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기행 17 사방은 고요한데 강 가운데 달만 밝게 비치구나.

[구대열]

이집트 기행 17 사방은 고요한데 강 가운데 달만 밝게 비치구나.

크루즈 선으로 나일강을 내려오며

12일 메데아(Medea)라는 배에 짐을 풀 때 가이드 하젬이 김동건 판사와 저를 손짓으로 부르더니 ‘최고의 선물’이라면서 방 열쇠를 주네요. 이쁜 이집트 여자를 방에다 데려두었단 말인가? 옆에 마누라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 뭔지 모르겠지만 방 번호를 찾아 들어가 보았습니다. 선두(船頭), 배의 앞쪽에 있는 방이었습니다. 최고의 선물로서는 부족하고, ‘전망이 좋은 방’ 정도였지요. 그런데 짐을 챙기고 나올 때 청소하느라 문이 열린 다른 방들을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훨씬 커더군요. 하젬은 우리가 깍쟁이 미국인들에 비해 팁을 많이 줄 것 같이 보았던 겁니다. 한국인들이 이집트 가이드까지 타락시켰나? 세계 어디에서나 팁 올리는 건 주로 한국인들의 짓이죠. 이 방을 기지로 삼아 3일 동안 카이로로 올라가면서 주변의 유적지들을 구경할 예정이라 그의 호의가 반가웠습니다. 여행을 끝내고 헤어질 때 우리도 충분한 답례를 하였지요. 김판사는 하젬에게 귀찮을 정도로 이것저것 물어봐서 미안했다고 하더군요.

뱃머리에 있는 방인데 선두 쪽에 달린 문을 열면 의자가 두 개 놓인 베란다 같은 공간과 찻잔을 놓을 수 있는 조그만 식탁이 있군요. 그 옆에는 갑판으로 바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복도를 따라 배 중간까지 쭉 나가 중앙계단을 이용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밤에 갑판에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었는데 10시가 넘으니 계단을 막아 버리네요. 그러나 의자에 앉아 나일강을 따라 흘러가는 기분은 좋았습니다. 하늘을 보니 달을 하현을 지나 그믐에 가까운 듯 일그러졌네요. 일찍 잠자리에 든 탓인지 아침 6시 코란 독경 소리에 잠이 깨였습니다. 밖으로 나가보니 나일강은 파도하나 없이 잔잔합니다. (사진 1, 아침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주변 풍경을 한 컷 올립니다.)

서울에 가서 할 일들을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여러 생각이 나군요. 첫째, 악어입니다. 여행기 15편에서 악어 박물관과 미라로 만든 악어를 보았습니다. 엄청 크더군요. 10m는 아니더라도 7-8m는 되는 것 같았습니다. 민물악어라면 대표적인 것이 ‘나일 악어’죠. 영어로 crocodile입니다. 아메리카 악어는 alligator와 cayman/caiman이라 하죠. 나일 악어와는 달리 주둥이가 길게 나와 있는 놈인데 약간 귀여워 보입니다. 둘 다 무게나 성질이 고약한 것이 비슷한 것 같더군요. 앨리게이터와 케이만의 차이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일 악어는 마라강에서 야생 누가 대이동을 할 때 강에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잡아먹는 영상에 등장하는 놈들입니다. 이름이 나일 악어라 나일강을 유유히 헤엄치면서 다닐 걸 기대했는데 한 마리도 보지 못했네요. 인간들이 다 없애버린 건가요?

멀미약도 생각 나군요. 배가 요동치지 않고 미끄러지듯 흘러가니 멀미약을 괜히 가져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차나 배 멀미에 노이로제가 있습니다. 어릴 때 살던 경남 고성은 아스팔트길이 없었습니다. 군청 앞 큰 길도 자갈이 깔린 ‘신작로’였지요. 초등학교 때 한 애가 선생님에게 아스팔트길이 뭔지 물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난감해 하셨지요. 아스팔트를 보지 못한 애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지금 생각해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한참 후 선생님은 ‘비가 올 때 신을 신지 않고 걸어도 발이 더러워지지 않는 길’이라고 하시더군요. 평생 들은 최고의 명답이었습니다. 고성은 황토벌이고 특히 고성초등학교 교정은 비만 오면 질퍽거리는 황토밭으로 변해 대부분 고무신을 신은 애들이 고생했기 때문입니다.

