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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아리랑(3)
- 여강 최재효
“H선생님, 퇴직하시면 해외로 나가신다면서요? 좋으시겠어요.
두 따님과 영화 배우처럼 잘 생긴 아저씨랑, 외국 나가시면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거네요. 정말로 부러워요.”
“자자, 우리 모두 그동안 40여년 가까이 교단에서 수고하신 H선생의
정년퇴직을
축하는 의미에서 건배합시다.”
교장을 비롯하여 전 교직원이 참석한 H의 송별식이 성대하게 열리고
있었다. 약간 상기된 얼굴의 H는 만감이 교차했다. 꿈 많던 처녀시절
시작한 교직생활이 초로의 여인이 되어 끝나는 길고 긴 인생 여정이
었다. 교사로 재직하면서 한 번의 실연을 겪으면서 남자에 대한 피해
의식 때문에 H는 형욱과 뒤 늦은 결혼을 하였다.
자신이 가르친 제자만도 서울 시내에 수천 명에 이를 것이다. H는
자신이 서울시내 어느 곳을 가더라도 제자들이 있고, 자신을 아는 사람
들이 있다는 것이 가슴 뿌듯해 했다.
한 달 전 남편 명의의 물 좋은 동네에 있던 아파트와 땅을 처분하여
남편에게 보내고, 이틀 전에는 퇴직금을 일시불로 수령하여 남편에게
송금하였다. 잠시 살고 있는 월세 방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한 달 후면
H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행복한 꿈을 생각하면 잠시의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여러 선생님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
니다. 비록 교단을 떠나게 되었지만, 한 평생 바친 땀과 열정이 제 손을
거친 많은 제자들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발전과 인류의 공영에 이바지
할 거라 굳게 믿고 싶습니다.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 정말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H선생, 마지막으로 H선생의 십팔 번지 좀 들어보고 싶은데요?”
“동감입니다. 부탁해요.”
어쩌면 이 세상에서 자신을 위한 마지막 잔치일거라고 생각한 H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다른 선생들과 회식 후 2차를 가면 H는 구세대답게
늘 아리랑을 불렀다.
다른 젊은 선생들이 눈치를 주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 있게 독특한
창법으로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백리도 못가서 발병난다아
즉석에서 여러 선생님들의 박수에 맞춰 아리랑을 부르는 H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갑자기 송별식이 숙연하게 변하자 평소 개그맨
흉내를 잘 내는 박선생이 윤수일의 아파트를 불렀다. 동료 교사들은
제 각기 준비한 선물을 H에게 전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들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제가 사회인이 되더라도 늘 선생님들을 잊지 않겠
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인사말을 하는 H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 발랄하고 똑부러
지던 목소리와
정반대였다. 간신히 송별식장에서 나온 H는 내일 아침일찍 떠날 여행을 준비해야 했다. 40년 넘게 헌신해 온 교단에서 떠나
홀로 그동안 가보지 못한 전국 유명관광지를 여행해 볼 계획이었다.
‘내가 가면 남편과 아이들이 나를 영웅 대접하겠지? 내가 그동안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으로 유학을 보냈으니 이제는 이 엄마를 떠받
들어 주겠지. 남편은 우리가 살 집을 장만해 놓고 내가 오기만 기다릴
거고. 아아, 이제 모든 게 홀가분하고 자유의 몸이로다.’ 집에 돌아 온
H는 제2의 인생을 꿈꾸며 즐거워하였다.
“여보세요?”
“형욱씨, 저에요. 아침 일찍 웬일이세요?”
“응, 수지 이따 점심 때 우리 집에 오지.”
“언제 안 갔나요? 매일 형욱씨네 집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는데요.”
“수지가 혹시 오늘 점심 때 무슨 약속이라도 할까봐서.”
“형욱씨, 무슨 일 있어요?”
“와보면 알아. 12시 정각에 꼭와. 알았지.”
“네에. 알았어요.”
형욱의 집에는 전날부터 형욱의 누이가 와 있었다. 형욱의 누이는
형욱이 수지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서로 외로운처지이니 그냥 친구로 지내겠거니 하고 모른 체 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동생의 집을 찾아오고 있는 수지를
보고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형욱아, 너 어쩌려고 그 여자를 매일 부르는 거니?”
“누님, 부른 게 아니고 수지가 알아서 오는 거에요.”
“한 달 후면 올케가 올 텐데. 그때는 너 그 여자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어떻게 하다니요? 그냥 지금처럼 친구로 지내는 거죠?”
“올케가 집에 있는데도 그 여자를 놀러오게 할 셈이니?”
“뭐 어때요? 이곳에 살면 이곳 풍속에 따라야지요?”
