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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38,1-6.21-22.7-8
1 그 무렵 히즈키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는데,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가 그에게 와서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집안일을 정리하여라.
너는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2 그러자 히즈키야가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3 말씀드렸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히즈키야는 슬피 통곡하였다.
4 주님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내렸다.
5 “가서 히즈키야에게 말하여라.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6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너와 이 도성을 구해 내고 이 도성을 보호해 주겠다.’”
21 이사야가 “무화과 과자를 가져다가 종기 위에 발라 드리면, 임금님께서 나으실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22 히즈키야가 “내가 주님의 집에 오를 수 있다는 표징은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7 “이것은 주님이 말한 일을 그대로 이룬다는 표징으로서, 주님이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8 보라, 지는 해를 따라 내려갔던 아하즈의 해시계의 그림자를 내가 열 칸 뒤로 돌리겠다.”
그러자 아하즈의 해시계 위에 드리워졌던 해가 열 칸 뒤로 돌아갔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1-8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뜯어 먹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 12,2)
바리사이들이 트집 잡은 것은 그들의 배고픔이나 남의 곡식을 수확했다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워주시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 빵을 먹었던 사실을 말해주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하였던 것처럼 이제 당신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하느님의 집에 차려놓은 제사 빵에 한 일을, 아직 빵이 되지도 않은 ‘밀’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곧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이 아니라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 그것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 정신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뒤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 다음에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은 해도 된다.”
(마태 12,12)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성막을 가리던 휘장을 찢듯, 율법의 낡은 옷을 벗기시고 말씀으로 은총의 새 옷을 입히십니다.
그리고 선포하십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마태 12,6)
그리하여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마르 2,27)
그리고는 모세가 안식일을 야훼께서 주님이심의 표시로 선포하였듯이(탈출 31, 13), 안식일을 당신께서 주님이심을 알리는 날로 알리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 12,8)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 12,8)
주님!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새 옷을 입히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알고, 당신께 속한 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주인의 삶>
주인의 삶은 종의 삶과 다릅니다.
종의 삶을 생각할 때 즉시 떠오르는 것이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지 않은데도 주인이 하라니까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좋을 대로 하는 것이 주인의 삶일까요?
퍼뜩 생각해도 다시 말해서 깊이 생각지 않아도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란 우선 다른 사람을 상관하지 않는 자기중심성입니다.
이런 삶으로는 행위의 주인이 될는지 모르지만 행복의 주인은 못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살면 행복하겠습니까?
이렇게 살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존중할 것이며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겠습니까?
당장 태클이 들어갈 것이고 결국 자기 좋을 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좋을 대로 사는 것은 실제로 자기가 주인인 삶이 아니고, 행복의 주인이 되는 삶은 더더욱 아닙니다.
주인의 삶은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다스릴 줄 아는 삶입니다.
그러니 주인의 삶은 좋을 대로 산다며 실은 욕망에 휘둘리는 그런 삶이 아니라 욕망을 다스릴 줄 아는 삶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한 바 있습니다.
“죄를 지을 때나 해를 입을 때 자주 원수나 이웃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육체를 통해서 죄를 짓게 되는데 누구나 그 원수, 즉 육체를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지배 아래 넘겨진 그러한 원수를 항상 손아귀에 집어넣고 그에게서 슬기롭게 자기 자신을 지키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주인의 삶은 스스로 옳게 식별하고 선택할 줄 아는 삶입니다.
식별의 기준은 늘 자기의 행복이고, 이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무엇을 소유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누구를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심지어 하느님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삶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불교의 유명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버리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버려라!'
'부처가 나를 집착하게 하면 부처를 죽여버리고, 불경이 나를 집착하게 하면 불경을 태워버려라!'
사실 진정한 나는 우주의 중심입니다.
내가 없으면 우주도 없는 것이고, 내가 없으면 심지어 하느님도 아니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나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우선인지
스스로 성숙하게 식별하고 선택할 줄 아는 것이 주인의 삶이고,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의 뜻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끝으로 프란치스코의 관련 글을 다시 덧붙입니다.
“모든 형제들은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필요성이 생길 때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다 먹어도 됩니다.
