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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한국과 소련, 85년 만에 수교
← 최호중 외무장관(오른쪽)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공동 코뮈니케에 서명하고 있다.
한소 양국이 1990년 9월 30일 낮 12시 유엔본부에서 역사적인 한소 외무장관회담을 갖고 수교에 합의하는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최호중 외무장관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이날 유엔본부내 안보리 의장실에서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회담에서 공동 코뮈니케 서명식을 가졌으며,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발표했다. 이로써 한국과 소련은 지난 1905년 대한제국과 제정 러시아간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85년 만에 다시 수교하게 됐으며, 이는 앞으로 한반도 및 동북아 질서 재편에 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기대됐다.
공동 코뮈니케는 정치적 결단의 성격이 강할 때 택해온 수교합의 방식이라고 양측 당국자들은 설명했다. 두 나라 외무장관은 이날 회담에서 수교문제와 함께,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교환방문 문제도 협의, 상호 편리한 시기에 방문을 실현시킨다는 데 합의했다.
이날의 한소 수교는 그야말로 역사에 한 굵은 획을 그은 신기원적 결사였다. 흔히들 단절 85년 만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것은 쓰러지는 대한제국과 혁명 전야의 제정러시아와의 관계였다. 따라서 대한민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과의 수교는 사상 처음이었고, 그만큼 의의도 컸다. /조선
[1955년] 제임스 딘(James Dean 1931. 2. 8. 출생) 사망
←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된 ‘자이언트(Giant)’에서 ‘제트 링크(Jett Rink)’분으로 열연했을 당시의 모습(1956년).
첫 영화 ‘에덴의 동쪽’(1955)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으나 1년도 채 피지 못하고 갑작스레 팬들의 곁을 떠나야 했던 제임스 딘. 1955년 9월30일, 그가 죽었다. 애차(愛車) 포르셰 스파이더를 몰고 캘리포니아 교외 도로를 과속으로 질주하다 사고를 당한 것이다.
망자(亡者)는 말이 없지만 평소 연기를 천직으로 알고 스피드를 즐겨왔던 그였기에 3번째 영화 ‘자이언트’ 촬영을 모두 끝내고 자동차 핸들을 잡은 상태에서 맞은 죽음은 어쩌면 현실과 화합하지 못했던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는지도 모른다.
존 웨인으로 대표되는 강인한 남성상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엄격한 아버지상에 첫 반기를 든 그의 등장에 허무와 저항과 냉소에 빠진 젊은이들은 환호하고 열광했다. 그가 영화에서 선보인 모습들은-때로는 유약한 모습으로 모성본능을 자극하고 또 때로는 우수어린 눈빛으로 기성사회를 응시하는 아웃사이더 역-사실 그의 실제생활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9세때 겪었던 어머니의 죽음과 숙모집을 전전해야 했던 유년기의 기억이 그를 자꾸 외진 곳으로 몰아간데다 그역시 세상살이에 익숙하지 않았다./조선
[1961년] 경제협력개발기구 출범
1961년 9월 30일 경제발전과 세계무역의 촉진을 위해 설립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출범했다. OECD는 1948년 마셜 플랜에 따라 유럽의 경제회복 노력을 조정하기 위해 설립되었던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를 확장·개편한 기구이다. 1960년 12월 14일 유럽 18개국과 미국·캐나다 등이 OECD 설립 협정을 체결했고, 1961년 9월 30일부터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했다. OECD의 기본 목표 가운데 하나는 회원국들의 경제성장과 고용을 가능한 한 최고 수준으로 달성하고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또한 이 기구는 재정안정 유지를 위해 각국의 국제무역 및 자본이동 자유화를 도모하며, 개발도상국에 대한 경제원조를 조정한다. OECD는 결정된 사항을 집행할 강제력이 없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자문회의의 성격을 가진다. 이 기구가 발행하는 격월간 잡지
[1914년] 한말의 개화사상가 유길준(兪吉濬 1856. 10. 24생) 타계
