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 만난 자의 이웃(2019 봉사단 헌신예배)
누가복음 10:25~37
한남교회에는 ‘중보기도봉사단, 사랑의 편지 봉사단, 사마리아 봉사단’이라는 삼대 봉사단이 있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봉사단체와 수고하시는 단원 여러분과 단체장님들과 봉사단체를 위해 헌신하시는 모든 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회에도 여러 봉사 단체들이 있지만, 교회의 봉사단체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장 낮은 곳에서 헌신한다는 점에서 은밀한 중에 갚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수고와 헌신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중보기도 봉사단은 매주 수요일 4시에 모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 불어도 친교실에 모여, 함께 찬양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도 많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교우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한 주간 한 주간, 교우들의 상황을 점검해서 기도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 덕분에 우리 한남교회와 교회에 속한 가정들이 평안한 줄로 압니다. 그리고 이 나라도 지금은 어려워도 펴오하의 나라가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이럴 때는 “믿습니까? 아멘!”해도 됩니다.
사마리아봉사단은 2001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제가 부목사로 시무하던 시절에 제안해서 만들어진 봉사단인데, 사마리아 헌금으로 봉헌되는 헌금은 전액 지역사회와 선한 일을 위한 사업에 사용하는 것으로 정관을 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문서로 만들어진 바도 없지만, 이 원칙은 잘 지켜졌습니다. 일일이 자랑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을 해주셨고, 교우 여러분께서도 귀한 헌금으로 함께하셔서 정말 은밀한 중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셨습니다. 지난번에도 소개해 드렸듯이 연탄나눔 행사를 위해서, 청소년들의 장학금과 선교사들과 농어촌교회, 원로목사님들과 소중한 일에 연대하고 있으며 옥수동사무소와 연계해서 옥수동 지역에 사시는 분 중에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소개받아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말이면, 본래 사마리아 선교회의 취지에 맞게 최소한의 예산만 남겨놓고 도움이 필요한 단체와 일에 기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교회재정과는 별도로 이뤄지는 일입니다만, 한남교회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게 하는 귀한 일인줄로 믿습니다.
사랑의 편지봉사단은, 매 주일 결석한 교우들에게 주보를 보내고, 교우들의 애경사를 기억하며 수시로 편지를 보냅니다. 아주 오랫동안 이어진 한남교회의 좋은 전통이고 물려줄 만한 신앙의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랑의 편지봉사단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오랫동안 수고해 주신 김윤실 권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올해는 사랑의 편지봉사단을 새롭게 개편하면서 박상묵 권사님이 단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전에 했던 일들을 하면서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공유차원에서 함께 나누겠습니다.
‘사랑의 편지’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편지는 소식을 전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편지봉사단’이니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쓴 연애편지가 되겠지요. 하나님께 쓰는 연애편지, 이렇게 생각하면 될듯합니다. 결석하시는 분들에게, 위로가 필요한 분들께, 애경사를 맞이한 분들께 쓰는 편지는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일이고, 이웃 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이니 결국은 하나님께 쓰는 사랑의 편지입니다. 이 편지의 방식을 올해는 다양하게 준비해서 추수감사절과 교회창립주일을 전후에서 전시회를 하려고 합니다. 올해는 특별히 여성 장로님이 취임하는 의미 있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립기념주일도 기념하면서 한 해의 결실을 담아 다양한 사랑의 편지를 전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남교회 속해있는 교우 여러분의 재능을 담아 전시회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전시회의 특정한 시간은 음악으로 편지를 쓸 예정입니다. 음악적인 재능을 가진 분들이 목소리로 악기로 합주로 사랑의 편지를 쓰고자 합니다. 그리고 한남교회에는 붓글씨를 쓰시는 분들이 많은데, 한 켠에는 ‘붓글씨와 캘리그라피’를 전시하고, 저는 올해 작업한 사진 결과물들을 액자로 만들어 사랑의 편지로 내어놓으려고 합니다. 이런저런 소품을 잘 만드시는 임영미 집사님은 소품전시회를 하시면 될 터이고, 꽃꽂이를 잘하시는 장남숙 권사님은 예쁜 꽃꽂이 전시회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성경 필사도 이중 하나가 되겠지요. 아시다시피 현재 교회의 전시공간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참여하실 분들은 미리, 신청해서 사랑의 편지 봉사단이 가을에 한 해의 결실을 통해 하나님께 사랑의 편지를 보내는 풍성한 행사를 잘 진행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차후에 자세하게 진행되는 과정과 소식들을 전하겠습니다.