마찬가지로 분명한 필요성이 있을 때는 주님께서 형제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에 따라, ‘필요성 앞에는 법이 없기’ 때문에, 모든 형제들은 필요한 것을 쓸 수 있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이 계명을 완수합니다>
가끔은 많은 것을 아는 척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무안을 주면 다음부터는 좀 겸손해질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고 넘어갑니다.
그야말로 시쳇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그를,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은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항의하자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다.” 하시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시고 안식일의 주체이십니다.
그러니까 바르게 알고 말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밀 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를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이고,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면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서 후후 불어 껍질을 털어냈다면 키질을 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행위도 금지 사항입니다.
닭이 안식일에 알을 낳았다면 그 역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철저히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한 법이 오히려 올가미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유다인이 이웃에 살고 있는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자기 집의 가스 불을 꺼 달라고 부탁하더랍니다.
'가스 불! 자기가 끄면 되지. 그런 부탁을 하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식일이 되기 전 불을 켰는데 끄기도 전에 안식일이 온 것입니다.
불을 지피는 일을 금지하고 있으니, 안식일이 다 가기까지 켜 놓을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부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겉모양에 묶여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법조문을 지키기에 앞서 법의 의미와 내용을 살리기를 바라십니다.
“형식적인 계명 준수는 무의미합니다.
사랑이 계명을 완수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푼 다음 의식상의 규정을 준수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알맹이보다는 껍데기에 충실해서 야단맞았다면, 오늘 우리는 알맹이를 빌미 삼아 규정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여 꾸중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기보다는 내 취미와 즐기는 일을 더 우선하고 기도와 미사는 뒤로 미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의 날은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거룩함이 넘쳐나게 되고 이웃도 우리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뽐내거나 으스대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가장 중요한 사람은 뒷전이고 일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본인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지요?
이 평가가 성숙하고 균형 잡힌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참으로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비하하는 것을 넘어 학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틈만 나면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고 자책하고 업신여깁니다.
이는 겸손의 덕도 아니고 심각한 병리 증세입니다.
반대로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입만 열만 자화자찬입니다.
틈만 나면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끝도 없이 늘어놓으니 주변 사람들이 정말이지 피곤합니다.
더 심각한 증세가 있으니 과대망상 증세입니다.
존재 자체로 우리 사회를 힘들게 하는 사이비 교주들, 정신 나간 정치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닌 특기가 있는데, 상대방을 얕보기, 꼬투리 잡기, 하대하고 무시하기, 잘난체하기 등입니다.
오늘 안식일 규정을 들이대며 예수님을 공격하는 바리사이들이 가장 대표적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정말이지 별것 아닌 규칙, 지나가는 개도 웃을 안식일 규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눈에 불을 켜고 누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가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이 눈에 띄면 가차 없이 비판하고 칼날을 들이댔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 바리사이라는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되다’ 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죄인들로부터 분리되고 차별화된 정통 신앙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원래 바리사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유일무이한 계시라고 강조하는 사제들에 반대하던 평신도 개혁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예언서들과 시편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삶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과 제사를 드리려 했습니다.
이토록 좋은 의도와는 달리 그들의 신앙생활은 점점 복잡해지고 부담스럽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고 빈틈없는 신앙생활을 추구하던 그들이었기에 613개나 되는 율법 조항에 대한 준수뿐만 아니라 구전을 통해 내려오던 실천사항까지 세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응답으로 시작되었던 그들의 신앙 행위는 점점 반드시 해치워야만 하는 의무사항이자 무거운 짐, 족쇄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신앙은 정신보다 제사 행위 자체에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내면보다는 겉치레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달리 강조한 것 규정 가운데 정말 웃기는 규정들이 있었는데, 정결 예식이요,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외출했다가 귀가했을 때 물이 떨어져서 손이나 발을 못 씻을 수도 있고 씻을 수도 있는데, 씻지 않으면 완전 중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안식일만 되면 누가 규정을 어기나 눈에 불을 켜고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안식일에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어도 요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밀 이삭 몇 가닥 뜯어먹는 것조차 용납을 못하고 태클을 걸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누군가 죽어가도 안식일에는 치료행위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종교의 힘을 통한 영적 학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종의 종교 중독으로 인한 이상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꽤 뚫고 계시던 예수님, 부자연스럽고, 비인간적인 삶의 방식,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동 양식을 죽어도 참아내지 못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고 있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법 같지도 않은 법, 안식일 규정을 사정없이 짓뭉개십니다.
