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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1-25. 일관된 생각과 크기. 2022. 9. 11.
물취이모 (勿取以貌)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사람을 보고 평가할 때에 외모에 중심을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면 실수를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세상의 모습과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서 판단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감추어진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리 오래 사귀어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온 속담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한국의 옛 이야기인데 황희 정승이 누추한 옷을 입고 길을 가다가 시장기를 느낄 무렵 어느 잔치 집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시장기를 채우려고 그 집에 들어서는데 하인들이 대문에서부터 막았습니다. 정승은 배가 고파 그렇다고 해도 하인들은 막무가내로 정승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그 집에서 다시 잔치가 열려 정승은 사모관대를 갖추어 입고 찾아 갔더니 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주인도 버선발로 나와서 그를 맞이하고는 산해진미를 차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정승은 잘 차려진 음식을 먹지 않고 갑자기 음식을 옷 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이를 보고 주인이 이상하게 여겨 왜 그러시냐고 그 이유를 묻자 황희 정승이 대답하기를 며칠 전에 허름한 옷으로 찾아 왔을 때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오늘은 귀한 대접을 받았는데 이 것은 모두 이 옷 덕택이니 음식을 먹을 자격은 이 옷에게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한국만 그렇습니까? 미국의 이야기입니다.
허름한 차림의 노부부가 세계적인 명문 대학인 하버드 대학의 정문을 막 들어서려고 하는데 정문에 서 있던 경비가 그들을 불러 여긴 왜 들어가시려고 합니까? 노부부는 총장님을 좀 만나러 왔다고 대답을 했는데 경비가 노부부를 보며 아니, 총장님이 당신 옆 집 사람이요? 총장님 같이 높은 분이 당신들 만날 시간이 어디 있겠소? 노부부를 정문 밖으로 밀어 냈습니다. 경비의 태도가 불쾌했지만 노부부는 다시 그에게 이 만한 대학을 설립하려면 돈이 얼마나 듭니까? 그러자 경비는 내가 어떻게 알아요? 왜 묻는 거요? 어서 나가세요. 화를 버럭 내며 말했습니다. 그래서 노부부는 두 말 않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이 노부부는 스탠포드 부부로 금광과 철도 업을 하는 엄청난 재벌이며,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상원 의원을 지낸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노부부에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15살에 장티푸스로 죽게 되면서 전 재산을 교육 사업에 헌납하기로 결정을 하고 명문 대학인 하버드 대학을 방문한 것이었는데 경비에게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5 년 후 직접 대학을 설립했는데 그 대학이 유명한 스탠포드 대학입니다. 일관 된 생각과 크기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뒤 늦게 알게 된 하버드 대학은 그 날의 잘못이 경비의 실수인 것을 알게 되었고 반성하고 아쉬워하며 하버드 대학 정문에 이런 문구를 써 붙였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면 안 됩니다. 외모를 보는 것은 마치 수박의 겉만 보는 것과 같습니다. 수박의 겉만 봐서는 속에 달고, 시원한 육즙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의 학벌이나 가문과 외모가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못난 사람도, 잘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외모로 보는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와 관계 된 사람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에 다른 사람도 나의 외모와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며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이 것이 불취이모(勿取以貌)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생각을 하고 왜 이렇게 결정을 하며 살아갈 까요?
1. 일관된 생각과 행동이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처음과 나중이 일관되게 생각하고 행동하기가 쉽지 아니합니다. 생각도 상황에 지배를 받고 영향을 받습니다. 일도 그렇습니다. 한 우물을 파는 꿈도 비전도 그렇습니다. 세초에 가졌던 마음 세말까지 가는 것 쉽지 않습니다. 신앙과 믿음과 기대와 비전은 초지일관해야 합니다. 그런데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상황은 계속 변하고 여건은 새로운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심을 바꾸고 다짐을 바꾸어야 살아남습니다. 지금 한국은 추석 연휴인데 오래전에 나온 가장 인기 있는 유모가 있습니다. 신문 광고에 나온 것인데요. 제가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제목이 이렇습니다. 남편을 사정상 급매 합니다. 유모의 타이틀이 남편 팝니다. 사정상 급매 합니다. 사정상이라는 단서를 보면 상황의 지배를 받고 상황 여건에 영향을 받았다는 말씀 입니다. 그래서 급매한다고 합니다.