1914년 9월 30일 한말의 개화사상가인 유길준이 타계했다. 유길준은 1870년경부터 실학에 조예가 깊었던 박규수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다. 신사유람단·견미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일본과 미국을 방문했고, 최초로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1885년 12월에 귀국한 후 7년간 연금되었다가 1892년에야 석방되었다. 이 기간동안 미국에서 유학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유견문>을 집필했다. 그는 <서유견문>을 통해 서양 문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개혁의 구상을 제시했다. 김홍집 내각에서 내부대신으로 있다가 아관파천으로 내각이 무너지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07년에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이에 완강히 반대했으며, 1907년 귀국한 후에는 흥사단 등을 통해 교육 사업을 벌였다. 한일합병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획하다가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1914년 9월 30일 지병인 신장병으로 사망했다./브리태니커
[185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 출생
1859년 9월 30일 태어남 / 1925년 11월 1일 죽음
박은식은 일제강점기에 민족혼을 고취시킨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였다. 한말 일간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서우학회 기관지 <서우> 등의 주필을 지냈다. 박은식은 을사조약 이후 변법적 개화자강사상가로 변화해 대한자강회·서우학회·국문연구회·신민회·서북학회 등 여러 단체를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한일합병 이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동제사·신한혁명단·대동보국단 등을 조직하면서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15년 대원군 집정에서부터 1911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을 도입해 저술한 <한국통사 韓國痛史>를 완성했다. 1920년 12월에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전투까지의 한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 중심으로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했다. 이 두 권의 저서는 '민족이나 국가의 혼은 그 나라의 역사 안에 존재하며, 국혼이 존재하고 국사가 존속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의 '혼사관'(魂史觀)을 담고 있다. 1925년 3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25년 11월 1일 67세를 일기로 상하이에서 사망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906년] 영국의 소설가·문학비평가 스튜어트(Stewart, John Innes Mackintosh) 출생
← 스튜어트, 〈It's a Wonderful Life〉(1946)의 한 장면
필명은 Michael Innes.
1906. 9. 30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1994. 11. 12 잉글랜드 서리 콜즈던.
에든버러 아카데미와 옥스퍼드대학교 오리얼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존 플로리오의 〈몽테뉴 Montaigne〉(1931) 정판(正版)을 편집했다. 그는 1930∼35년 리즈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는 도중 첫번째 추리소설 〈햄릿, 복수하라! Hamlet, Revenge!〉를 써서 1937년에 출판했다. 1935∼45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들레이드대학교에서 임시 영어교수로 있다가, 1946년 그곳을 떠나 벨파스트로 갔다. 1948년까지 벨파스트의 퀸스대학교에서 가르쳤다. 1949년부터 옥스퍼드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으로 있었으며, 1961년 시애틀의 워싱턴대학교 워커에이미스 석좌교수가 되었고, 1969∼73년 옥스퍼드대학교 영문학교수로 재직했다.
본명으로 여러 장편소설과 단편집 1권을 출판했으며, 가명으로 여러 편의 추리소설과 방송원고를 썼다. 문학비평서로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인물과 모티브 Character and Motive in Shakespeare〉(1949)·〈8명의 현대작가론 Eight Modern Writers〉(1963)·〈루드야드 키플링 Rudyard Kipling〉(1966)·〈조지프 콘래드 Joseph Conrad〉(1968)·〈토머스 하디 Thomas Hardy〉(1971) 등이 있다.
[1870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페랭(Perrin, Jean-Baptiste) 출생
1870. 9. 30 프랑스 릴~1942. 4. 17 미국 뉴욕 시.
액체 중에 떠다니는 미세 입자의 브라운 운동을 연구하여 물질의 원자적 특성을 확증했으며, 1926년 이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육받은 그는 파리대학교의 교수진에 합류했고(1898) 물리화학교수가 되었다(1910~40). 1895년 음극선이 음전하를 띤 입자(전자)임을 확립했다. 1908년경 콜로이드 입자가 중력에도 불구하고 액체 중에 떠 있는 방식을 결정하는 데 몰두했다. 이 입자들이 침강하는 모양을 관찰함으로써 그는 이 현상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을 확증했으며 원자와 분자의 크기뿐만 아니라 주어진 부피 안에서의 양을 판단할 수 있었다.