보란 듯이 안식일 규정을 산산조각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우리 역시 제도나 규정의 틀에 사로잡혀 이웃을 단죄하거나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뒷전이고 일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계명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1)
탈출기와 신명기에 있는 십계명을 보면,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탈출 20,10; 신명 5,14).
그리고 안식일을 어긴 죄는 ‘사형을 받아야 하는 죄’였습니다.
"엿새 동안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렛날은 거룩하게 지내야 하는 안식일, 주님을 위한 안식의 날이니,
이날 일하는 자는 누구나 사형을 받아야 한다."
(탈출 35,2)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에는 밀 이삭을 조금 뜯어 먹은 것을 ‘일’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 유대인들의 기준으로는, 배가 고파서 그랬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것도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리사이들만의 규정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율법 해석’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오늘날까지도 그렇습니다.
어떻든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바리사이들의 말은 그 당시에는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행동에서 ‘일’만 보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고픔’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답변은, “내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지만,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이니 그들을 단죄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아무 생각 없이 밀 이삭을 뜯어먹었다면, 또는 심심해서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사무엘기 상권 21장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의 일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배가 고파서 율법을 어겼다는 점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바친 제사 빵은 사제들만 먹어야 한다는 것은 레위기에 있는 율법입니다(레위 24,9).
따라서 다윗의 행동은 ‘거룩함’을 모독한 죄, 즉 사형을 받아야 하는 죄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아무도 다윗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처했던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이 한 일을 비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일도 비난하면 안 됩니다.
만일에 다윗은 왕이니까 그냥 넘어가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니까 엄격하게 율법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일 자체가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탈출 23,1-9).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은 “배가 고프면 안식일을 안 지켜도 된다.”가 아니라,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기 전에 먼저 이웃의 사정을 헤아려 주어야 한다.”입니다.
안식일을 안 지키는 것인지, 못 지키는 것인지, 그것을 먼저 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정말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던 것일까?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사정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을 변호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참을 수 없을 정도’ 라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각자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3)
사제들이 안식일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서 하는 일들은 안식일 계명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또 안식일보다 더 위에 계시는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사제들이 안식일에 그 일들을 하는 것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라는 말씀은 “나는 안식일보다 더 위에 있는 존재다.” 라는 뜻이고, 당신이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 말씀 자체를 하느님을 모독하는 발언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마태 12,14).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계명들과 율법들을 잘 실천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실천해야 합니다.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지만 배가 고파서 그랬던 것이니 ‘죄 없는 이들’이고, 그러니 그들을 단죄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진짜 죄인은 바로 너희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는 않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기만 하는 ‘자비 없는 태도’가 곧 죄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안식일 계명을 해석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계명보다 사람을 먼저 보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한 청춘 - “주님과 일치의 여정”>
주님과의 일치가 안식이자 치유의 구원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에 있습니다.
주님과 일치의 여정을 살아가는 열정의 사람들은 주님을 닮아 몸은 노쇠해가도 마음은 늘 영원한 청춘이요 참 아름답습니다.
세월의 흐름에도 풍화작용을 겪지 않는 늘 푸른 영혼입니다.
어제 난(蘭)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고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편시절 100명의 교사들 가운데 사군자(매난국죽梅蘭菊竹)로 네 분이 명명됐는데 저는 난(蘭)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대표적 사군자로 봄의 매화(梅花)로서는 지조의 남명 조식, 여름의 난(蘭)으로서는 절개의 정암 조광조, 가을의 국(菊)으로 기품의 다산 정약용, 겨울의 죽(竹)으로 인고의 포은 정몽주를 꼽은 기사를 봤습니다.
사군자로 상징되는 인물들 역시 진리에 몸바친 영원한 청춘의 아름다운 분들이겠습니다.
바짝 말라 붙었던 불암산 계곡이 요즘 내린 비로 청춘을 회복한 듯 합니다.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집무실에서도 우렁차게 들립니다.
어제는 빗소리를 들으며 강론을 썼고 오늘은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강론을 씁니다.
곳곳에 흐르는 도랑물에 침묵의 땅은 노래하는 살아 있는 땅이 되었습니다.
곳곳에서 들려 오는 매미노래 소리들입니다.
