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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나눔마당 스크랩 실학사상가의 불교관에 대한 비판 小考-1
無念김영일 추천 0 조회 68 10.08.05 23: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실학사상가의 佛敎觀(인식)에 대한 비판 小考

  - 한 수행자의 소회-2005.1.28 김영일




Ⅰ. 서언


나는 病苦에 쓰러졌다. 2004년 봄이었다. 5월 파릇파릇한 날에. 2003년말부터 시나브로 기력이 떨어지더니 병원에 입원하고 두달이상 병가로 쉬어야했다. 고에 눌려 쓰러진 것이다. 나에게 누적된 고는 무었일까? 고의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정정하신 어머님의 急逝去였다. 2003년 그해 5.5일 밤.(사망 확인은 5.6일 아침) 급작스레 별세하신 어머님 유고소식 이후 장례를 치르고 나서 시나브로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황당한 유고소식 살아계신 어머님이 갑작스레 만나뵌지 이틀만에 돌아가신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가슴에 저려왔다. 그날 전주에서 5.4일 뵙고 구경도 하고 난 뒤 5.4저녁에 상경하고 5.6일 아침에 별세소식을 들은 것이다. 어린이날이라고 올라온 것을 후회했다. 같이 모시고 부안에 갔어야 했는데 후회가 되었다.

無常 또 무상이었다. 무상을 뼈속 깊이 느꼈다.


두 번째로 사무실 업무과중 및 스트레스 중압이었다. 2003년 10월 명퇴로 5000명이 퇴직했다. 나도 고민했다가 유보했다. 너무나 고민을 많이 했다. 굴레를 벗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질 못했다. 민원은 나를 쓰러뜨렸다. 전화민원의 폭주. 이전 과거의 어처구니없는 일로 인해 뒤집어 씌우는 '민원 내가 받아야하나'하는 분노가 일었다. 화가 치밀어 감당을 못했나보다.


세 번째로 전민동20주년준비다. 알게 모르게 나에게 부담이 된 것은 사실이다. 매일 매일 체크해서 경과를 논의하였다. 사무실일에 힘겨워 하다가 전민동의 일에 짬을 내서 한다는 것이 너무 나 자신을 쉴 수 없게 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遑遑欲何之?’였다. 바쁘게 어디를 왔다 갔다 하는고?

정작 20주년 기념일 5.12일에 겨우 사회를 보아야했다. 그래도 무사히 20주년행사를 마쳤다.


네 번째로 든다면 2004.1.14일 별세하신 운곡 김석원선생님이다. 가끔 곁에서 선생님을 뵙고 빈궁한 여건에도 민족애와 애국심으로 일관하신분인데 말년에 너무도 초라하게 가셨다. 성균관 유도회 원상회복투쟁으로 청춘을 진력하고 아무 보상 없이 가신 것이다. 나는 눈물겨워 다음 과같이 추모사를 지었다. 역사의 왜곡과 인간의 변절과 인간의 굴레가 참담하게 느껴졌다.



운곡김석원선생님별세하다


“정수여요. 작은아버지 돌아가셨어요. 오늘 오후에요”

선생님 장형님 아들인 조카 김정수한테서 전화가 왔다.


2004년 1.14일 오늘 음력으로는 계미년 12월 23일이다. 음력으로는 올해 어머님이 5월5일(음력 4.5일) 갑자기 돌아가시고 선생님도 돌아가셨다.  너무도 어이없는 인생사. 어머님도 장수체질이고 선생님도 건강하셨는데 가셨다. 향년 80세. 운곡 선생님은 그 혹독한 고행을 겪으시고 처절한 빈곤에서 지내셨는데 어이없이 가셨다. 지난 1월3일 생전에 아끼고 고운정 미운정 다들었던 백범 김구선생을 저격한 안두희를 해치우려 했던 의사 곽태영선생과 미아1동 선생님 거처 반지하방을 방문했을 때 만신창이로 누워, 발가벗겨진채 기저귀차고 누워계신, 자의로 할 수 없는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 연명하는 불우한 운곡 김석원선생을 보고 온 뒤에 열하루만에 돌아가셨다. ‘그렇게 살바에야...’ 의식없이 자율적인 활동 없이 누워 방기된다면야 살아서 무엇하랴는 슬프고 서러운 생각이 들었었다.


선생님이 생전에 나에게 건네주신 주섬주섬보따리에서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선생님이 어렵게 종로3가 옥상옥 사무실에서 거의 노숙하다시피 지내다가 사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들어 뒤 “뭐가 맞아야지............”하면서 자료뭉치를 몰래 들고와서 어느 다방에서 ‘주섬주섬’ 갖다주셨다. 누구에게 쫓끼듯이 미아리 어느 다방에 갖고 와서 주셨다. 무슨 보물을 임시로 맡기는 것처럼...선생님은 이렇게 살고 싶었으리라.