[1857년] 독일의 작가 주더만(Sudermann, Hermann) 출생
1857. 9. 30 동프로이센 마치켄~1928. 11. 21 베를린.
독일 자연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처음에는 약제사 밑에서 도제로 일했지만, 마침내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베를린에서 잠시 가정교사로 일한 뒤 언론계에 뛰어들었다가 소설가로 방향을 바꾸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한 젊은이의 성장을 다룬 〈우수부인 Frau Sorge〉(1887)·〈오솔길 Der Katzensteg〉(1889)이 초기 소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희곡을 통해 다시 명성을 얻었다. 1889년 11월 27일 베를린에서 초연된 〈명예 Die Ehre〉는 후세의 비평가들 눈에는 베를린의 계급갈등을 다소 진부하고 통속적으로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주의 운동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작품이었다. 〈고향 Heimat〉(1893 상연)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이 작품은 불명예스럽게 떠나온 작은 시골마을인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자신의 과거와 맞닥뜨리게 되는 유명한 오페라 가수 마그다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그뒤에 발표한 문제극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구석에 숨어 있는 행운 Glück im Winkel〉(1895)·〈모리투리 Morituri〉(1896)·〈인생 만세! Es lebe das Leben!〉(1902)·〈좋은 평판 Der gute Ruf〉(1913)은 거의 모두 당대의 무대에서 성공했다. 그러나 작품이 종종 감상적인데다가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을 테마로 하여 대개 피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므로 오늘날에는 거의 공연되지 않고 있다. 그밖의 작품으로는 유혹당한 소녀가 점점 타락의 길로 빠져드는 과정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그린 장편소설 〈숭고한 노래 Das hohe Lied〉(1908), 고향의 순박한 마을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단편집 〈리투아니아 이야기 Litauische Geschichten〉(1917)가 주목할 만하며, 〈나의 어린시절 Das Bilderbuch meiner Jugend〉(1922)은 동프로이센에서 보낸 어린시절을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2001년] 베트남의 군인, 정치가 구엔 반 티우[阮文紹, Nguyen Van Thieu, 1923~2001] 사망
← Nguyen Van Thieu in 1966
공산화 전 베트남 정부의 마지막 대통령 응웬 반 티우(Nguyen Van Thieu)가 2001년 9월 30일 밤 망명지인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78세로 사망했다.
베트남 남부의 닝투안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티우 전 대통령은 2차대전 후 민족공산주의의 시초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에서 활동하며 프랑스에 대항하다 전향, 베트남 군사령관이 됐다.
1963년 쿠데타를 일으켜 고 딘 디엠 정권을 전복하고 1967년 대통령이 됐으며 1971년 부정 선거라는 비난을 받으며 재선됐다. 1975년 공산 베트남이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을 때 티우는 북쪽 영토 반을 포기했으며 평화협상을 위해 사임하라는 압력을 받다가 결국 월맹군이 수도 사이공을 함락하자 그 해 4월 21일 월남을 임시정부에 넘기고 대만과 런던을 거쳐 미국 보스턴으로 도망갔다. /조선
[2000년] .kr 도메인 50만개 돌파
2000년 9월 30일 .kr 도메인 등록건수가 50만개를 돌파했으며 IP 보유수는 아태지역에 배정된 주소 중에서 최대규모인 1381만 176개인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인터넷정보센터는 .kr 도메인 등록건수가 2000년 7월말 49만 4074개에서 8월말 49만 3691개로 줄어들었다가 9월말에는 50만 1534개로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이중 co.kr은 43만 8892개로 전월대비 7931개 늘어난 반면, 개인도메인인 .pe.kr은 8월부터 계속 감소해 3만 2084개로 나타났다. IP 보유수는 8월말 1158만 1952개였으나, 9월말 현재 1381만 176개로 크게 증가했다. 이는 아태지역에 배정된 주소규모 중에서 최대이며, 지난 10년동안 확보한 주소에 상응하는 규모로 전년대비 3배에 해당한다.