ㅇㅇㅇㅇ년 ㅇ 일 ㅇㅇ 예식장에서 구입 했습니다. 한때 아끼던 물건 이였으나 유지비도 많이 들고 성격 장애가 와서 급매 합니다. 구입 당시에는 A급인 줄 알고 착각해서 구입을 했습니다. 마음이 바다 같은 줄 알았는데 잔소리가 심해서 사용할 때에 만족감이 떨어집니다. 음식물 소비는 동급의 두 배입니다. 다행히 외관은 아직 쓸 만 합니다. AS는 안되고 변심에 의한 반품 또한 절대 안 됩니다. 덤으로 시어머니도 드립니다. 여러분,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대가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이 씁쓸합니다. 한 때 아꼈던, 그리고 한 때 A급 이였던, 처음은 마음이 바다 같고 외관도 괜찮았는데 지금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유지비가 많이 들고 지금은 성격 장애가 오고 지금은 잔소리가 심해서 귀찮고 지금은 소비도 두 배라고 합니다. 쓸 수 있는 것이 없어져서 중고 시장에 내어 놓았습니다. 바뀌었습니다. 초지일관할 상황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제가 이번에 2주간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8/24일 한국으로 출국하기 전에 여러 가지 일정을 계획하고 출발을 했습니다. 8/23일 pcr 검사를 받고 오후에 음성을 확인했습니다. 한국 입국을 위해서 출 입국 서류와 가방을 대충 정리하고 24일 아침 새벽 5시 30분 정도에 출발을 하기 위해서 잠을 일찍 청했습니다. 그런데 새벽 3시 30분정도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너무나 몸이 아프고 심장에 압박이 왔습니다. 그래서 사우나를 다녀와서 출발을 기다리는데 오한과 함께 아픔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켄코, 구니코 전도사와 더불어 교회를 출발했는데 공항까지 가는데 기침을 두 서네 번 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면 지금까지는 반드시 두 분과 함께 모닝을 하면서 이런 저런 부탁을 하기도 했는데 갑자기 켄코상이 도착지의 차 안에서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재차 모닝을 이야기 하니까 손을 저어가면서 사양을 하시기에 제가 아파도 눈치로 알아차리고 구니코 상과 함께 히메지로 돌아가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인사는 했습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는 이레와 이안이 그리고 혜정이가 픽업을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몸이 풀리지 않고 더욱 가슴이 조여 오기 때문에 바로 보건소에 가서 pcr건사를 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을 청했습니다. 얼마 이후에 저녁 무렵에 형빈이가 주사를 놓는 것까지는 느꼈지만 언제 수액을 맞고 종료되었는지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새벽 3시30분정도에 깨어보니 너무나 이전의 모습과 컨디션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아침 9시에 연락을 받기를 양성으로 판정이 되고 격리가 되면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이렇게 아픔과 통증을 느끼면서 10일 간 지난 금요일까지 꼼짝을 못했습니다. 영향을 받았습니다. 초지알관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빨리 회복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을 하지만 그래서 수액을 3번씩이나 맞고 영양제를 투입하고 코로나 해독제를 복용했지만 그 영향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토요일 처음으로 강남 병원으로 외출을 해서 다시 수액과 비타민D를 맞았습니다. 왜요? 초지알관 된 사역을 위해서요.