“雲谷이 湖水되니

  書院 더욱 우뚝하다

 산새는 노래하고

  노루떼 춤을 춘다

 내 여기 조상얼 심어

  永遠토록 살리라“



나는 선생님의 유업을 이을 자신이 없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라는 보수 민족우익단체를 이제 내가 살릴 재간이 없었다. 항일 무장투쟁사와는 다른 차원의 미흡하고 지리멸렬한 독립운동사의 한부분 임시정부사에 대하여 아쉬운 점이 많이 있었다. 그 이전에 남한 친일파 주류에 밀려 짓밟힌 지사들의 고행사인 ‘유도회 성균관 수난사’를 풀어낼 방도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유도회 성균관을 삼성재벌에 팔아먹은 변절자 심산 김창숙의 배반의 변절사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성균관대학교가 삼성재벌의 손아귀에 들어간지가 오래인데, 대법원 판결마저도 집행하지 않은 남한사회의 유치함에 환멸감이 날정도인데, 선생님이 걸어온 역사의 능선을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선생님은 좌, 우를 갈라놓은 분단의 희생양이다. 선생님은 남이나 북이나 차별없이 사랑하고 서로 자유롭게 잘 살기를 바라고 도왔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이해를 따지지 않고 질주했다. 바른 길이면 달려갔다.


동심을 갖고 먼먼 별을 보며 먼먼 희망을 앞당기기 위해 몸을 던졌다. 선생님은 보수적인 분은 아니었다. 그가 존경하여 사무치게 받들었던 백범 김구선생의 길은 그의 지표가 되었지만 해방전후 선생님 연배에 두루 좌, 우익인사들과 교유했다. 북으로 간 고창 출신 백남운선생, 천도교 최덕신교령, 장건상선생등 좌익인사와 그는 잘 알고 지냈다.


1960년 4월 11일 사월혁명 발발 8일전에 덕수궁에서 조윤제,김수산, 장건상, 김창숙, 조문태등과 함께 ‘國賊 李承晩 銅像歌’를 지어 읊었다. 종교계 여러 인사와도 교분이 깊었다. 기독교 강원룡목사, 불교 청담스님, 경산스님등과 ‘한국종교협의회’를 결성 운영하였다.


사월혁명후 공을 논할 때에도 그는 당연한 일을 어찌 상을 받을 수 있느냐며 마다했다.


그는 불의앞에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오늘의 최후는 바로 그가 정과 사. 정의와 불의의 단호한 경계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가 쓰러진 뒤에도 그가 아주 숨을 거둔 오늘에도 그를 찾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복이 없었다. 아니 복을 바래지도 않았다. 아니 많은 이들의 복을 짓기 위해 헌신했다.


선생님은 천진한 동심을 지니고 살았다. 그의 꿈은 늘 현실에서 갈무리할 대상이었다. 아무리 고달픈 현실의 따돌림에서 동지를 만나면 파안대소로 화답했다. 그의 분노와 설움을 어찌 다 헤아릴 것인가? 가엾은 운곡 선생님, 이제 현실적인 완전한 실패자로서 숨을 거두었다.


1999년 12월 29일 그 어려운 형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80주년 기념식을 치렀다. 내가 일부 보탰지만 선생님은 노숙자의 형편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선생님이 상처를 받았다. 나는 그때 행사를 위한 행사를 경계하자고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자주 만나 선생님의 사정을 많이 들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술을 들지 않있는데 나의 권유로 조금 드시게 되었다, 내가 막걸리를 좋아하니 애써 나의 기분을 맞추어 주셨다.


선생님은 운곡의 오래된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지키려 했다. 500년 이상 지낸 느티나무, 세계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며 고대사의 유적이 오롯이 남아있는 고창 운곡서원 주위를 너무나 사랑했다. 그래서 그곳에 우리의 이상향을 일구자고 뜻있는 동지들과 꿈을 일궈보자고 말씀하셨다.


“역사의 짐을 나워집시다“

나는 1999년 선생님의 고통과 투쟁이 소외되어 있어 너무나 안타까워 친구들, 동지들에게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도 미력했다.


2000년도에는 대통령 김대중에게 탄원서도 보냈다. 그러나 답이 없었다. 그를 알아주는 이 없었다.

민주화운동 보상신청도 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민주화인사로 보지 않았다. 69년 이후 민주화투쟁이란 무엇인지? 69년 이전의 성균관유도회 원상회복투쟁이 결국 친일파의 횡포와 부패와 싸움일진대 운곡 김석원의 민주와 통일의 염원없이 될 수 있었을까?


2000년 여름에 전남 화순 김재철목수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무릉도원이 바로 여기라고 과거에 농사를 지으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고 하셨다. 너무나 편안한 하룻밤을 보내신 것이다.


이즈음 선생님은 나에게 당신이 맡은 비문글을 부탁하기도 하고 또 자세히 말씀은 안하셨지만 부탁받은 붓글씨를 나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무래도 나이들어 필력이 잡히지 않기도 했을 것이다. 임시정부요인중에서 석오 이동영선생을 선생님은 좋아하셨다. 그분은 국량이 크고 관대하여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단합을 이끌었다. 그분이 즐겨쓴 글귀가 선생님의 일생의 헌신과도 비슷했다.


鞠躬盡瘁 死而後已

‘국궁진췌 사이후이’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 바쳐 죽을때까지 그치지 않았던 제갈량과 같다. 중국혁명의 지도자 마오쩌뚱(毛澤東)도 즐겨 쓴 경구였다고 한다. 제갈량의 출사표에 나오는 구절이다. 민주주의와 통일, 평화, 행복등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 실현을 위해, 그 성취를 위해 투쟁하는 삶은 살아있을 때부터 죽기까지 쉼없이 이어진다는 말이다. 바로 운곡 김석원선생님의 일생 파란만장한 인생에 걸맞는 구절이다. 선생님은 그때 내가 쓴 이 글씨를 좋다면서 아무개에게 준다고 하셨다.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

‘선천하지우이우 후천하지락이락’


김석원선생님은 나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나중에 즐거워했던’ 범중엄(范仲淹)처럼 사셨다.


