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ncent van Gogh
19세기에 들어서면,
평생 50여 점의 자화상을 그린 고흐가 유명하다.
이것은 가난하여 모델을 고용할 수가 없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기 그림의 수법을 연구함과 동시에,
화면에 자기 자신의 내심(內心)을 표현함으로써
반성하고 고독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자화상 1887
고흐가 파리에 온 이후 처음 접한 전시회는,
바로 쇠라의 〈그랑드자트〉가 전시된
1886년의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였다.
고흐는 파리에서 거의 30점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작가 얼굴과
저고리의 부서진 듯한 색채,
특히 배경의 '점들'은 쇠라에 대한
그의 동경을 반영하고 있다.
자화상 스케치 1886
자화상 1889
빈센트 같지 않은 자화상이다.
아주 깔끔하고, 금방 세수하고 나온 듯한...
한편으로는 슬픈 듯하고..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애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듯 하다.
'고갱에게 바친 자화상'
(Self-Portrait Dedicated to Paul Gauguin)
1888年
고흐는 많은 자화상을 남기고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당시 그의 내면 생활을 읽을
수 있게 솔직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자화상은 고흐 자신이 말했듯이 색채가 없는
회색 주조(主調)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간혹 자기 작품을 친구들에게
선사하기도 하고 교환하기도 했다.
때로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작품을 나누어 주기도 했었다.
이 작품은 고갱과 교환 한 <자화상>이며
<밤의 카페>와 같은 주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밤의 카페>가 빨강과 초록의
대조에 의한 강렬한 구성인데 비하면,
이 <자화상>은 상당히 억제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무렵의 내면 생활에 있어
격한 동요를 나타내고 있고,
아를르 시대 초기의 안정을 깨뜨리고 평형을 잃은 흔적이 짧은 머리칼과 예리한 시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린톤의 배경과 간결한 터치의 조화가 차갑고 엄숙하게
느껴진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1887
1885년 파리에서, 고흐는 그의 그림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건 바로 인상파화가들이었다.화상으로 성공한 동생 테오를 통해 그는
마네, 로트렉, 피사로, 고갱, 드가 등 인상파 화가들을 만난 것이다. 고흐는
인상파의 그림에서 충격을 받는다. 그들의 그림에서는 빛과 공기가 만져졌다.
무엇보다도 인상파화가들은 고전회화기법을 깨고 주관적인 시선으로
사물을 그린 최초 화가들이었다.
인상파와의 만남을 계기로 고흐의 그림은
획기적으로 바뀐다.
어두웠던 그의 그림은
점점 밝아지고, 강렬한 색조를 띠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고흐식의 고집해온 그림 스타일이
자리를 잡아간다.
오랜 반복과 시행착오 끝에 고흐는
그만의 색깔을 찾은 것이다.
점점 빛나기 시작한 그의 그림,
그리고 막 폭발할거 같은 그의 광기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아를에서 그 절정을 만난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1887
회색 중절모를 쓴 자화상 1887
자화상
자화상 1890
고흐가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의 그림으로서
그의 유서와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그가 남긴 몇몇 자화상 중에서 가장 결연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려고 한 비장한 결심이
엿보인다.
거의 단색으로 느껴질 정도의 청록 필선으로
그려진데다 붉은 수염과
밤색 머리카락에 둘러싸인 볼이 움푹 팬 고흐의 얼굴이
집요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마와 코에 냉정한 빛을 던지고,
그늘진 부분에 청색이나 녹색을 칠하고
청색과 갈색의 선을 넣고 있다.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는 눈과 꼭 다문 입술에
고흐의 정신이 역력히 나타나있다.
이만큼 실감있게 시시각각으로 영혼이 살아 있는
모습을 느끼게 하는 초상화는 없을 것이다.
찬색인 녹색 의복은 아직도 튼튼한 골격을 한
동체를 감싸고 있으며,
옷을 그리는 동적인 필선이 무언가 억제할 수 없는
불안한 육체의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고흐는 이 냉철한 정신 또는 영혼이 충만한 속에
홀로 외로이 앉아서
귀를 기울여 무엇인가 마음으로 느끼려 하고 있다.