전용선 가입기관수는 8월말 6만 8365개 기관에서 6만 9794개 기관으로 증가했으며, xDSL 가입자수는 143만 9674명, 케이블TV를 통한 인터넷서비스 가입자수는 70만 3798명으로 전달에 비해 모두 증가했다. /조선
[1987년] 전화 1000만회선 돌파
모두 9조 9191억여 원이 투입된 전국전화 광역자동화사업은 폼스킨 케이블(Foamskin Cable) 전환에 따른 통화품질 및 경제성 개선, 통신구(通信構) FC관 대체로 인한 예산절감 효과, 지하철 개통 및 광케이블 도입으로 인한 혁신적인 통신구 운용 등 다방면에 걸쳐 통신 선진화로 연결되었다. 이로써 전화 적체를 완전 해소 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 어디서든 세계 각국과 즉시통화가 가능한 통신 선진국이 되었다. 1987년 6월 30일 완성된 전국 전화자동화사업으로 인해 그해 9월 30일 전화 1000만 회선을 돌파한데 이어 1993년 12월에 2000만 회선을 넘어섬으로써 세계 8위 시설국으로 떠올랐다.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
“쎄울 코리아!” 1981년 9월30일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목소리가 독일 바덴바덴의 IOC 총회장에 울려퍼졌다. 서울이 52표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27표를 얻은 일본의 나고야를 물리치고 제24회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순간, 유치단은 만세를 불렀고 전세계 체육인들은 이 극적인 반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로써 한국은 개발도상국가로서 최초의 올림픽 개최국이 됐고 아시아에서는 2번째, 세계에서는 16번째 올림픽 개최국의 영예를 안았다.
1979년 9월에 결정됐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타계로 무산될 뻔한 올림픽 유치 움직임이 다시 살아난 것은 2년 뒤였다. 개최지 결정을 정확히 1개월 앞두고 전두환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올림픽 유치를 지시한 것이다. 설사 이 지시가 5공 군사정권의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것이라해도 우리 민족에게는 축복의 시작이었다.
9월20일 유치단이 바덴바덴에 도착했을 때 현지 분위기는 이미 나고야로 기울어 있었다. 북한의 방해도 성가셨지만 1년전 모스크바 올림픽이 서방국가들의 불참으로 반신불수가 된 상태에서 한반도의 남북분단은 최대약점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이미 한반도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다만 마지막 날까지 그걸 몰랐을 뿐이었다. /조선
[1990년] 오스트레일리아 소설가 화이트(White, Patric, 1912~1990) 사망
1912년 5월 28일 영국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공군에 복무, 전후에는 부모의 고향인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갔다.
초기 작품에는 실험소설풍의 《행복의 골짜기 Happy Valley》(1939)' 《죽은 자와 산 자 The Living and the Dead》(1941)' 《숙모님 이야기 The Aunt's Story》(1946) 등이 있는데, J.조이스, G.스타인의 수법으로 '의식의 흐름'을 극명하게 추구하였다.
독일의 탐험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보스 Voss》(1957)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쳤고, 그 밖에 《불타버린 泳宕窈?1964), 《폭풍의 눈 The Eye of the Storm》(1973) 등이 있다. 20세기 오스트레일리아의 가장 뛰어난 작가로 간주된다. 1973년 《폭풍의 눈》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naver
[1966년] 아프리카 보츠와나 공화국 독립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남부의 내륙국가 베츄아날랜드(Bechuanaland)가 1966년 오늘 새로운 이름 '보츠와나 Botswana' 공화국으로 독립국임을 선포한다.
정부 청사의 영국의 국기가 내려가고 보츠와나 국기가 게양된다.
이 나라는 독립하기 81년 전인 1885년 4월 31일 영국의 보호령이 됐다.