운곡 김석원선생님은 환하게 웃고 계신다. 1999년 여름 썩어가는 옥상옥 사무실 앞 바닥에서 앉아계신 모습을 담았다. 내 카메라로 찍은 사진 속에서 선생님은 미소를 머금고 계신다. 나와 만나면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셨다. 나만 만나면 기분이 좋아라 하셨다.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나에게 선생님은 나를 기대하면서 희망을 이어가리라 생각하시면서 도장도 주시고 자료도 주셨다.


선생님은 너무도 고된 삶을 사셨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다. 오히려 더러운 치사한 이승에서, 참담한 이승에서, 당신을 안아줄 이 없는 이승에서 이제 저승으로 가셨다. 그를 돌본 그를 알아준 분들 곁으로 가게 되었다.


삼가 운곡 김석원선생님의 명복을 빌면서 극락왕생을 간절히 빕니다.

(2004.1.14  김영일)



다섯 번째로 든다면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안타까움이 누적된 것같다. 여기 저기 발걸음으로 다니지만 상근운동가도 아니고 직장인으로 평범하지도 않고 불안하고 과거 노동조합간부란 인식. 아상,인상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것이 상시적인 가치박탈과 압력, 피해감. 결국 나 자신이 안정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나의 분에 넘치는 많은  일들......


병원에서 더 이상 나를 회복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나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친구를 통하여 스님을 소개받고 침과 기치료를 받았다.


과거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의 간단한 이력을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동남쪽으로 들판 너머 고부 두승산이 보이고 서쪽으로 변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동쪽으로 동학농민들의 의기가 서린 白山, 그너머 전주 모악산 보이는 부안읍 여뀌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서당을 다니며 천자문과 사자소학, 推句를 배운뒤 한문과 서예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때때로 붓을 잡게된 인연이기도 합니다. 생명과 나눔, 넉넉함, 땀흘려 땅을 일궈 손수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숭고한 일은 농사꾼부모님한테 배웠습니다.  중학3학년 시절 호남지역에서 빼어난 인물로 고통받는 인물로 알려진 김대중선생납치사건(1973.8)을 라디오방송을 듣고 분노했으며, 고등학교시절(1974) 장준하선생 의문사 소식, 김지하시인의 시‘타는 목마름으로’(1975)를 절절히 읽고 박정희군사정권의 폭압에 가슴아파하고 있었습니다. 고3때 좌절되는 학창시절의 절망속에서 ‘시’하나 교지에 싣고 나왔습니다. 대학에서 시모임 ‘원추리’에서 시를 쓰고 선후배간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시와 예술에 대한 관심, 역사와 철학에 대한 관심은 이어오고 있습니다. 생활의 방편으로 준비한 고시공부에 산사를 전전하였으나 능력부족과 여건의 부족으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1980년 5월은 전두환신군부에 의해 광주의 처참한 살육의 소식을 들으며 몸서리치면서 전주 팔달로에서 ‘노깡’을 밀었습니다. 1980년8월 바로 아래 스무살때 남동생의 의문의 죽음으로 우리가족은 다 슬픔에 젖어 살았습니다. 슬픔은 강물이 되어 생사를 넘나드는 방황이 이어졌습니다. 자유롭게 가볍게 살 수 없는 질곡은 어쩔 수 없이 군대로 끌려가 1981년 육군보병으로 산천을 누벼야 했습니다. 개인사와 세상의 질곡에 대한 고민으로 1985년 강원도 태백으로 흘러가서 황재형화백을 만나 ‘광부’생활을 했습니다. 지하 700~1500미터 막장에서 피와 눈물의 노동을 5개월동안 이기다가 갱매몰사고로 죽기 직전 구출로 살아나온 뒤 덤으로 사는 듯이 살았습니다. 생활을 저버릴 수 없어 한국통신에 부끄러워 소주 반병마시고 시험치르고 입사해서 지금까지 18년째 다니고 있습니다. 어용의 굴레에서 1994년 민주노조의 깃발로 용솟음칠 때 힘을 돋아주고 지부장으로 3년간 활동했습니다. 이전에 1987년 3월에 결혼하고 지금 여고2,중1 두애를 기릅니다. 1987. 6월항쟁의 노도같은 물결에 동참하고, 1990년~1993년도는 우리문화 판소리 민요, 민족의술, 민족 무술, 우리옷 등에 매료되어 한껏 미쳐 배우고 익히고 나누었습니다. 특히 1991년에 제도언론(특히 조선,동아,중앙)의 왜곡과 편파와 무소불위의 조폭적인 행태에 열받아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일념에 민언협 언론학교(교장:정동익)2기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신문모니터분과 제1기 분과장으로서 선거보도감시,편파왜곡보도 항의시위 등 언론민주화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상처받은 때에는 농사를 짓고 싶어 ‘귀농운동본부의 귀농학교 과정 1기도 마쳤습니다. 성공회대 부설 노동대학 4기를 마치고 노동자,농민의 정치세력화를 희망하면서 서민들이 더불어 잘사는 대동세상을 꿈꿉니다. 1984년 운곡 김석원선생을 만난 뒤 친일파 청산작업의 시급함을 느꼈습니다. 민족의 이익에 기초한 남북화해 협력,교류를 통하여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어 외세에 당당히 민족이 융성하기를 희망합니다. 2003년 ’반핵부안청년연대‘를 동지들과 결성하여 부안지역주민의 삶을 파괴하는 ’핵폐기장건설‘을 반대하며 대안에너지개발을 촉구하고있습니다. 민주발전을 희망하면서 1990년대초에 인연을 맺은 전민동에서 현재 총무국장겸 사무총장일을 맡고 있습니다.