자화상 1887
자화상 1887
자화상 1889
이젤 앞의 자화상 1888
반 고흐는 수많은 자화상을 남기고 있는데 이 작품은
그가 가장 정신적으로 안정되어
있을 때 제작된 것이다.
청, 황, 녹, 적을 기조로 짧은 필치를 병열시킨
이 작품은
화가의 예리한 시신에 의해서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며
인간의 무한한 탄력성을 의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색을 가지고 세계를 불태우는' 철저한 색채주의자인
그의 화풍과 자기를 억제시키려는
내면적 욕구의 충돌이 화면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다른 화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예리한 통찰력은 강하면서도 충실한 화면을 창조한
원동력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로 대립되는 요소를 조화시키는 것.
이것이 고흐의 예술이다.
자화상
고갱에게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 (다소 우둔해보이는)를 받고선 그가 그 그림에 반항하여 그린 그의 자화상. 유난히 그의 눈동자가 선명하고 예리하며 강렬하다. 결국 이 그림은 그의 왼쪽 귀가 있는
마지막 초상화가 되었다.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1888 // 고갱
고갱은 이 그림을 그린 후 자신과 고흐의 우정을 기념하는 작품이라 했다.
과연 그럴까?
꽃잎은 다 떨어져가고 해바라기는 커다란 눈처럼 보인다.
반 고흐는 반쯤 감겨 멍한 표정이며 해바라기가 눈을 더
크게 뜨고 있다.
들고 있는 붓은 마치 바늘을 들고 있는 것 같고..
뒤의 벽 풍경화의 소실점이 반 고흐 위에 있어서 그림이 사람을 억누르는 형상이다.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자화상 1889년
고흐가 자른 귀에 붕대를 하고 있는 자화상은 두점이 있다. (위, 아래)
고흐 <귀에 붕대를 맨 자화상> 1889, 코톨트미술원, 런던 이 작품은 고갱과 격렬히 다툰 후 자해한 사건이 있은지
2주 후에 그려진 작품으로서
고흐는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색채가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고흐는 고통스런 감정을 모두 눈에 집중시키고 있다.
이 자화상은 붉은색과 청색의 대비가 아름답다.
채워지지 않는 이상에서 오는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그림처럼 보인다.
그의 광기가 붉은색으로 나타났을 때
그의 눈빛은 살아있다.
아래의 억압된 표정에 반해 위 자화상은
고흐 자신의 억압하던
무엇인가를 벗어던진 자유인처럼 보인다.
귀를 자른 자화상(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9年
고갱과의 일로 인해 귀를 자르고, "화가이기 때문에 겪은 발작이었기를 바란다.
하루하루 내 머리는 평온을 회복하고 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썼다.
위의 자화상과는 다르게 이 자화상은 배경이 밝고
안정적이다.
하지만 안정적인 데 비해 고흐의 표정은 소외되고
억압되고 자신감 없는
'무언가를 하면 안된다'고 강요받는
환자의 표정같아 보인다.
뒤에 기모노를 입고 있는 여인들의 배경 또한 이색적이다.
고흐는 자신의 자른 귓볼을 술집 웨이트리스에게 주었다고 한다.
평생 여자를 혐오하면서도, 창녀와 살고
웨이트리스에게 응석을 부리던
그에게서 소외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고흐 자화상 우표 Self-portraits of Van Gogh
Vincent van Gogh(1853.3.30~1890.7.29)
영혼의 화가, 태양의 화가, 천재 화가 등으로 불리운다.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Zundert에서
빈민촌 목사의 아들로 출생.
1890년 7월 파리 근처 Auvers-sur-Oise에서
사망한 후기 인상파 시대의 화가이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그가 태어나기 꼭 1년전에
태어난 형이 있었다. 부모님은 얼마되지 않아 사망한 그 형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었다.
장남을 잃은 어머니는 그 슬픔을 차남(지금의 고흐)이
태어난 후에도 지우지 못하고 매일같이 죽은 큰 아들의 무덤을
찾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애정이 부족함을 느낀 고흐의 맘 한구석에는
항상 슬픔과 울적함이 있었던 것이다.