“너 참으로 큰일이구나. 이곳 사람들은 남녀가 유별하지 않아서
그런다 치지만 너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의 풍습에 따라 살아야
하는 사람이야. 생활과 먹고 마시는 것이 이곳 사람들과 같다고
하여 네 정신까지 이곳 사람들과 같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형욱의 누이는 가까이 살고 있는 남동생의 가정에 풍파가 일까
걱정이 되었다. 수지라는 여인이 매일같이 놀러오다 시피 하니 무슨
사단이 나도 벌써 났을 거란 추측을 하게 되었다.
남동생이 최근에는 새로이 집까지 장만하고 친구들을 불러
성대한 파티를 열기도 하였다. 형욱은 파티에서 수지를 연인으로
소개하면서 곧 인생을 함께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누님, 제 인생은 제가 알아서할게요. 누님은 너무 제일에 깊이 관여
하지 마세요.”
“관여하지 말라니. 그럼 올케는 어찌되는 거니?”
“그건 그 여자가 알아서 판단하겠지요.”
그 남자가
“안 된다. 절대 안 돼. 그 여자에게도 서울에 남편이 있다고 들었다.
알면 가만있겠니?”
“누님, 글쎄 너무 깊게 상관하지 말래두요.”
“너, 수지를 내일 불러라. 내가 그 애하고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해봐
야겠다. 내가 그 여자에게 장차 너와 무엇을 어찌할 것인지 직접 물어볼
거야. 이제는 결론을 내야겠어.”
“알았어요. 내일 수지를 오라고 부를게요. 그런데 누이, 수지에게
너무 다그치
거나 상처받을 수 있는 말씀은 삼가해 주세요. 누님도수지를 예뻐하시잖아요?”
“......”
다음날 오전 형욱은 음식을 준비하고 집안 청소를 한 뒤 수지가
오기만 기다렸다. 혹시나 누나가 수지에게 곤란한 질문을 할까봐 수지
에게 물어 볼 사항까지 한정하면서 누나에게 다짐을 받기도 했다.
형욱의 누이는 어려서부터 형욱에게 어머니나 같은 존재였다.
70세의 형욱 누이는 가끔 수지가 놀러왔을 때 수지의 언행을 눈여겨
봐왔었다.
여자답고 매력적인 수지도 형욱의 누이에게 마치 시어머니 대하듯
깍듯하게 대했다. 형욱 누이는 그런 수지가 마음에 들었지만 서울에
있는 올케를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제는 한 달 후면 올케가
올 것이고 수지로 인한 가정의 풍파는 불 보듯 뻔한 것 이었다.
정확히 12시에 수지가 초인종을 눌렀다.
“어서와 수지.”
“어머나, 여사님께서도 와 계셨군요.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
“누님이 자기랑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데.”
보고도 본체만체 하였다.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수지는 괜히 기가
죽었다.
“자, 누이 식탁으로 가세요. 수지도 가지? 오늘은 내가 특별 메뉴로
바닷가재를 마련했거든.”
“그래요?”
수지는 형욱의 누이 눈치를 보았다. 아무 말도 없는 형욱의 누이가
갑자기 무섭게 느껴졌다. 예전의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같이
보였다.
“수지씨 오랜 만이에요.” 긴 침묵을 깨고 형욱의 누이가 입을 열었다.
“내 수지씨에게 몇 가지만 물어볼게요.”
“네에.”
“우리 형욱이를 좋아해요?”
“형욱씨를 사랑하고 있어요.”
형욱의 누이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수지가 유학 온 두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한국에서 건너 온 유부녀라는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있다고 생각
했다. 형욱의 누이는 수지의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아아, 큰일이구나. 두 사람의 애정이 이 정도라면 앞으로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질 수 있겠구나.’
“수지씨는 서울에 남편이 있다고 들었어요. 내 동생을 사랑한다면
장차 어떻게 할 셈이지요?”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이혼하려고 해요.”
“그럼 다음 달에 형욱이 처가 서울서 온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네. 형욱씨한데 들었어요.”
“나는 동생에 가정이 잘못되는 것을 원치 않아요. 올케는 서울서 돈
벌어 아이들 유학 보내고 이제 교단에서 정년퇴직하고 이곳으로
올 텐데. 그땐 어떻게 할 셈이지요?”
“형욱씨가 다 알아서 한다고 했어요.” 형욱의 누이가 형욱을 쳐다
보자 형욱은 시선을 피했다.
하게 이야기해 보거라.”
“너,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는 거니?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속 시원
“누이, 전 그 사람하고 안 살 겁니다. 방금 들으셨잖아요. 전 수지랑
남은 인생을 함께 할 거예요. 그 여자가 오면 정식으로 이혼을 요구할
거구요.”
