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장세정(張世貞)
어제 본 “가요 무대”는
옛날 가수 장세정(張世貞)의 특집이었다.
이 늙은 나이,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다.
내 어려서 듣고 늘 상 감탄해 마지않았던
청초(淸楚)한 그러나 애수(哀愁)의 강물이
잔잔히 흘렀던 그녀의 목소리.
“쌍고동 울고 울어 연락선(連絡船)은 떠난다.
잘가소 잘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기에
눈물을 흘리면서 떠나갑니다. 울지 말아요.“
LP판으로 들려주는 그녀의 노래에
나는 오랜만에 깊은 감회(感懷)에 젖어들었다.
아직 젊었을 때 축음기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언제나 나의 가슴은 뛰었었다.
가사는 구슬픈 그러나 아름다운 한 편의 시(詩)다.
관부(關釜) 연락선 데크에 기대어 서서,
부두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사랑하던 님을 향하여 손수건을 흔들며
떠나가는 여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노래와 1952년에 불렀다는 고향초(故鄕草)는
가요가 아니다. 국민가곡이다.
한(恨) 많은 백성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안수(按手)의 멜로디이다.
1936년 16살 나이로 평양방송국 개국 기념 노래자랑에서
일등을 하여 가요계에 데뷔했다는 평양 출신,
당대 최고 가수 이난영과 쌍벽을 이루었던 전설의 장 세정.
인생살이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장세정도 빗겨 갈 수는 없었다.
스무 살 전후의 어린 그녀는
중일 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군국가요 부르기를 강요당했다. 그래서
친일파라는 뜨거운 낙인(烙印)이 찍혔다.
조선 청년이 징용에 끌려가면 친일파가 되나?
장세정도 노래로 징용 살이 한 것뿐인데.
왜정 때 오케이 레코트 사장과 결혼.
두 아들을 낳고 남편은 일찍 죽었다.
6.25 전쟁 후에는 노래하기가 힘들었다.
그녀의 곡들을 작사하고 작곡한 사람들이 월북을 하여
그들이 만든 곡이 모조리 금지곡이 되었기 때문.
두 번의 전쟁이 그녀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1973년 미국으로 떠나 1978년 은퇴공연을 하였다.
다시 “가요무대”로 돌아온다.
전면 커다란 화면에는 1988년의 그림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가수들의 재미동포 위문 공연 장면이었다.
LA의 무슨 대 강당이라고 현수막에 적혀 있었다.
교포들로 가득 찬 강당 무대 위에는
사회자 김동건을 비롯하여 김정구, 백설희, 조용필,
최숙자, 송대관, 혜은희 등... 한국 가수들이 여럿 있었다.
한 가운데 휠체어를 탄 늙고 병든 할머니 한 분.
당뇨와 고혈압으로 몸이 많이도 망가진 할머니.
옆에서 노래를 불러보라고 해도 말도 못하고
손수건으로 눈물만 계속 닦아 내는 할머니.
저분이 한 때 가요계의 신데렐라 장세정이란 말인가?
그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면 늙지 않는 줄 알았었다.
백설희가 울면서 ‘연락선은 떠난다’를 부르는데 휠체어를 운전하던
김정구는 부르는 척만 하고 나머지는 눈물을 흘리느라 부르지 못하였다.
저렇게 아프고 저렇게 늙은 장세정을 보고 동류(同類) 로서의
슬픔이 터지는 장면, 그걸 보는 나도 눈시울이 뜨거웠다.
그녀는 2003년 82세로 타계했다.
“남쪽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었네
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그녀는 갔어도 그녀가 남긴 고향초(故鄕草)는
쉬지 않고 피어서 우리의 메마른 정서를 적셔준다.
김정구도 백설희도 최숙자도 갔다.
우리는 승선권 없이 연락선 탈 차례를 기다리는 승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