나는 부안 보안면 감불 굴바위에 있는 천태사 법당에서 참회 기도도 하고 예불도 드렸다. 문득 나는 나의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과거생과 나와 인연있는 먼저간 영가들-남동생, 어머니, 그리고 친척 조상들...에 대해서도 무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증조부 이하 영가친척들 모두를 위해 천태사 대성스님 주재로 영가천도재를 올렸다.


내가 미워하고 화를 받았던 일. 내가 해온 운동 등 활동을 조용히 돌아보았다.

어설프게 살아온 나를 보았다. 고의 원인은 결국 내가 지어온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바른 길을 걸어오지 않았음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虛名에 이끌려, 相에 끌려 왔다. 나의 무능을 보상받고자 뭔가를 해야 했고 무리한 걸음을 했다. 무리한 소리를 질렀고 무리한 손,발짓을 했다. 이게 모두 나 자신의 업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1980년 23세때 8월 세 살 아래인 20살 남동생을 잃고 무상을 사무치게 느꼈었다. 출가하려고 했으나 부모님이 걸렸다.

이후 나는 불자로서 나름대로 불교철학을 공부하고 부처님처럼 살려고 노력은 했다.


1985년 고시공부로 세상일을 하려고 했으나 능력이 부족하여 이루지 못하고 절망감, 죄절감, 무상감으로 출가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부모님 인연이 무거워 떨치지 못했다.

그 대안으로


광부가 되었다. 강원도 태백 강원탄광 막장에서 후산부로 일했다. 참회의 심정으로 출가자의 수행으로 여기며 일하고 기도하고 인욕했다. 6개월 일하고 사고로 구출되어 나왔다.


그뒤로 일상의 삶을 살아왔다.


나의 길은 수행자임을 알았다.

이후 나는 못다한 수행을 하고 싶었다. 이후 나는 선사의 가르침대로 수행하고 싶다.

불자라고 하면서 절도 안하고 예불도 안드리고 지내고 술 고기 등 막행막식을 해오지 않았던가!

나는 참회했다. 지금도 참회하고 있다.


나는 자유를 그리워했다.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 저항이 한으로 저며들기도 했다.


나는 혁명을 꿈꾸었다. 나 자신의 혁명 사회의 혁명을.


기세춘선생의 성리학강의가 계속되고 있었다. 2000년 봄 이후 동양사상 전반을 통해석하고 있다. 나는 늦게라도 참석하고 뒷풀이에서 술도 못마시게 된 것이다. 아니 이제 술은 마시고 싶지 않다.


공부하던중 

실학사상가들의 부정적이고 천박한 불교관에 아쉬움이 들어 작은 범위나마 정리하고 싶었다.


무상한 도리를 깨닫고 다시 나를 본다. 이웃을 보고 사회를 본다.

지난달 엄동설한에 나는 광륜사에서 철야토요참선에 참여해왔다. 10월30일부터 수행자로 더 다가가려고 결심했다. 나의 사상은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을 철저히 여법하게 진리구현에 힘쓰고 싶었다.


이 글은 최근의 나의 삶과 사유의 한자락을 내비치는 것이다.




Ⅱ. 실학자의 부정적 불교인식


1. 磻溪 柳馨遠


가. 반계의 생애와 사상

-1622-1673. 52세



잡학파, 박학파

경학,성리,문예,군사, 음양, 음악, 전법,천문,지리,복서,산술,외국어,

도교와 불교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함


부안 우반동에 반계초당을 지어 저술하고 말년을 보냄


성호와 다산은 반계를 다음과 같이 칭송하고 있다.


國朝以來 識無惟李栗谷 柳磻溪二公在 栗谷太半可行 磻溪則究到源本 一齊산신 爲王政之始 志固大矣 (星湖새說類選/ 권3하/ 治道門/ 變法)


拳拳經世志 獨見磻溪翁 深居慕伊管 名聞達王宮 大綱在均田 萬目森相通 精思補罅漏 爐錘累苦工 曄曄王佐在 老死山林中 遺書雖滿世 未有澤民功 (茶山文集/ 古詩)


時有治亂

道無古今

...(반계잡고/288. 류재원 반계선생언행록-기세춘 교재 41)


- 평등공동체인 대동사회 지향


나. 불교관

 반계는 불교에 그리 반감을 갖지 않고 있다.



2. 星湖 李瀷의 불교관


  가. 성호의 생애 

     - 생몰연대 : 1681-1763  83세

     - 퇴계를 공경하고 부친 이하진이 연경에서 구해온 수많은 장서를 보고 공부한 경,사,경제,군사,문학,천문,역학등 연구한 학자다.