독립 2년 전인 1964년 영국으로부터 영연방으로서 독립을 약속받았고 이듬해 1965년 수도를 가보로네(Gaborone)로 정했다.
또 총선거가 실시돼 독립운동가 출신인 세레체 카마(Seretse Khama)가 초대 대통령에 오른다. 세레체 카마는 이후 1980년 숨질 때까지 보츠와나를 통치한다.
보츠와나는 1968년 4월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1974년 11월에 북한과 수교하고 그동안의 입장을 바꿔 친북한 경향을 보이기도 했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 있다. 현재 한국과 보츠와나 사이에는 의료기술협력협정(1970. 7), 무역협정(1986.5) 등이 체결되어 있다. 특히 한국은 실질협력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보츠와나에 자동차·트럭 등을 무상으로 원조하는가 하면 의료진을 파견하고 연수생을 초청하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에 비해 두 나라의 협력관계나 교역관계는 미약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1991년 대한수입은 56만 달러였으며, 대한수출도 5만 달러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앞으로 한국이 보츠와나에 진출할 가능성은 많으며, 특히 광산업분야에서 적극적인 진출이 기대된다. 1989년 현재 보츠와나에 있는 교민은 94명으로 집계되었다.
[1965년] 인도네시아 9.30사건 발생
신생독립국가들의 반식민, 반제국주의운동을 대표하는 수카르노 대통령의 인도네시아에서 1965년 9월 30일과 10월 1일 밤사이에 혁명-반혁명-반반혁명의 연쇄혁명이 일어났다.
첫 혁명은 수카르노 대통령의 반미, 친중국경향에 반발하는 민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육군의 '장성평의회'가 지도한 것이었다. 이것을 30일 예방혁명으로 분쇄한 수카르노 경호대장 운통 중령은 그들이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배후조종을 받고 있었다고 폭로했다. 운통 중령은 예방혁명에 성공하자 즉시 45명으로 구성된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급진적으로 공산당과 제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혁명위의 구성은 반공 민족주의적 세력의 중추였던 나수티온 국방상이하의 육군지도자들을 거의 완전히 제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1일 저녁 7시 나수티온 국방상과 수하르토 육군준장이 이끄는 육군부대는 다시 행동을 일으켜 약 한시간의 충돌 끝에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이와같은 사태는 수카르노 정권의 군부, 종교세력, 공산당이 내정에 있어 격심한 대립을 이루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군부안에서도 대체로 혁명적인 공군, 보수적인 육군, 중립적 해군의 격심한 반목과 집권투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조선
[1963년] 이준 열사 유해 네덜란드서 56년 만에 환국
이준 열사의 유해가 1963년 오늘 네덜란드에서 고국으로 돌아온다.
1907년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에 파견됐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순국한 이준 열사의 넋이 56년 만에 환국했다.
나흘 뒤인 10월 4일 서울운동장에서 온 겨례의 추모를 받으며 유해봉안 국민장 의식이 거행됐다.
열사의 유해는 서울 수유리에 안장됐다. /YTN
[1949년] 중국 공산당, 주석에 마오쩌둥[毛澤東] 수상에 저우언라이[周恩來] 선출
← 마오쩌둥(1966)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1945년 4월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보고로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8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와 회담하여 화평건국의 제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1946~1948년 내전을 벌여 승리하였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국가주석이 된 마오는 모스크바를 공식 방문했고, 그곳에서 2개월간의 열띤 타협 끝에 한정적인 경제원조가 부수된 상호원조협약에 스탈린의 서명을 받아냈다. 그러나 중국은 경제발전을 위해 설치한 시설들로부터 혜택을 받기도 전에, 평양의 친소련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마오에 따르면, 이같은 시련을 겪고 난 뒤에야 스탈린은 마오를 신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49년(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마오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명확하지 않다. 1981년 6월에 나온 중국측의 공식적 평가에 따르면, 마오의 지도노선은 1957년 여름까지는 근본적으로 정당한 것이었으나, 1957년 이후에는 기껏해야 옳고 그름이 반반이며 아주 잘못된 적도 많았다는 것이다. 마오의 2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도하고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마오의 목표는 대체로 칭송할 만한 것이나,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들은 과감하고 상상력에 넘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자멸적인 것이었다. 마오의 전생애를 놓고 볼 때 그의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정확한 수치로 제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토지를 얻게 된 농민들의 행복과 내전중에 희생된 수백 만 명의 죽음을 놓고 어떻게 그 무게를 저울질할 수 있겠는가? 1949년 이후에 거둔 실제적인 경제발전과 대약진운동이 가져온 엄청난 기근, 그리고 문화대혁명이 가져온 끔찍한 혼란을 어떻게 저울질할 수 있겠는가? '말년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마오의 공이 과를 덮고도 남는다는 공식적인 평판은 대체로 무난한 것 같다.