■ 사마리아인의 비유
너무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문자에 얽매여 살아가는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비유로 들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율법의 강령이 무엇이냐 묻습니다. 그러자 율법 교사는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가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수능시험 100점짜리 대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수능 100점을 맞는다고 인성도 곧 100점이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머리로 안다고 100점이 아니라, 아는 것을 삶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조금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봐야 비로소 ‘아주 조금’ 알게 됩니다. 삶으로 살기 전에는 너무 쉽게 ‘구원의 확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살아보면 구원의 확신도 믿음도 쉽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무지의 지’를 말했듯, 신앙이 심연까지 깊어지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주의 은혜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이어지는 길에는 대략 25km 정도의 광야지대가 있었는데 강도들이 출몰하던 지역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올 때에 여리성을 함락하는 방법은 다른 가나안의 성을 점령하는 방법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성은 밖에서 무력으로 공격하여 점령하는 방식이었다면, 여리고 성은 성벽을 일곱 바퀴 돌고 일제히 나팔을 불자 성벽이 안에서부터 밖으로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배권력들의 의지와는 달리 여리고 민중들이 스스로 이스라엘에게 투항한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를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지배권력이 여리고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리고 민중은 현재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지배권력이 바뀐다고 해도 더 나빠질 것이 없는 상황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140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민중들이 삶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여리고를 비롯한 이스라엘까지도 강대국의 식민지로 살아갑니다. 민중은 그 땅에 그냥 살아가는데, 지배권력만 끊임없이 바뀌는 상황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정착하지 못하는 이들이 ‘강도’가 되어 살아갑니다. 강도가 자주 출몰한다는 것은 그만큼 삶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제사장과 레위인
이런 현실임에도 여전히 종교권력은 변함없이 자신들의 지위를 누립니다. 불의한 종교권력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권력보다 우위에 있든지 아니면 권력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권력과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공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을 삶으로 살지 않고 문자로 사는 방법입니다.’ 내용을 떠나 형식을 중시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강도 만난 이웃을 돕지 않고 지나쳤다는 것은 그 당시의 종교가 문자주의와 형식주의에 얽매여서 본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리시험에서 100점을 맞은 율법학자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왜 강도 만난 이웃을 돕지 않습니까? 그러고도 선한 이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 선한 이웃이란?
선한 이웃이란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개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는 존재’였습니다.
본래 이스라엘과 같은 민족이었는데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의 12지파는 남과 북으로 나뉩니다. 그때 11지파는 북왕국이스라엘로, 유다지파는 홀로 남왕국유다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기원전 722년경에 아시리아에게 망합니다. 제국들의 식민지지배방식은 저마다 달랐는데, 앗시라아는 혼혈정책으로 민족성을 파괴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식민지가 된 이스라엘은 혼혈족이 되어 살아갑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서 ‘종족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규율을 어긴 것입니다. 이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렀는데, 본래는 남왕국유다와는 형제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남왕국 유다는 그들을 이방인 취급했습니다. 후에 남왕국 유다는 바빌론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후에 바벨론 제국이 페르시아에 멸망 당한 후에,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고향에 돌아와 훼파된 예루살렘을 건축합니다. 이때, 사마리아인들은 본래 우리와 형제지간이니 우리도 성전건축을 돕겠다고 하지만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화가 난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기 전날, 성전 뜰에 재를 뿌립니다. 그리하여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앙숙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도 그랬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의 눈에는 구원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이방인보다도 못한 ‘개 같은 존재’로 취급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는 이 개 같은 존재가 선민이라 생각하는 그들보다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은 문자가 아니라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이것이 예수님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에게 이웃은 죄에 빠져 살아가던 저희들이었으며, 그 이웃을 위해 온몸을 내어주신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봉사단 여러분의 봉사는 ‘이웃을 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곧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강도 만난 이웃’은 누구입니까? 강도 만난 이웃을 볼 줄 아는 눈을 구하시고, 그들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용기와 그들을 지속해서 도울 수 있는 물질을 구하십시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은 문자주의와 선민의식에 빠져 신앙인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 목만 굳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되지 마시고,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선한 이웃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