아스팔트길은 고성에서 통영이나 마산으로 들어가는 초입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퉁퉁거리는 차가 어느 순간 매끄럽게 굴러가면 이제 통영이나 마산 댓거리에 왔구나 하는 이정표(road mark)같았지요. 이 탓인지 몰라도 저는 어릴 때부터 차를 타면 멀미를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저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버스를 처음 타보았습니다. 고성-상리 문수암 30리 길이라 괜찮았지요. 그런데 120리 48km인 마산에 갈 때는 멀미가 나더군요. 지금은 중간에 터널이 뚫려 30분이면 갈 수 있지만 그 때는 2시간이 걸렸습니다. 특히 포장되지 않고 꾸불꾸불한 배둔이나 진동고개를 넘을 때는 고역이었지요. 창문을 열어두면 앞에 가는 차가 일으키는 먼지를 뒤집어쓰게 되어 더욱 죽을 맛이었지요. 중학교 때 다른 애들은 주말이면 고향에 다녀오곤 했지만 저는 방학이 되어서야 온갖 비상조치를 하고난 뒤 갈 수 있었습니다. 전날 밤 소화제를 먹고 아침엔 위장을 비운다고 굶고 차를 타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지요.

성인이 되어서 멀미는 없어졌지만 차나 비행기를 탈 때 책을 보지 못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어김없이 속이 매스꺼워 오기 시작했으니까요. 이탈리아 여행 중 포도원을 찾아 좁은 비포장도로를 오르자 속이 거북해 오는 게.... 멀미란 놈은 평생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합니다. 미국이나 유럽행 비행기에서 소설책 몇 권 읽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습니다. 눈을 감고 시 같은 걸 중얼거리며 외우기 시작한 것도 다 이노무 멀미 탓이었습니다. 딸애를 낳고 병원에서 집으로 데려오는 차 안에서 ‘넌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차를 타니 앞으로 차멀미는 않겠구나’하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배는 더 심했지요. 한국일보 시절 부산에서 여수 앞 바다인 남해 6광구 석유탐사를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4천 톤짜리 네덜란드 탐사선이었습니다. 보통 여객선은 큰 게 200톤 정도이니 제법 큰 놈이었지요. 당시 새로 도입된 컬러면에 기명기사로 쓴 것이라 찾아보니 있군요. 1970년 8월 18일자 ‘남해 석유탐사 본격작업’이란 제목으로 조종실을 구경하는 저의 사진도 보입니다. 한국일보 자매지인지 일본 <太陽新聞>에 나온 것도 보관되어 있는데...., 이건 뭔지 모르겠네요. 근 50년 전에 쓴 저의 글 중간쯤에 ‘이날 밤 선내를 대낮같이 훤하게 밝혀놓고...’라는 게 보입니다. 적벽대전 전날 밤 조조가 수군 진영에 ‘불을 대낮같이 밝혀두고’ ‘대주당가’를 부른 장면을 떠올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술 두고 노래하세 인생이 그 얼만고/비유하면 아침이슬 예 온지가 꿈 같아라/분하고 경개하여 시름을 못잊겠네/이 시름 어찌 푸노, 다만지 술이로다./ <삼국연의>의 명장면이죠.