← 1940년경 저우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는 항일전이 발발한 후에는 우한·충칭[重慶]에서 공산당의 대표로서 국민정부의 국방위원회·군사위원회 위원 등 요직에 있으면서 국공관계의 처리를 맡아 탁월한 정치적·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949년 4월 공산정권 수립 후 문화대혁명을 거쳐 최후까지 공산당에서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면서 27년간 총리(1958년까지 외교부장 겸임)로서 국내외의 중요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였다.
1950년 2월 14일 모스크바에서 30년 기한의 중·소상호우호동맹조약에 서명했고, 1954년 제네바에서 열린 한국과 인도차이나 관련 회담에서 중국 사절단 대표로 참가했다.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열린 아프리카·아시아 회의에서 아시아 비동맹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제의했다. 1956~64년에 유럽·아시아·아프리카 등지를 여행했고, 아프리카의 상황이 '혁명 직전'이라고 공언했다. 1964년 모스크바를 방문했으나 중국과 소련 사이의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해소할 수는 없었다. 1971년 7월 미국 특사 헨리 A. 키신저가 베이징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를 처음 만난 후 외교관·협상가로서 그의 명성은 미국 언론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72년 2월 베이징에서 열린 마오쩌둥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사이의 역사적 회담은 대부분 저우언라이가 조직·성사시킨 것이었다. 1972년 방광암에 걸린 뒤에도 정치를 계속했다. 1975년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제1차회의에서 중국공산당을 대표하여 공업·농업·국방·과학 기술의 현대화를 실현시키자고 주장했다. 그가 죽은 지 3개월 뒤인 1976년 4월 많은 공산당원·학생·노동자·간부·군인 등이 그를 기념한다는 명분으로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4인방(四人幇)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4월 5일 이 집회는 4인방에 의해 무력 진압되었는데, 이를 '톈안먼 사건'이라고 한다.
[1938년]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뮌헨협정 체결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나치스 독일이 다음의 침략목표를 체코슬로바키아 쪽으로 돌려, 그 해 9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하여 독일계 주민이 많은 수데텐란트를 할양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타협을 권고, 프랑스와 함께 9월 27일 히틀러에게 그 요구를 받아들이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28일 이탈리아 총리 무솔리니에게 열국회담의 개최를 의뢰, 29일 뮌헨회담이 열렸으나 당사국인 체코슬로바키아도, 그의 동맹국인 소련도 초청되지 않았다. 회담 결과 수데텐란트를 무혈로 독일에게, 기타의 소수민족 지방을 폴란드 ·헝가리에게 할양하는 뮌헨협정(Munchen Agreement)이 체결되어 독일은 전략상 유리한 발판을 얻었다. 한편 이와 함께 프랑스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3국의 상호원조조약체제는 붕괴하여 소련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소련의 영국에 대한 불신은 증대되었다. 이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있었던 대(對)독일유화정책의 정점으로 유명하다. /조선
[1929년] 영국 BBC방송, 첫 텔레비전 실험방송
1925년 베어드가 못쓰는 가구로 만든 TV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전자식TV와 다른 기계식 TV이다. 베어드는 24개의 작은 구멍이 뚫린 닙코프원판을 1분에 6백번 회전시켜 이를 통과한 빛을 전기적인 신호로 바꿔 영상을 만들었다. 1926년 베어드가 만든 TV는 영국왕립협회에서 50여명의 과학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첫선을 보였다.