여러분, 우리가 가장 신뢰하고 살아가야 할 가정과 예배공동체도 상황의 지배를 받고 여건의 영향을 받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상황에 지배를 안 받고 여건에 영향을 안 받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영향과 지배를 받습니다. 신앙도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떳떳하게 예수 믿는다고 말하지 않으려 합니다. 믿음과 진리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이 주는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닌 것은 아닙니다. 초지일관해야 합니다. 영향을 받아도 하나님이 주신 목적과 비전을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향과 지배를 받으면 목적과 비전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무엇에 대한 초지일관 인가? 오늘 본문에 의하면 다윗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거의 일관된 신앙과 믿음의 태도를 유지합니다. 특별히 생명에 대한 것은 초지일관입니다. 누구의 생명입니까? 기름부음 받은 분의 생명입니다. 다윗은 생각하기를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사람은 사람이 절대로 그 생명에 대하여 touch 할 수 없고 그 영역은 하나님의 영역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사울 왕이 2번씩이나 다윗의 손 안에 들어 왔었습니다. 쫓기는 다윗으로서는 더 이상 숨어 다닐 필요도 없고 숨어서 살 필요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좋은 기회이었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 기회를 이용해도 누구 하나 이의를 붙일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윗을 따르는 600여명의 모든 사람들이 이 때가 기회라고 했습니다. 너무나도 쉽게 일을 마감 할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따라 다니는 600명이 간청을 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허락하신 은혜라고 하면서 사울 왕을 죽일 것을 간절히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초지일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하고 특별한 것은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다윗입니다. 여러분, 위대한 신앙인이 되느냐, 안 되느냐? 는 이런 때 보면 알게 됩니다. 다윗의 리더쉽이 어디서 나오는가? 주를 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할 수 없을 때, 생각나지 않을 때 주를 끄집어내는 사람이 위대한 신앙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고 말한 것을 갖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생각하고 말한 것을 갖게 되는데, 소유하게 되는데, 하나님 안에서 생각하고, 주안에서 말을 합니다. 처음 생각과 처음 말한 것을 끝까지 고수합니다. 이것이 위대한 다윗이 되는 근거입니다. 다윗은 생각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어느 때든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되시되 특별히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드러낼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위대한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울 왕이 죽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실패했습니다. 세 아들 들이 먼저 죽었습니다.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 세 아들이 그의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리고 사울 왕은 부상을 당하지만 생명은 부지하고 있었습니다. 목숨은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죽음에 직면하자 스스로 칼을 앞에 꺼꾸로 세워 놓고 그 위에 엎드렸습니다. 칼이 관통을 합니다. 이 안타까운 상황을 보고 있던 한 소년이 사울 왕을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사울 왕의 머리를 쳐서 죽이고 사울왕의 머리에 있던 면류관과 팔에 있던 고리를 다윗 왕에게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보고를 받는 다윗은 당시 상황을 자세히 물었습니다. 다윗은 다른 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의 마지막을 하나님과 사울 왕 본인 손에 맡기지 아니하고 편안하게 저 세상 가도록 배려한 소년을 꾸짖습니다. 사울 왕의 죽음을 애통 해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옷을 잡아 찢습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기름부음 받은 사람의 생명은 죽음의 목전에서도 하나님의 영역 이라는 것을 다윗이 행동을 통해서 보여 줍니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사람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이런 다윗을 보면서 다윗의 생각과 믿음과 신앙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초지일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입니다. 사람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 앞에서도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태도가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상황에 따라 바뀌지 않았고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평안 할 때나 위기의 때나 도망 다닐 때나 살아있을 때나 죽음의 현장에서도 똑 같습니다. 지키려고 했던 진리에 대한 수호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같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상황에 따라 살 때가 많이 있고 사람을 따라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상황과 여건과 조건에 따라 갈 때가 있고 또 그렇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초지일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상황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영향을 받을 때에는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이성계의 말 아닙니까? 역사를 통해서 배우고 교훈을 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야 있으랴? 개성 선죽교의 정몽주를 배우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고지 곧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변해야 성공하고 힘 있는 곳에 서야 출세한다고 합니다. 처음이나 나중이나 초지일관 그 길을 가는 사람을 가리켜서 융통성도 없고 꽉 막힌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결과가 어떻습니까? 그래서 위대한 일을 이루었습니까? 그 때나 지금이나 똑 같잖아요. 