     - 특히 반계 유형원과는 외6촌간이다

     - 민본주의를 주장하여 민생을 중시했다

       . 穀出於賤 以貴者資焉 : 곡식은 천민에게 나오고 귀족의 자양이된다


  나. 불교관


  그의 불교적인 상세한 자료를 접하진 못했으나 ‘성호새설 권3하-六竇’에 나오는 여섯가지 좀에 다섯 번째 ‘승니’ 즉 스님. 승려가 들어있다.


* 육두(六竇 : 여섯가지 좀)

  1) 노비 2) 과업(과거제도) 3) 벌열(양반, 벼슬) 4) 기교 (광대,무당,박수) 5)僧尼  6)遊惰(놀고먹는이)


僧尼非因崇佛 只思逃役 深󰜅�武勇之境 日費沃壤之粒也(성호새설 권3하-六竇)


다섯째 중들은 부처를 숭상함이 아니고

다만 군역을 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깊은 굴속에 숨어 날마다 기름진 땅에서 나는 소출을 소비한다.



농사를 짓지 않고 심산에서 수도하는 승려들을 ‘역’의 대상 생산수단으로만 본 것 같은데 이는 무지단견이라 할 수 있다. 불법을 수호하고 부처를 숭배하지 않고 단지 군역을 피해 도망갈 생각으로 숨었다면 이는 문제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고 본다.


  당시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군역을 기피하는 둔피처로서 악용한 사례가 적지않았겠지만 성리학일변도의 조선후기에 청정수행과 도력으로 중생을 교화 이민한 선지식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성호와 전후 비슷한 연도의 대선지식의 생애를 살펴본다.


* 喚惺 志安禪師 : 1644-1729. 66세



선사의 법명은 지안(志安), 법자는 삼낙(三諾), 법호는 환성(喚惺)이며, 속성은 정씨(鄭氏)이다.


강원도 춘천에서 현종 5년(1644)에 출생하였다. 15세에 미지산 용문사에 주석하고 계신 상봉 정원 선사를 찾아가 축발하였다.

17세에 월담 선사에게 건당하여 참행하였다. 이후 청평사(淸平寺) 백암선원(白岩禪院)에서 두타행 9년째 되던 해 여름 불볕더위에 가부좌하고 수행 중 정오(正午)에 학(鶴)이 날아갈 때 깃털이 하나 빠져 공중에 나부끼는 모습을 보고 확연대오(廓然大悟)하였다.




학우심(鶴羽心 : 학의 깃털에서 깨달은 마음)



靑鸞 尾落雲中(청난삼미락운중)

五月炎天做雪風(오월염천주설풍) 

一揮何啻 欺煩署(일휘하시기번서)

拂盡山僧名利功(불진산승명리공) 


푸른 난새의 긴 꼬리가 구름 속에서 떨어져,

오월의 불꽃 하늘에 눈바람을 지어낸다.

한번 휘두르면 어찌 번뇌와 집착을 속일 뿐이겠는가,

산승의 이름과 공을 모두 떨어 버리네.


유심(幽心 : 깊고 깊은 마음)


盡日忘機坐(진일망기좌) 

春來不識春(춘래불식춘) 

鳥女兼僧入定(조협승입정) 

窓外喚山人(창외한산인) 


매일 세상을 잊고서 앉아 있노라,

봄이 와도 봄이 온 줄을 알지 못하네.

산승이 선정(禪定)에 드는 것도 새는 싫어한다.

창밖에서 산승을 자꾸 부르네.


심선각(深禪覺 : 깊고도 깊어 상상할 수 없는 마음)


底事無心臥水西(저사무심와수서) 

只綠忘世愛幽樓(지록망세애유루) 

茶爐爲客開深 (다로위객개심조)

藥圃諱人隔小溪(약포휘인격소계) 

晴散雨聲松老小(청산우성송노소) 

磨秋色岳高底(영마추색악고저) 

林禽亦有來警睡(림금역유래경수) 

猶恐山僧夢紫泥(유공산승몽자니) 


무슨 일로 무심히 수서에 누워 있는가,

다만 세상을 잊고 깊숙한 토굴을 사랑하기 때문이네.

차 솥은 객을 위해 깊은 아궁이를 열었는데,

약초밭은 사람들을 꺼려 조그만 시내를 격해 있노라.

비개인데 뿌리는 비 소리는 소나무 늙고 또 젊었는데,

찬 서리 다가오는 가을빛은 산 높고 또 낮다.

숲 속의 새가 또 와서 잠을 깨게 하는구나,

산승이 자니(紫泥 : 세속)의 꿈을 꿀까 두렵다.



이와 같은 선사의 선활(禪喝)에 수많은 법려(法侶)들이 문정(門庭)에 가득하였다.

선사의 그 선해지원(禪海智源)은 천하에 두루 펴보지 못하고 무고(誣告)에 의하여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홀연히 영조 5년(1729)에 입적하였다. 세수 66세 법랍 51세였다.



* 碧虛禪師 1657-1734. 78세



선사의 법명은 원조(圓照), 법자는 한영(寒影), 법호는 벽허(碧虛), 속성은 한씨(韓氏)다. 평양에서 아버지 응백(應白)과 어머니 최씨(崔氏) 사이에서 탄생하였다. 선사의 어머니께서 금까마귀 한 쌍이 날다가 한 마리가 떨어져 품속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효종 9년(1958) 10월 10일 선사를 낳았다.