그후 그는 주사선을 30개로 늘린 새로운 TV모델을 개발해 BBC를 통해 1935년까지 시험방송을 실시했다. 시험방송이 끝날 때쯤에서 베어드의 TV는 영국에 4천대가 보급됐다. 그러나 베어드의 TV는 전자식 TV에 의해 철퇴를 맞았다. BBC방송이 1936년 정규TV방송을 시작하면서 EMI가 개발한 전자식 TV를 채택한 것이다. 전자식 TV는 주사선이 2백40개에 달했고, 선명도도 기계식에 비해 2배나 나았다.
닙코프의 전기 망원경을 상업화한 사람은 영국의 사업가 베어드(Baird, John Logie, 1888-1946)였다. 비누, 젤리, 사탕 등의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한 그는 네온등이 발명되자 이를 이용한 텔레비전이 큰 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5년 그는 아버지와 친구로부터 2백50파운드를 꿔 다락방에서 닙코프의 원판을 단 기계식 텔레비전 시스템을 제작했다. 연장을 넣어두던 낡은 상자로 모터의 받침대를 만들고, 빈 과자상자로 네온등을 넣는 케이스를 만들었다. 주사용 원판은 마분지를 잘라서 만들었고, 못쓰는 자전거에서 떼어낸 렌즈도 도움이 됐다. 이렇게 해서 흉물스럽게 태어난 텔레비전은 30개의 주사선을 가지고 1초에 10번씩 번쩍였다. 베어드는 이를 ‘텔레바이저’(televisor)라고 불렀다.
베어드가 텔레비전을 발명했다는 소문은 소매상점인 셀프리지 백화점까지 미쳤다. 셀프리지 백화점은 1주일에 20파운드를 줄테니 발명품을 백화점에 전시해달라고 그에게 제안했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텔레비전이 백화점 상품을 홍보하기 위한 쇼로 전락하는 것이 싫었지만, 대중들의 반응도 볼겸 못이기는 척 승낙했다. 1926년 1월 26일 텔레비전은 마침내 대중 앞에 섰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비록 화면은 작고 어두워서 영상이 겨우 보일 정도였으나, 하루 3번 전시되는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백화점 앞에 줄을 섰다. 당시 최초의 텔레비전 스타는 ‘빌’이라고 하는 인형이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인기를 끌자 베어드는 출연료를 지급하고 조수였던 윌리엄 테인턴을 모델로 썼다.
영국 BBC방송이 베어드가 발명한 텔레바이저를 이용해 세계 최초로 TV방송을 실시한 것은 1929년 9월 30일이었다. 베어드는 텔레비전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연극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했다. 특히 경마 중계방송은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트럭에 거대한 카메라를 싣고 말들이 뛰어달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그러나 베어드의 성공도 잠시. 화질이 좋지 않은 기계식 텔레비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자식 텔레비전의 상징은 브라운관. 독일 스트라스버그대학의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1850-1918)은 1897년 음극선관을 이용한 브라운관을 발명했다. 전자총에서 나온 빛이 스크린에 닿으면 그곳에 미리 발라놓은 인이 발광한다. 또 빛이 통하는 길목에 자기 코일을 감아놓으면 전자선을 화면의 상하좌우로 보낼 수가 있다. 이를 이용해 스크린에 다양한 이미지를 표현해내는 것이 바로 브라운관이다.