꼭 하늘 비가 내려야 흐르는 맑은 물인가?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 하늘 비 없어도 늘 은총으로 맑게 흐르는 계곡물 같은 영원한 청춘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성전에서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수도형제들의 시편 성무일도 찬미와 감사의 노래 기도 소리가 늘 맑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처럼 들립니다.
영원한 청춘의 삶에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회개가 결정적 요인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많은 비가 내리는 중에도 김포에서 수도원을 방문했던 레지나, 헬레나, 이사벨라 50대 후반의 자매들, 참으로 하루종일 기쁘게 신바람나게 일하고 떠날 때 전혀 피곤하지 않은, ‘영원한 청춘’을 연상케 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은 얼마나 신선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는지요!
감동했습니다.
그 산더미 같던 배즙들을 박스에 말끔히 넣어 포장하니 무려 수백 박스입니다.
저보다 한 살 연상 48년생인 김훈 산문집 <허송세월>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런 <칼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입니다.
여전히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는 유일한 작가일 것입니다.
‘청춘예찬’이란 글에서 마지막 대목이 강렬했습니다.
“찰스 다윈, 정약전, 정약용, 이벽, 이승훈, 황사영, 안중근은 모두 내 마음속의 영원한 청춘이다.”
책 뒷 표지의 말마디도 정다웠습니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87세 고령에도 한결같이 활약을 펼치시는 열정의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나이에 관계없이 영원한 청춘입니다.
우리 요셉 수도원에서 지금도 영원한 현역으로 맡은 소임에 최선을 다해 사는 70대 스테파노, 마르코 수사도 나이에 관계 없이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Ever Old, Ever Neu)’의 영원한 청춘입니다.
주님과의 일치의 여정중에 한결같이 살아가는 이들이 영원한 청춘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일치의 관계가 영원한 청춘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병이 들어 죽다가 간절한 기도로 살아 난 히즈키야가 영원한 청춘입니다.
물론 하느님과 히즈키야 사이에서 다리 역할에 분주한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이사야 역시 영원한 청춘의 예언자입니다.
히즈키야의 기도와 응답과정이 감동적입니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기도 후 슬피 통곡하는 히즈키야에 감동한 하느님의 응답이 이사야를 통해 계시됩니다.
“가서 히즈키야에게 말하여라.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너와 이 도성을 보호해 주겠다.”
이에 대한 표징이 무엇이냐는 히즈키야의 물음에 대해 하느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이사야의 말씀도 감동적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말한 일을 그대로 이룬다는 표징으로서, 주님이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보라, 지는 해를 따라 내려갔던 아하즈의 해시계의 그림자를 내가 열 칸 뒤로 돌리겠다.”
이사야가 얼마나 주님과 깊은 일치의 관계에 있는지, 또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라는 대목에서 역시 주님과 얼마나 깊은 일치의 관계를 살았던 다윗인지 잘 드러납니다.
얼마전 너무나 잘못된 확신으로 얼마 못 살고 병으로 죽을 것 같다는 모녀분에게 강력히 드린 말씀이 생각납니다. “절대 죽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제 허락 없이는 절대 두 분에 죽음을 주지 않습니다.” 격려했을 때 안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영원한 청춘의 예수님 모습이 참으로 눈부시게 드러납니다.
하느님 마음에 정통했던 예수님께는 안식일법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가 분별의 잣대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분별의 잣대로 삼을 때 참으로 단순하고 자유로운 무애인(無碍人)의 삶입니다.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비정한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바리사이들을 압도하는 주님의 폭포수 같은 말씀이 참 통쾌합니다.
다윗의 실례를 들면서 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일치에 있는 영원한 청춘의 예수님인지 잘 드러납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제사 빵을 먹었다는 다윗의 참으로 자유로운 처신에서 그가 얼마나 하느님 마음에 정통해 있는, 하느님과 깊은 일치의 관계에 있는 영원한 청춘의 사람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다윗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권위를 지니고 하시는 주님의 선언이 오늘 복음의 절정이요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밀이삭을 뜯어 먹은 예수님 제자들이 죄인이 아니라, 이들을 율법의 잣대로 정죄한 바리사이들이 진짜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전례의 거부가 아니라 본말전도의 사실을 바로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자비가 우선이요, 자비를 판단의 잣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보다 더 큰 분,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을 판단의 잣대로 삼으면 틀림없습니다.
