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선 康景善 (1891 ~ 1930)】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 앞장"
1891년 8월 15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대전면(大田面) 운전리(雲田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강원경(康元景)·강원경(康元卿)이 있다.
1920년 7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해 12월 상하이에서 여운형(呂運亨) 등이 조직한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의 간사로 선임되어 상하이 지역 한인들의 자치활동을 돕는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데 앞장섰다. 1919년 8월 손정도(孫貞道)·서병호·이희경(李喜儆)·안창호(安昌浩) 등이 재건한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에도 동참하여 1921년 11월 상의원(常議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1922년 4월 대한적십자회에서 주최한 조선인 구제를 위한 구제금 모집에도 동참하였다. 1921년 12월 27일 상하이에서 김성근(金聲根)·김정기(金靖基)·황훈(黃勳)·김철남(金鐵男)·이복현(李福賢)·김용원(金庸源)·유진호(柳振昊)·박헌영(朴憲永)·손두환(孫斗煥) 등과 재류 한인의 조직체인 상해한인구락부(上海韓人俱樂部)를 창립할 때, 손두환·김철남·유진호 등과 재무주비위원(財務籌備委員)으로 관여하였다.
1922년에는 사교부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선우섭(鮮于涉)과 함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안둥현(安東縣) 이륭양행(怡隆洋行)을 거점으로 국내 정보를 상하이로 보내고 상하이의 『독립신문(獨立新聞)』을 각지에 배포하는 등 각 방면의 연락과 정보 수집을 담당하였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태극단(太極團) 대표로 참가하였다. 여기에서 개조파(改造派, 임시정부 개편)와 창조파(創造派, 신정부 수립)로 나뉘자, 안창호 등이 주장하는 개조안을 지지하고 57인 개조파 성명서에 서명하였다. 그해 9월 개최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정기총회에서 한국 측 회원으로 참가하여 상하이 지역 한국인과 중국인의 상호 이익을 위한 외교 활동과 독립운동의 지속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해 10월 상해대한교민단(上海大韓僑民團) 의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운영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4년 6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평안도 의원이 되었으며, 1924년 8월 교민단 총무에 임명되어 교민단 업무를 담당하였다. 1925년 3월 곽헌(郭憲)·최석순(崔錫淳)·문일민(文逸民)·고준택(高俊澤)·강창제(姜昌濟)·나창헌(羅昌憲)·김현구(金玄九)·임득산(林得山)·채원개(蔡元凱) 등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회 의회에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결의안」을 상정하여 이승만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1926년 3월 1일 독립기념일을 맞이하여 교민단장 대리총무로서 프랑스 조계 내 침례당(浸禮堂)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하여 식을 이끌었다. 당시 기념식에 인도인 2명, 러시아인 3명, 영국·미국인 3명 등이 참석하여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하였다. 같은 해 7월 안창호·염온동(廉溫東)·엄항섭(嚴恒燮)·송병조(宋秉祚) 등과 재정이 어려운 임시정부의 지원책을 모색하려고 임시정부 경제후원회(經濟後援會)를 창립하였다. 동포를 각성 케 하여 적극적인 원조를 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는데, 그 간장(簡章)의 기초, 동지의 징구(徵求), 창립총회에 관한 사항을 담당할 준비위원을 맡았다.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7월 16일 김규식·송병조·이유필·정인교·최석순·곽헌·황훈(黃塤) 등과 함께 발기하여 삼일당(三一堂)에서 6·10만세운동에 대한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6·10만세운동에 대한 경과보고와 6·10만세운동의 정신 계승 및 발전을 위해 민족적 통일 기관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해 10월 인성학교 교감을 맡아 민족 교육 확대의 일환으로 학교 교사(校舍)를 확장시키는 데 힘썼다. 1927년 4월 11일 좌우 세력이 합작하여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은다는 목표 아래 상하이에서 창립된 한국유일독립당(韓國唯一獨立黨) 상해촉성회(上海促成會)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상해촉성회에서 집행위원 이동녕(李東寧)·홍진(洪震)·조완구(趙琓九)·조상섭(趙尙燮)·김두봉(金枓奉)·이규홍(李圭洪)·김구(金九)·김갑(金甲)·김철(金澈)·최창식(崔昌植)·이민달(李敏達)·최석순·현정건(玄鼎健)·정백(鄭栢)·황훈·진덕삼(陳德三)·조소앙(趙素昻)·김명준(金明濬)·곽헌·정태희(鄭泰熙)·김문희(金文熙)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난징(南京)에서 활동하다가 1930년 9월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