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오후의 서정 3
-내 뇌리 속 최초의 봄은 감나무에 매달려 밤 늦도록 불꽃 피우던 호롱불,
그리고 가마니 짜던 사그락 소리. 겨울 속에서 봄은 그렇게 열리고….
김윤자
봄이 증발된 마른 벌판에
겨울꽃만 흐드러지게 피어
가슴 얼리던 시절
살바람 휘덮인 산하에 꽃불 피우려
우리들의 헐벗은 아비가
낮은 자리에 포복하다.
계절은 늑대 같은 겨울뿐
꽃은 죽은 꽃, 가산은 찢긴 황무지
흙탕물 속 낚싯코에 끼니 건지기도 힘든
오연한 세월이 수면 위에 뜰 때
혹독한 빙하 지대에도
전염병은 열꽃 물고 달려들어
생떼 같은 자식 앗아가
긁힌 자리 또 찢겨 빠지는 진창
이승에서 봄을 보지 못하니
저승에서나마 산새와 벗하며 살라고
애장(葬)은 산 곳곳에 그리도 늘어만 갔던가
세한 속에서도 풀꽃은 피어나고
무너지기 시작한 겨울 옹벽 사이로
밤 속에 파고든 대낮
감나무에 잠든 호롱불 깨워 걸고
쭉정이 사이로 알곡 건지며
춤추는 불꽃 따라 탕감되는 어둠
성마른 겨울, 사그락 사그락
가마니 짜는 소리로 세워진 봄멍울 솟대
해맑은 꽃그늘 속에 목을 내민 봄빛
그것이 내가 본 최초의 봄이다.
시절은 지금 찬연한 봄
정녕 세상은 가경의 꽃마당인데
해거름 짙은 너럭바위에
적멸의 초연함으로 서성이는
우리들 아비의 점멸된 여령(餘齡)에 봄은 없다.
봄날 오후, 바늘구멍으로 통과된 햇살 한줄기뿐
봄 속의 겨울, 벙그러진 하얀 목련은
이녁의 가슴에 마지막 묻고 가고픈
한겨울 얼음꽃으로 무섭게 달려 온다.
봄날, 오후의 서정 3-시집<별 하나 꽃불 피우다>,엽서문학 2004년 150호 특집,보령수필 2008년 창간호,참여문학 2008년 봄 제33호,한국낭송문학 2019년 창간호 반년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