그렇다면 차라리 초지일관 살아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믿음과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처음과 나중이 똑 같이 진리 안에서 살면 다윗처럼 위대한 인물이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처음이나 나중이나 일관 되게 적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축복 하십니다. 그래서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일관된 생각과 행동이 쉽지 않은 세상의 마지막 때가 가깝기 때문에 영향과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가 아니라 임을 향한 일편단심을 실천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3. 받은 은혜 속에서도 초지일관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울 왕입니다. 사울왕은 다윗의 정반대입니다. 진리를 지키려는 다윗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인물 사울 왕입니다. 사울왕은 기름부음을 받은 놀라운 은혜를 가볍게 여깁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의 기름부음 받음을 생각 하는데 사울 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볍게 여기고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 아들의 죽음과 당신의 마지막을 예측하고 자기 칼에 자기가 그 위에 쓰러집니다. 마지막까지 기름부음 받은 자의 자세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메시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 왕 같은 제사장과 거룩한 나라와 주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이 기름부음 받습니까? 왕. 제사장. 선지자입니다. 여러분을 왕과 제사장과 나라로 말씀 합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만 기름부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실제 기름 부음의 의식이 없었지만 사람이 하는 의식도 중요한데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절대로 다윗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처럼 타인에게 뿐만 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한 예우를 하고 사셔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다가 오더라도, 세 자녀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더라도, 내 앞에 죽음이 직면 하더라도 스스로 나를 내가 처리 하면 아니 됩니다. 사울 왕처럼 처세하면 아니 됩니다. 그 영역은 나의 영역이 아닙니다. 내 생명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이 것을 반드시 꼭 기억하시고 내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도 사랑만 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또 한사람 소년을 봅니다. 소년도 다윗 왕에게 잘 보이려고 했는데 다윗 왕의 중심을 몰랐습니다. 사울 왕의 마지막을 처리해 주었지만 사실 이것은 소년의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말씀과 신앙대로 하지 않고 내가 생각한대로 도와줍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나의 생각이 아니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아니면 내 생각인가? 소년은 자기 생각으로 사울왕의 고통을 덜어주었습니다. 편안히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책임을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하여 주는 것은 주안에서 입니다. 하나님의 몫인가? 나에게 맡기신 위임된 사항인가? 구분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할 일인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인가? 구분하시는 2022년 가을과 그 결정가운데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시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4. 생각을 담는 그릇과 사람의 크기입니다. 그러니까? 인물됨입니다. 사람은 똑 같은데 인물됨은 다 같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크기는 타인에 대한 포용심이 어느 만큼 있는 가로 결정이 됩니다. 흔히 위인들의 인물됨을 보면 자신에게는 철저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합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극단에 서 있는 오늘 현실에서 큰 인물이 그리운 것은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사울이 죽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쫒기 던 10년 세월이 악몽 같았고 환멸스러웠지만 이제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의 새 왕에 오를 것입니다.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이고, 그 삶은 영예로울 것입니다. 사울의 전사 소식을 가지고 온 아말렉 소년은 상급을 받을 줄 알고 자신이 사울 왕을 죽였다고 고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두 번이나 기름부음 받은 왕을 살려주었던 다윗에게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어서 즉시 그를 처단합니다. 아울러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의 죽음까지 접한 다윗은 깊은 슬픔에 빠집니다. 얼마나 슬픔을 가슴에 묻었는지 곧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조가(弔歌)를 지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부르도록 했습니다. 진심으로 슬퍼하고 진심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백성들 간에 마음이 갈리는 일을 방지하고, 왕족에 대한 예우를 갖추도록 한 것이 되었습니다. 진심이 담긴 다윗의 애도와 조사가 백성들을 하나로 묶고 이스라엘의 내일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많은 지도자들이 있는데 통치자들의 행동에는 보이기 위한 것들이 많습니다. 전시 효과를 내려고 하는 이면이 있습니다. 진실은 빠뜨린 채 하나의 의식으로 일처리를 합니다. 진실이 결여 되었기에 당연히 겉치레로 끝이 납니다. 그러기에 시간이 얼마 간 지난 후엔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아니었습니다. 왕의 부자(父子)를 진심으로 애도했고, 그들을 아버지와 형으로 추모를 합니다. 어떤 외식(外式)이 없었습니다. 사울은 원수가 아니라 아직도 다윗의 왕이었고 요나단은 왕위를 놓고 싸울 라이벌이 아니라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온 힘을 다하여 섬겨야 할 왕이 떠나고, 생명처럼 귀한 친구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온 백성들과 함께 진심으로 그들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여전히 다윗에게는 그들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생전의 모습을 추모하고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22-23절 그들 생전의 모습을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 하였다고 노래하면서 오래 기억할 것을 스스로 다짐합니다. 