“올케가 이혼을 못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니?”
얼마나 버티겠어요. 결국은 서울로 돌아가겠지요.”
“올케는 두 아이와 네가 전부인데. 어디로 간단 말이니?”
“그건 그 여자가 알아서 하겠지요.”
“너 참으로 잔인하다. 나 같으면 널 절대 그냥두지 않을 거다.”
“그냥두지 않으면요?”
“소송이나 싸워서라도 그동안 너와 아이들에게 희생한 것을 되찾아
야지 왜 바보
처럼 당하고만 있니?”
“누이는 모르셔서 그래요. 그 동안 당하고 산건 저에요. 그 여자가
정 나와 이혼하지 않겠다면 위자료로 얼마 주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죠.
아이들 눈이 있으니 그냥 놔둘 수는 없고요.”
“형욱아, 너 꼭 가정을 깨가면서 그렇게 해야겠니?”
“가정을 깨는 것이 아니에요. 가정을 새롭게 만드는 거지요. 그리고
애들도 제 엄마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어요. 아이들도 내 계획에
적극 찬성하고 있어요.”
“올케만 불쌍하게 되었구나.”
“그 여잔 스스로 판 무덤에 들어가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그 여자를
아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돈 벌레 같았어요.”형욱의 누이는 형욱의 마음을 되돌려 놓기에는 틀렸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일이 문제였다.
이왕 동생이 마음을 굳힌 이상 누이로서 동생의 편을 들어야 했다.
마음이 떠난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고통이며
무의미한 시간의 낭비이고 곁에서 바라봐야 하는 입장에서도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학 졸업반이 되어 곧 자신들의 세계를 펼쳐 갈 두 조카들이 염려가
되긴 했지만 10년 넘게 엄마와 떨어져 살아서인지 서울에 있는 엄마를
그리워하거나 보고 싶어 하는 거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간이 문제 였다. 동생이 한 달 후 이혼을 하면 수지의
두 아이들이 대학 입학할 때 까지 형욱은 수지와 이상한 관계를 지속해야
하고 언제 두 사람 사이에 불화의 씨앗이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수지를 위하여 이혼한 형욱만 우습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지씨의 두 아이들은 수지씨와 동생과의 관계를 알고 있어요?”
“전혀 모르고 있어요. 알아서도 안 되고요. 그 아이들이 대학교 들어가면
전 곧바로 서울에 있는 남편과 이혼할 계획입니다.”
“사람의 앞 일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요.” 형욱의 누이가 수지의
의중을 떠보았다.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바로 이혼할 생각입니다.”
“만약에 남편이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하거나 제가 이곳에 더 이상
수지의 말은 단호해서 감히 누구도 그의 말에 대하여 추호도 의심을
한다거나 이의를 달 수 없을 것 같았다. 옆에서 수지의 이야기를 듣던
형욱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난 모르겠다. 너희들의 인생이니 너희 두 사람이 잘 알아서 처리
하도록 해라. 그러나 너와 수지씨 네 아이들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게
해서는 안 된다. 알겠니?” 형욱과 수지의 의지가 워낙 강하고 두 사람의
사이가 이미 부부관계 이상의 형국이라 형욱의 누이로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
한 달 후, H는 남편과 두 딸들이 있는 C나라 Q시로 왔다. 공항에는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다. H는 모두 바빠서 못나왔겠지 생각
하고 홀로 집을 찾아갔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무료하게 기다리던
H는 깜빡 잠이 들었다. 밤10시가 넘어서 큰딸이 들어와 H를 깨웠다.
“선영아, 오랜만이구나. 잘 있었니? 엄마 너희들 하고 이곳에서 함께
살려고 왔어.”
“안녕하셨어요?”
“그런데 아빠하고 지영이는 어디 갔니?”
“아빠는 여행 가셨고, 지영이는 학교에서 현장 수업 때문에 며칠 있다
올거에요.”
“그, 그래? 아빠는 어디로 여행을 갔는데?”
“멕시코로요.”
“그래?”
오랜만에 엄마를 만난 큰딸의 태도나 집안 분위기로 봐서 H는
기분이 이상했다. 당연히 남편과 두 딸들이 자신을 열렬하게 환영할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어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H는 이방인처럼 변한 딸아이에게 몇 가지 더 물어 보았으나
딸아이는 귀찮다는 듯 대충 대충 대답하였다.
‘마누라가 온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여행을 갔다고? 참으로 이상한
일일세. 딸년도 이상해졌고. 분명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걸까?’ 자기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 큰딸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을 마치 손님 취급하는데 은근히 성질이 났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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