다음 날 본격적으로 탐사에 들어가려 할 때 태풍경보가 왔습니다. 전날 배에서 내려놓은 탐사장비를 모두 거둬들이고 부산으로 돌아간다고 하군요. 물살이 조금 높아지는 조짐이 보이자 4천 톤급인 큰 배도 물위에 뜬 나뭇잎같이 출렁거리더군요. 서양 선원들은 갑판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배의 흔들거림을 즐기는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때부터 변기를 안고 배속 깊숙이 있는 똥물까지 뽑아내며 고통을 참아야했습니다. 사진부 기자가 고참이라고 침대 아래 칸을 차지하는 바람에 저는 위 칸에 있어 멀미가 더 심했죠.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며 괴로워하는 걸 보았으면 이 고참은 ‘침대 바꾸자’고 할만도 한데 끝까지 아래 칸에서 버티더군요. 오늘 유심히 보니 기사 끝에 ‘사진 김xx기자’라고 나오네요. 취재 사진이 한 장 있는데 날씨가 맑은 걸 보니 아마도 멀미가 시작되기 전 이 양반이 찍은 것이네요. 전문가가 찍은 것이라 좋습니다.(사진 2, 뒷면에 한국일보 사진부 1970.8.12.라는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더 한심한 건 1993년 초 카리브 해 크루즈 때였습니다. 낮에는 정박한 섬에서 수영이나 스노클링을 하고 열대 우림을 산책하면서 놀고 저녁에는 다음 섬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습니다. 4만 톤급이라 편안히 즐겼지요. 그런데 마지막 밤 남미 동쪽 북단 바베이도스와 트리니다드 토바고 인근 기착지를 출발지인 푸에르토리코의 산후안까지 전속력으로 올라가는 데 멀미가 시작되더군요. 옆에서 집사람은 잘 자는데 저만 화장실 변기통을 보듬고 보냈지요.

이번 여행에 크루즈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고 멀미약을 준비했습니다. 아가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의 추리소설 <나일강의 죽음>에는 ‘카르나크라는 작은 증기선’은 파도가 치면 배 위에서 걷기가 어렵고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배 멀미하는 여행객들이 있다고 하군요. 큰 배는 아스완 댐의 바위를 빠져 나갈 수 없으며 배가 협곡을 빠져나갈 때 양옆의 거대한 바위가 마치 화가 난 듯 보였고 강은 깊고 힘차게 흘렀다고 합니다. 물살이 빠르고 거대하여 가파른 바위를 헤쳐 나가야 하는 나일강 여행을 이렇게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책이 처음 발간된 것이 1937년이라 1930년대 여행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니 오늘날 아스완 댐 건설로 파도는 사라져 편안한 여행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요. 우리 배 Medea는 말 그대로 미끄러지듯 흘러 배에서 잠을 잔다는 걸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점심시간 후에는 갑판에 누어 주변 경개를 구경하면서 뒹굴고 저녁에 다시 침실 밖으로 나왔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여전히 닫쳐있고요. 그러나 선두에서 보는 풍경도 좋았습니다. 강 주변에 가로등은 없지만 여전히 현대문명의 탓인지 밤하늘에 기대했던 만큼 많은 별들이 보이지는 않군요. 이쪽 동네 별자리를 조금만 알았어도 좋았으련만. (사진 3)

멀미하던 옛 기억에 쓴 웃음을 지으며 시 몇 가닥을 읊조려 봅니다.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배는 이백의 ‘아미산월가(蛾眉山月歌)’를 생각나게 하군요. 미인의 눈썹같이 생겼다는 사천성의 명산인 아미산에 뜬 달은 반달이니 나일강에서 본 하현과 비슷하겠군요. 달이 강으로 들어와 강물과 함께 흘러가는데 그리운 당신은 보지 못하고 배는 삼협을 향해 동쪽 유주로 흘러간다는 장면도 우리 크루즈를 닮았네요.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도 있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7월 기망이니 보름 다음날인 16일 저녁이고... 적벽강에서 달은 동산에 떠올라 북두칠성 주변을 배회하니 아마도 밤 9-10시쯤 술판이 벌어졌겠군요.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면서 구현이가지(扣舷而歌之)라,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하고 노와 상앗대로 속이 비치도록 맑은 강물을 치니 회포는 아득하고... 이렇게 부어라 마시어라 하면서 안주가 다 떨어지자 취한 몸뚱이를 서로 베고 자다 동방이 밝아오는 걸 알지 못했답니다. 배가 기울어져 물에 빠져 죽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그런데 실제 적벽대전이 일어난 적벽강은 아니었지요. 소동파는 뒤늦게 깨달았다는 겁니다.