26절은 그 대미를 장식 하는데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 하였도다. 다윗은 여인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비교 할 수 없는 여인의 사랑을 각별히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의 사랑보다 요나단의 사랑을 더욱 기억하고 애도합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만 한일이 아니었습니다. 장로들의 환심을 사고, 방백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울 왕과 요나단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없기에 지금 애도하고, 조사를 합니다. 여러분, 역시 다윗은 큰 사람입니다. 사실 사울이라는 이름이 큰 사람의 뜻입니다. 그런데 큰 사울이 큰 자가 못 되었습니다. 이름값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큰 자가 되고 큰 인물이 되고,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이름을 잘 짓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이름값을 못하면 더욱 괴롭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름값위에 더 위대한 인물이 됩니다. 다윗은 재능이 많은 사람으로 용사며 시인이며 음악가 이였습니다. 시편의 구구절절이 감정 없이 메마른 사람들도 다윗이 지은 시편을 묵상하면 은혜가 넘쳐 납니다. 낙심한 사람이 새로 일어나는 꿈을 갖도록 합니다. 막다른 골목에서도 소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며 베푸실 상을 기대하며 살게 됩니다. 가슴속에서 그 무엇인가 끊어 오르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런 출중한 재능을 가졌더라도 사람의 됨됨이를 갖추지 못했다면 그것은 모두 겉치장만 하는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재능뿐만 아니라 관용과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인물됨의 그릇은 더 커 보이는 것이고 그의 재능은 더 빛나 보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훈련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타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다윗은 이제 왕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확실히 인물됨은 자기에게 얼마나 가혹하고, 타인에게 얼마나 관용을 베푸느냐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요한일서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의 다섯 가지 본질은 무조건, 무한성, 희생과 책임과 용서입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심리적인 것과 관계적 요소의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럴 듯 하지만 최근에는 경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연애나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또 늘고 있습니다. 돈 없으면 사랑하지 말라는 책도 출판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그 사랑은 하나님께로 부터 왔고 하나님 안에 있어야만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표현에는 물질적인 것과 개인적인 탐욕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신앙인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속성이고 물질에서 떠나 서로 마땅히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겪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고통과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사랑 안에서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아 가며서 나에게 날아온 화살과 스쳐갔던 가시들이 나를 무디게 했고, 병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귀에 들려 왔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치료하심과 회복이!!! 그래서 소리를 지릅니다. 나의 소망은 이 것이라고, 거창한 것이 아니고 볼 수만 있으면 돼!!! 거창한 것이 아니고 작은 소망이야!!! 거창한 것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야!!! 이렇게 외치는 다윗입니다. 할 수 있습니까? 아니 됩니까? 무겁습니까? 이를 위해서 주님은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과 영혼이 쉼을 얻으리니!!!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게 되었고 나는 왜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 하는가? 스스로 독백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사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너의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불렀습니다. 몇 마리 안 되는 양을 치는 목자에서 불러서 기름을 부었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구별하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의로 불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손을 잡아서 보호하시고 다윗을 만 백성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언약과 빛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살아 갈 수 있음에 감사하고 공기를 마시고 광야를 걷는 그 상황에 감사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안부를 물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승리는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가장 끈기가 있는 사람의 몫입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을 때에 그 약속을 믿음으로 간직했습니다. 초지일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무엇을 해도 채워지지 않고 만족하지가 않아요. 그러나 언제인가 주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때를 위해서 초지일관의 신앙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처럼 하루하루가 다르게 넓고 깊은 사람들로 변해가고 체인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만지시고 빚으셔서 큰 그릇으로 만들어진 그런 복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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