선사는 10세에 평양 태청산 석수암에 주석하고 계신 각형 장로에게 축발하였다.

선사는 삼장(三藏)의 법을 구하며 이교(二敎)도 익혔다. 선사의 수학이 깊고 깊어 가르칠 수 없는 수준이 되자 은로(恩老)께서 󰡒�월나라 작은 닭은 큰 흰 새의 알을 부화시킬 수 없다. 너에게 던져 줄 능력도 없지만 너는 구름도 헤쳐 나갈 운이 있으니 하루빨리 의남(宜南)의 큰 장로(匠老)에게 가르침을 받아라󰡓�고 하였다.

선사는 은로(恩老)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출가하여 지금까지 공부하던 석수암을 떠나 의남 월저 선사(月渚禪師)를 찾아 법을 구했다. 월저 문하에서 수참 몇 해만에 월저 선사께서 또 이르시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용의 새끼를 기를 수 없으니 너의 비늘이 돋아날 수 있는 곳이 있으니 그 곳으로 가라󰡓�고 하였다. 그곳은 바로 남명 설암 선사(南溟雪巖禪師)가 주석하고 계신 묘향산 내원운사이다. 설암 선사 회상에서 수참 4년째 정월 초하루 날이었다. 스승 설암 선사께서는 떡국을 드시다가 선사에게 󰡒�법성원융(法性圓融)이란 무슨 뜻인고󰡓�라고 물었다. 이에 선사는 󰡒�적일(赤日: 붉은 햇빛)입니다󰡓� 하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였다.


적일(赤日 : 붉은 햇빛)


斜日穿朱閣(사일천주각) 

斷雲 玉峯(단운기옥봉)

鈴搖千古塔(영요천고탑) 

發百年松(회발백년송) 

지는 햇빛은 붉은 누각에 비치고,

끊어진 구름은 옥봉(玉峯)을 의지했네.

천고(千古)의 탑에서 방울소리 흔들리고,

백년 뒤 소나무에 바람소리 웅웅거리네.


선사의 깨달음은 바로 붉은 햇빛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주는 햇빛이 있어야 영위하는 것이다. 그 햇빛도 생명이 있는 붉은 햇빛이다. 이것이 선사의 깨침이자 가르침이었다.

스승 설암께서 선사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호남 징광사(澄光寺)로 자리를 옮겼다. 이에 선사께서 선불장(選佛場)을 여시게 되었다. 선사께서 참활(參喝)하신다는 현응지영(縣鷹之鈴 : 사냥을 하는 매의 꼬리부분에 달린 방울, 매가 움직일 때마다 방울이 울려 그 매의 소재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선사께서 은거하여 살아도 소재를 알아 찾아온다는 뜻)이 전국 곳곳으로 울렸다. 이에 사방에서 찾아오는 중생들과 수좌 대중들이 바닷물이 밀려오듯 구름이 몰려오듯 찾아와서 󰡒�원하옵니다. 선열(禪悅)을 베푸시어 우리의 주린 배를 채워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깨달음을 일깨워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이에 선사께서 크게 가르침을 허락하시여 천엽잡화(千葉雜花)의 도량을 여니 보광명전(普光明殿)처럼 방불하였다. 선사의 덕은 사생(四生 :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도와 이것저것 따질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자비는 삼라만상을 덮었다.

또한 선사의 가르침에는 사생(四生)과 만유(萬有)가 하나 되어 삼여(三餘 : 겨울은 년(年)의 나머지, 밤은 날(日)의 나머지, 흐리고 비가 오는 것은 시(時)의 나머지이다. 학문은 남는 시간에 하여도 충분하다는 옛 위략독서(魏略讀書)편의 마땅히 세 가지 남음으로써 해야 한다(當以三餘)는 뜻󰡓�가 없었다.

선사는 영조11년(1753) 묘향산 동산사(東山寺)에서 세수 78세, 법랍 67세로 입적하였다.



* 霜月禪師 1687-1766



상월 선사는 조선조 숙종 13년(1687)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새봉(璽篈 ), 법자는 혼원(混元), 법호는 상월(霜月) 속성은 손(孫) 씨다. 11세 되던 해에 조계산 선암사로 들어가 극준 장로에게 삭발 염의하여 출가하였다. 15세에 세진당문신(洗塵堂文信)에게 구족계를 받았고, 18세에 월저도안 선사의 적자(嫡子)인 설암 선사에게 수참 용맹정진하였다. 선사께서 주로 용맹정진하며 수참했던 곳은 향로당(香爐堂)이였으며, 26세 되던 해 가을 달빛 아래서 학(鶴)이 노니는 모습을 보고서 확철대오하였다.


금세구(金世龜) 


身遊一片仙巖寺(신유일편선암사) 

夢想千秋月鶴亭(몽상천추월학정) 

霜後幾看新竹綠(상후기간신죽록) 

雪中惟對古松靑(설중유대고송청) 

嗟吾老去難成卷(차오노거난성권) 

愛爾年來易閱經(애이년래역열경) 

綠苑尼山雖異路(록원니산수이로) 

天然大道共門庭(천연대도공문정) 



이 내몸 일편단심 선암사에 머물고,

꿈 속같이 끝없는 세월 달 아래에 학처럼 깃들어 있네.