하느님과 깊은 일치의 관계를 살았던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일치의 관계를 날로 깊이 하면서 우리 모두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 영원한 청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인 것은 더 많은 자비를 베풀고, 더 많이 사랑하라는 뜻>
‘심금(心琴)’을 울리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그 소리가 크지 않아도, 비록 그 소리가 장엄하지 않아도, 비록 그 소리가 화려하지 않아도,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며칠 전 산보 중에 목회자의 자기 고백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목은 ‘성도의 수준이 목회자의 수준을 정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감독이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도 관객이 외면하면 감독은 그런 작품 대신에 관객이 좋아할 만한 작품을 만들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최고경영자와 같은 목회자를 초대하는 대신에 말씀의 선포자를 초대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최고경영자는 성공신학과 긍정의 신학으로 교회를 부흥시킬 수는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굳어있는 양심을 깨우는 말씀을 선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선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공동체가 목회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는 하지만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의 계급주의가 드러나는 교계제도를 반대하며 개혁교회를 세웠지만 교회가 직분과 직책으로 계급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합니다.
목회자의 자기성찰과 같은 말씀이 제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판소리를 배우는 수련생이 폭포수 아래에서 연습하는 걸 볼 때가 있습니다.
득음의 경지에 오르면 폭포 소리를 뚫고서 소리를 낼 수 있는 명창이 된다고 합니다.
이는 폭포 소리의 파장과 명창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파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명한 성악 경연대회는 예선을 치를 때는 피아노 반주로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예선을 마치고 본선에 오르면 이제 70명이 넘은 악단의 연주로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본선에 오른 경연자 중에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넘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드물다고 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목소리가 묻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뚫고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연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영예의 대상을 차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1000년을 이어오는 사찰의 예불 소리를 녹음하고, 수천 명이 참석한 예배의 소리를 녹음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스님의 예불 소리가 수천 명의 예배 소리를 압도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파장이 다르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거룩하지 않으면, 교회가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세상이 내는 파장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거룩함을 상실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내는 파장에 교회의 소리가 묻혀버리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중에 심금을 울리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아도, 언변이 화려하지 않아도, 크게 내세울 능력이 보이지 않아도,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신부님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넘치지만 섬기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던 그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렸던 제자들처럼 세상의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첫 번째 본당 신부님으로 자상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이들을 포용해 주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에게는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그랬습니다.
다만 한 가지 본인에게는 무척 엄격하셨습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기도하셨습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것은 가능하면 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재물에 대해서 청렴하셨습니다.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언제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들었습니다.
법과 원칙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합니다.
법과 원칙은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것만 잘 지켜져도 우리 사회는 발전하고, 모든 이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법과 원칙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하십니다.
나에게는 엄격하지만, 상대방에게는 관대한 법 적용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인 것은 더 많은 자비를 베풀고, 더 많이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지금을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노인과 젊은이. 이 중에서 어떤 부류가 더 행복을 느낄까요?
심각한 질환, 극심한 통증, 또 가난 속에서 노인의 삶이 버겁고 그래서 불행하다고 느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노인이 젊은이보다 행복도가 더 높다고 합니다.
분명 부족해 보이는 것이 훨씬 많은데 말입니다.
스탠퍼드 장수 연수센터에서는 노인이 삶에 더 크게 만족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노인들은 당장 즐거울 수 있는 일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반면, 아직 갈 길이 먼 젊은이들은 비록 앞으로 쓸모가 없을지 모르더라도 새로운 경험이나 지식을 쌓기를 선호한다.
또 젊은이들이 현재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 중 나중에 혹시라도 필요한 것이 있을까 봐 초조해하는 반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이미 가진 것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것 몇 가지만 추려냈다.”
결국 행복한 삶은 당장 즐거울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보이는 모습을 계속 간직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 중에 불행을 느끼는 분은 젊은이의 모습을 따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즐거운 일이 없다면서 과거에만 연연하면서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복을 지향한다면 지금을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 또 지금 행동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개구리가 왕자로 변하기를 바라며 키스한다.
하지만 노인들은 손자손녀들에게 키스한다.”
누가 더 행복할까요?
사랑도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을 통해 큰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바리사이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제자들을 가리키며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따지듯 말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어겼다면서 예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안식일 법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에 매여있으면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을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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