브라운관의 위력을 눈치챈 사람은 러시아 출신의 미국 공학자 블라디미르 코스마 즈보리킨(1889 -1982)이었다. 그는 1924년 브라운관을 이용해 원시적인 전자식 텔레비전을 개발했다. 전자식 텔레비전의 진가를 알아본 곳은 즈보리킨이 일하던 웨스팅하우스사가 아니라 RCA사였다. RCA사는 텔레비전이 장차 모든 가정에 보급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즈보리킨에게 아낌없이 투자했다. 그 결과 1931년 7월 21일 전자식 텔레비전은 첫 시험방송을 가질 수 있었다. 한편 기계식을 고집하던 영국의 BBC 방송은 1936년 전자식 텔레비전으로 교체했다. /Google
[1861년] 미국의 껌 제조업자 리글리(Wrigley Jr., William, 1861~1932) 출생
그의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껌 생산업체이자 판매업체가 되었다.
13세때 아버지 회사의 비누외판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891년 시카고에서 비누판매 대리점을 개설하여 비누 1상자당 베이킹파우더 1봉지를 제공하는 경품판매를 실시했다.
1892년에는 부수적 상품으로 베이킹 파우더를 팔면서 경품으로 껌을 주었다. 껌이 베이킹파우더보다 더 인기가 있는 것을 깨닫고 비누와 베이킹파우더 판매를 그만두고 껌 판매에 전념했다. 또한 거래상들에게 주문의 규모에 따라 시계, 커피 분쇄기, 낚시도구 같은 경품을 주었다.
그는 자신이 1893년 선보인 스피아민트껌의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광고를 했다. 1908년까지 리글리스 스피아민트껌의 판매액은 연간 100만 달러가 넘었다. 1911년 그는 껌을 만들었던 제노 제조회사를 인수하였다.
시카고 강변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백색의 건물 리글리 빌딩은 추잉검으로 유명한 리글리 본사 건물이다. 프랑스 르네상스 양식으로 된 이 건물은 시카고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밤에 조명을 받은 모습은 시카고의 대표적인 풍경이다. /브리태니커
그 밖에
2001년 일본 다카하시, 여자 마라톤 세계신기록
2000년 박찬호 데뷔 첫 완봉승. 18승으로 시즌 마감
1999년 독일의 귄터 그라스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
1999년 미국 AP통신 ‘노근리 학살사건’ 첫 보도
1998년 제9호 태풍 ‘얘니’ 전국 강타
1992년 미국, 수빅만 해군기지를 필리핀에 공식 반환
1985년 미국의 물리학자, 지진학자 리히터 사망 - 지진의 규모를 측정하는 리히터 척도 개발에 공헌
1985년 고리원자력발전 3호기 상업운전
1982년 미국-일본 국방장관 회담
1982년 서울신탁은행 민영화
1981년 대만, 중국의 대화제의 거부
1978년 김성준 WBC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76년 한국-브라질 통상협정 체결
1966년 베추아날랜드,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보츠와나로 국명 변경
1965년 인도네시아 친공쿠데타 발생-실패로 끝남
1963년 알제리아군 일부 반란 (벤 벨라 대통령정부 명령에 반대 모한트 우 엘 하즈대령 등)
1962년 미국 대학에서 흑백인 공학분규로 학생들 폭동
1961년 시리아 독립선포
1961년 시리아, 쿠즈바리 전(前)국회의장을 수상으로 신내각 구성
1961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정식 발족
1961년 군사재판, 4.19의거 당시 발포관련자 곽영주에 사형선고
1959년 흐루시초프 중국방문. 중국-소련 대립 격화
1958년 소련, 핵실험 재개
1957년 인천 판유리공장 준공식
1950년 유엔총회, UNCURK(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회) 설치안 가결
1949년 태국, 대한민국 정식 승인
1932년 대일(對日)전선통일동맹 조직
1927년 베이브 루스, 60홈런 기록
1925년 서독, 동독과 경제 단교
1925년 그리스, 공화국헌법 공포
1910년 일제, 토지조사사업 착수. 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관제 공포
1908년 소련의 바이올린 연주자 오이스트라흐 출생
1849년 폴란드의 역사가 보브진스키 출생
1472년 왕양명 출생
1227년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 최초의 교황 니콜라우스4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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