서리가 내린 후 바라보니 댓잎은 더욱 푸르고,

눈이 온 후에 생각하니 소나무 더욱 청청하다.

슬프다 늙어짐이,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부처님만을 바라보고 살았네.

녹야원(鹿野苑)에 임하니,

만유(萬有 : 우주)의 대도를 깨달았네.



축계(竺桂) 


天西竺桂海東馨(천서축계해동형) 

況又秋霜月下庭(항우추상월하정) 

誰信古今根自固(수신고금근자고) 

我知冬夏葉常靑(아지동하엽상청) 

開花爛慢隣僧榻(개화난만린승탑) 

庾影婆娑送客亭(유영파사송객정) 

雨後微凉除熱惱(우후미양제열뇌) 

也宜端坐索禪經(야의단좌삭선경) 



부처님의 밝은 법향 해동에 널리 펴졌고,

가을의 서리 월하(月下)의 뜰에 내렸다.

누구(중생)를 향한 마음 고래로 굳건한데,

나의 마음 춘하추동 푸르다.

만개한 촛불 법상에 빛나고,

그림자처럼 객이 떠난 깨끗한 정자이런가,

미동도 없이 단좌(端坐)하니 선경(禪經)이 확연하네.



선사의 깨침은 자연대도(自然大道)이다. 자연 그대로 물이 흘러가듯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티끌 한점도 없는 깨끗함 그대로다. 선사는 한밤중에 반드시 북두(北斗)에 기도하면서 중생구제에 힘썼다. 또한 명료한 강론 군더더기 없는 선설(禪設), 마음으로서의 실천 지혜로서 입증 강명직해(講明直解)로 가르침의 문(법문)을 삼았다. 선사는 가르침에 있어서 초심자라도 깨달음의 길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했으며, 수행과 법력이 아무리 높다 하여도 계율을 함부로 범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지도하였다. 더욱이 옛 조사님들의 주석과 해설에 얽매이는 것을 특히 걱정하며 반드시 수학하는 이로 하여금 문자에 국집(局執)함이 없이 문자가 가리키는 참뜻을 가려내어 가르침의 본래 의미를 정확히 알도록 세심하게 가르쳤다. 선사의 가르침은 강물이 흐르는 유수선(流水禪)과 같다. 영조 24년(1766) 10월에 선사는󰡒�물은 흘러서 바다로 돌아가고(水流元歸海),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도다(月落不離天)󰡓�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 涵月禪師 1691-1770. 80세


선사의 법명은 해원(海源), 법자는 천경(天鏡), 법호는 함월(涵月)이며, 속성은 국씨(國氏)다. 함경도 함흥에서 살고있던 어머니 조 씨는 어느날 꿈에 큰 물고기가 몸을 감싸는 것을 체험하고 잉태하여 열달이 훨씬 지난 조선 숙종 17년(1691)에 태어났다. 선사는 세 살 때 어머님을 여의고 계모 밑에서 유년을 보내다가 14세에 문주(지금의 함경도) 도창사 석단 장로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그 후 영지 대사에게 구족계를 받았고, 환성 지안 선사에게 수참하였다. 선사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축시에 잠을 자고 인시 초에 일어나 정진하였다. 잠자는 시간은 하루 2~3시간이었으며, 백우선(白牛禪:<법화경> 비유품에 나오는 일화의 주인공 하얀소가 비장다력하고 그 행동이 바람과 같이 빠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선)수행을 하였다. 이러한 수행은 10년만에 종문(宗門)의 묘전(妙詮)을 모두 배워 마쳤다.


선사는 용맹정진 10년만인 가을의 어느날 밤 가부좌하고 입정에 들어있는데 갑자기 불어온 회오리바람에 낙엽이 창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확연대오(廓然大悟)하였다.



각심(覺心) 



範圍天地大(범위천지대) 

絶對有何 (절대유하종)

可笑觀心者(가소관심자) 

量空又繫風(양공우계풍) 



돌아보니 천지는 삼천대천세계,

견줄 수 없는 마음 어떻다 말하리.


이렇게 맑고 밝은 마음,

그 크기와 무게를 어떻게 논하리.



심등화(心燈花) 



歷劫傳傳無盡燈(역겁전전무진등) 

不會桃別鎭長明(불회도별진장명) 

任他雨灑兼風亂(임타우쇄겸풍란) 

漏屋虛窓影自淸(루옥허창영자청) 



영겁(永劫)따라 밝혀온 등불,

꺼지고 켜짐도 없는 아름다운 밝은 빛.


삼라만상 깨끗이 할 청아한 바람 일어난다.


타락된 선실 허공의 창에 비친 나의 맑고 맑은 마음이어라.



자연을 초월하는 선사의 깨침은 청아하다 못해 생멸(生滅)도 없어 보인다. 당시 쇠잔해지는 지리의 등불에 불을 켠 선사는, 삶에 있어서 허망 속에 내재한 진실된 그 무엇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이의 구현에 힘쓰라고 가르쳤다. 선사께서 깨친 혜안은 현종(玄宗 : 현묘(玄妙)한 종지(宗旨), 즉 부처님(佛)의 통각(通覺))이다. 세속적 물욕에서 벗어나 청아한 삶을 살라는 선사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미혹한 중생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선사는 󰡒�가장 행복한 삶은 어떻게 사느냐󰡓�는 질문에 언제나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終日忘機坐(종일망기좌) 

諸天花雨飄(제천화우표) 

生涯何所有(생애하소유) 

壁上掛單瓢(벽상괘단표) 



세상일 잊고 고요히 앉아있노라니, 천지엔 온통 분분한 꽃과 비 뿐이네. 내게 있는 건,

다만 벽에 걸린 표주박 하나뿐.