홀로 앉아 강물을 내려 보니 조용한 음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백거이(白居易)의 ‘비파행(琵琶行)’같은 처연한 기분을 쬐끔 느껴보고 싶었던 겁니다. 오늘날 강서성(江西省) 구강(九江) 심양(潯陽)으로 귀양살이나 다름없는 말직으로 좌천되어 온 백낙천은 친구를 전송하려 강가 부두에 나갔으나 술이 없이 마음이 심란한데 어느 배에서 비파 소리가 들리기에 찾아봅니다. 경성에서 이름을 날리던 퇴기(退妓)가 비파를 뜯고 있었는데 백낙천이 청하여 다시 술판을 벌이고 서로 옛날을 생각하면 회상에 잠기는 이야기이죠.

퇴기는 비파를 뜯으며 경성에서 한 때 잘 나가던 과거를 떠올립니다. 사방의 배들은 조용하고 강 가운데 가을 달만 비치는데 신세를 한탄하죠. 나이 들어 술꾼 손님들은 떨어지고 상인과 결혼하여 심양으로 왔으나 남편은 장사에만 관심을 가질 뿐 부부간의 정은 돌보지 않고 차를 사러 간 뒤 홀로 강가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오가는 빈 배들만 보니 강물에 비친 달빛만 싸늘하고 꿈자리도 서러워 화장한 얼굴에 눈물이 흐르더라 라는 구절입니다.

曲終收撥 當心畵(곡종수발 당심화) : 연주를 끝내고 채를 뽑아 비파 중심을 획 그으니

四絃一聲 如裂帛(사현일성 여열백) : 네 줄이 함께 우는소리 비단 찢는 것 같고,

東船西舫 悄無言(동선서방 초무언) : 동쪽배도 서쪽배도 소리 없이 고요한데

唯見江心 秋月白(유견강심 추월백) : 강 가운데 가을달만 밝게 비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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去來江口 守空船(거래강구 수공선) : (남편을 기다리며) 강어귀를 오가며 빈 배만 지키니

遶船明月 江水寒(요선명월 강수한) : 배를 비춘 밝은 달빛에 강물은 싸늘하고,

夜深忽夢 少年事(야심홀몽 소년사) : 깊은 밤에 홀연히 젊은 시절 꿈을 꾸니

夢啼妝淚 紅欄干(몽제장루 홍난간) : 꿈속에서도 서러워 화장한 얼굴에 눈물이 흐르네.

88행으로 된 장시(長詩)인데 여인의 비파 연주가 끝나자 백 시인도 자신이 심양에 귀양 온 사연을 이야기하죠. 백낙천이 한 곡을 더 뜯어달라고 청하면서 이 여인을 위해 ‘비파행’을 지어주겠노라고 약속을 합니다. 곡이 끝나자 모두들 처연한데 가장 슬피 울어 푸른 옷소매를 적신 사람은 사마벼슬로 떨어져 이곳에 온 자신이었다는 독백입니다. 가이드 하젬이 좋은 방을 준 덕분에 저도 방밖으로 나와 회상에 젖어 보았습니다.(2018.5.30.)

사진 1, 나일강 선상에서 본 일출

사진 2, 사진 뒷면에 한국일보 사진부 1970.8.12. 이라는 도장이 콱 찍혀 있습니다.

사진 3, 나일강변 저녁풍경. 무지개가 보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