고흐는 다양한 직업을 거쳐 뒤늦게 그림을 시작한 후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그림이 전부인 인생을 살았다.
‘해바라기’ ‘감자 먹는 사람’
‘삼나무와 별이 있는 길’ 등 800여점의 작품이 있다.
고흐는 렘브란트처럼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이며,
일반적으로
램브란트 이후로 가장 뛰어난 네덜란드 화가로 손꼽힌다. 인물화를 그리고 싶은데 모델을 구할 돈이 없어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고 한다.
살아있는 동안 그림을 단 한 점 밖에 팔지 못한
아주 가난한 화가였으니...
그는 근대 예술에서 인상주의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모두
오직 10년동안 만들어진 것이다.
색의 개념을 파괴하고, 거친 화풍과 결국은
그를 자살에 이르게 한 정신적 고통이
표현된 그런 작품이 전부이다.
고흐는 색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햇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자연의 색을
그리기 위해 어두운 방을 벗어나
들판으로 달려 나가곤 했다.
그의 걸작중에 많은 자화상과 잘 알려진
The Starry Night(1889)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말에 소련이 독일로부터 철수할 때 그들은 많은 독일의 예술 작품을
함께 가지고 갔다.
이 명작들은 레닌그라드의 Hermitage의
지하에 숨겨졌다.
이것은 거의 반세기 동안 소련 비밀이었다.
그들은 현재 국립박물관에 전시해 놓고 있다.
구두 한 켤레 1886년
이 구두는 고흐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짝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글픔을 버티는 모습"을, 한짝은 "고난극복 후에 맛보는 기쁨"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꽃병에 꽂힌 열네송이 해바라기 1888년
고흐는 신부 같은 맘으로 고갱을 기다리며
그가 거처할 방에
걸기 위해서 '해바라기' 연작을 그리게 된다.
노란색에 대해서 .. 고흐는 술꾼이었다.
당시 유행던 압생트를 매일매일 마셨고
이 술의 부작용으로 황시증이 생기게 되었다. 시립병원의 레이 의사가 고흐에게 음주를 나무라자 고흐는 이런 말을 했다.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라오 ... 올 여름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나로서는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오."
찬란한 노란 색을 얻기 위해 여름내내 취해있었다는 것..
고갱은 10월 23일 , 아를에 도착하게 되고.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를 보고 감탄을 하게 된다.
붉은 포도밭 1888 년
이 그림은 고흐의 수많은 작품중 유일하게 팔린 그림. (400프랑)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 1888년
이 그림과 관련된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편지
"... 짙푸른 하늘 여기저기에는
코발트 원색의 푸른색보다 더더욱 푸른 구름과
더욱 밝은 은하의 창백함을 닮은 푸른 구름이 떠 있었다.
그 창공 기숙이 별이 여기저기에서 빛났다.
녹색, 황색, 백색, 장미색, ....
파리에서는 본적이 없을 정도로 보석과 같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바다는 실로 깊은 군청색이었다."
별이 빛나는 밤 1889년
고흐는 휘트먼의 시를 좋아했다.
그 중의 한 구절을 보면..
"초승달 어린이가 제 뱃속에
자기 보름달 어미를 데리고 간다"
그림의 달을 잘 보면..
달 부분(초승달)과 전체(보름달)이 동시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자세히 보면(큰 그림으로) 어지럽다는 사람이 있을정도로 소용돌이를 하고 있는데
이는 고흐의 눈에 실제로 그런식으로 보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당시 고흐는 오랫동안 현기증, 발작을 일으켜 왔다고 한다.
철로 옆을 지나가는 마차 1890년
이 그림을 그린 한 달 후
놀랍게도 그의 시신은 길을 지나
묘지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나보다.
구름낀 하늘아래 오베르의 밀밭 1890년
이 그림 역시 그가 묻힌 공동묘지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라 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일까.
까마귀떼 나는 밀밭 1890년
Vincent - Don Mcl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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