이것이 선사가 설한 가르침의 정수이다. 선사는 살아있을 때 어금니가 빠지면서 그 자리에서 사리(舍利)가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선사를 천하체일의 각자(覺者)라고 종도(宗徒)들은 입을 모았다. 영조 46년(1770)에 안변 석왕사에서 열반에 드셨다.






* 圓悟禪師 1694-1758



선사의 법명은 원오(圓悟), 법호는 만화(萬化), 속성은 이(李) 씨다. 전남 해남에서 조선 숙종 20년(1694)에 태어났다. 선사는 어려서 수군영(水軍營)의 공생(貢生 : 지금의 해군 병사의 보조)이 되어 관아를 출입하였다. 본래 성품이 과묵하고 침착하여 세속적 명예와 이익에는 뜻이 없었다. 해남 대둔사 환성 지안 선사에게 머리를 깎고 출가한 스님은 호암 체정 강백에게 경론(經論)과 율장(律藏)을 수학하게 되었고, 30세에 경율의 깊은 뜻에 환히 알게 되었다. 이후 선사는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아 강백과 전계사로서 전법활동을 펼친다. 선사의 가르침이 높다는 소문이 전국적으로 풍미하여 학승과 율사들이 가르침을 듣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가르침을 청하는 스님들에게 선사는 󰡒�나 자신의 업(業)도 아직 분명히 알지 못하는 데 어찌 남을 가르칠 수 있겠느냐󰡓�며 사양하였다. 스님들의 이 같은 바람이 계속되자 선사는 모든 인연을 뒤로한 채 홀연히 깊은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전국의 명산대찰을 두루 찾아다니며 자신의 학문과 수행세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상원암에 머물 때는 <화엄경> 39품의 종지(宗旨)를 밝혔는데, 당시 불교계에서는 선사를 가리켜 화엄대보살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특히 선사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철저한 수행과 중생을 자신의 몸 이상으로 아끼는 자비로운 보살행으로 인해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까지 불리며 많은 수행자들의 사표가 됐다.


대강백으로 전계사로서 활발한 강론을 하시던 선사는 마침내 학문으로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음을 알고, 선문(禪門)으로 발길을 돌려 깊은 진리에 마음을 기탁하게 되었다.


선사는 인허 해안 선사를 찾아 입실(入室 : 구참(久參) 수좌가 스승 방에 들어가 참문(參問)을 하고 답을 받아 정진하는 것)하고 참선 수행에 전념하였다.


선사의 정진에 있어 십이두타행(十二頭陀行: 1.인가를 멀리 떠나 산속에 홀로 수행 2. 탁발 공양 3. 걸식 4. 한 자리에서 먹고 거듭 먹지 아니함, 5. 많든 적든 발우 안에 있는 그대로 만족함, 6. 정오 이후는 어떤 것이던 먹지 아니함, 7. 헌옷 한 벌로 입음, 8. 모든 옷은 밖에는 널어두지 아니함, 9. 무덤 곁에 있으면서 무상관(無常觀)을 함, 10. 나무 밑에서 생활을 한다, 11. 로지(露地)나 바위(岩)에 앉는 것, 12. 앉기만 하고 눕지 않는 것)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밤에 호랑이 울음소리를 듣고 확철대오하였다.



오무관(吾無觀 : 아무것도 없는 것)



了知諸行皆如幻(요지제행개여환) 

見法惟心心自閒(현법유심심자한) 

無際性空智月滿(무제성공지월만) 

無靜無作獨團團(무정무작독단단) 



모든 것 허깨비임을 알고,

법을 보니 마음뿐이라 마음이 절로 한가하도다.


가없는 자성 허공에 지혜의 달빛 가득하네,

고요함도 움직임도 없이 홀로 둥글구나.


선사의 선관(禪觀)은 선사의 깨달음의 선오(禪悟)에서 밝혀 놓았다. 선사의 그 깨달음은 바로 계율(戒律)에서 시작되었으며, 궁극의 깨침은 티끌 한점 없는 빙륜(氷輪)이며, 하얀 연꽃과 같다.


선사는 율(律)학(學)선(禪)에 두루 통달한 당대의 대선지식(大善知識)이다. 선사가 가르치는 활구는 연꽃이 향기를 발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을 감화시켰다. 귀머거리가 알아듣고 소경이 눈을 뜨듯 선사의 가르침을 듣는 이들은 새로운 선지의 세계를 체험했다. 무지한 납자들도 삼조연하(三條椽下 : 서까래 세 개의 넓이에 해당하는 승당(僧堂). 세로 6척 가로 3척)에 각안(覺岸 : 깨달음의 언덕)을 보게 되었으니 선사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했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선사는 만일동국선원(挽日東國禪院) 염화실에서 영조 34년(1758) 8월 어느 날 홀연히 좌탈입망하셨다.

(붓다피아 홈 http://www.buddhapia.com/인용) --(계속) 담헌 홍대용의 불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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