미사 후에 친교를 나누는 모임도 시작했는데 그 모임도 청년들이 함께 한다고 합니다.
말씀과 친교를 함께 하니 청년들이 말씀에서 힘을 얻고, 친교를 통해서 우정을 나눈다고 합니다.
지치지 않고, 꾸준히 말씀을 나누니, 청년들이 그에 호응하였습니다.
친교는 빠질지라도, 교리는 빠지지 않는 청년들이 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사제 곁에는 좋은 신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사람들이 곤경 중에 당신을 찾고, 당신의 징벌이 내렸을 때 그들은 기도를 쏟아 놓았습니다.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 주님, 저희도 당신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
의인의 길은 올바릅니다.
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배를 떠났을 때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강대한 나라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유배를 떠나는 유대인들은 절망과 허탈감이 가득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하느님께서 징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언젠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고, 흩어졌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행복하게 살날이 올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 속담에 ‘밑 빠진 독에 물 붇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하루 24시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고, 가족들과 대화를 하고, 책을 읽고,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피정을 하면서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본인만을 위해서, 욕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누군가를 시기하고 험담하면서, 음주와 도박을 하면서 시간을 사용합니다.
처음은 별로 표시가 나지 않겠지만 한쪽은 안전한 곳간에 재물을 쌓은 사람과 같고 다른 한 쪽은 깨진 독에 물을 부은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안전한 곳간을 말해 주고 계십니다.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고난과 고통이 찾아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안전한 곳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재물은 함께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빈소에 와서 울어 주기는 할 것입니다.
가족들은 장지에 와서 우리를 묻어 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끝까지 함께 하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뿐이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품과 같은 겸손과 사랑으로 무장한다면>
운전하는데, 앞차 승용차 뒷유리에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는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기가 타고 있으니 가까이 오지 말고 안전 운전을 해달라는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속도를 줄여서 앞차와의 간격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차가 안전 운전을 하지 않았습니다.
속도를 내서 차선을 계속 급하게 옮기면서 운전하는 것입니다.
남들에게는 안전 운전을 요구하면서도 본인은 정작 하지 않는 모습에, “저럴 거면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는 글은 떼어내야지.”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래. 지금 무척 바쁜 상황이라서 그럴 거야.”라는 말로 스스로 위안을 해봅니다.
사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라는 생각을 품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남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자기를 꼼꼼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겸손은 한없는 낮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굳이 낮출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하느님이면서도 인간보다 더 낮은 자리를 선택하십니다.
자기를 누구보다 잘 아시기에 실제로 보여주신 모습인 것입니다.
하느님인지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구세주임을 몰랐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지 않는 행동을 하실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셨기에 진짜 겸손을, 진짜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이유로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품이야말로 가장 편안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갓난아기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곳은 어딜까요?
어머니의 품속입니다.
저는 아이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갓난아기가 힘차게 울어 젖히는 상황에서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안는다고 하면 어떨까요?
아마 더 힘껏 울 것입니다.
이때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어머니 품 안에 들어가야 울음을 멈추고 방긋방긋 웃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안겨야 할 곳은 바로 예수님 품입니다.
진정한 겸손과 따뜻한 사랑이 있는 그 품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주님 품 안에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우리 역시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품 안에 나의 이웃들이 안길 수 있는 겸손과 사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끊임없는 근심거리와 걱정거리가 밀려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곳으로만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품과 같은 겸손과 사랑으로 무장한다면 어떨까요?
무조건 힘들고 어려운 곳이 아닌 진정한 사랑의 장소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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