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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6
하늘로부터 내린 떡-출애굽기 16장-
이 장은 요한복음 6장과 연관지어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내린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날마다 공급받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예증하는 것이기도하다.
1. 만나는 예수가 누구신가를 설명한다
“만나“(manna)라는 이름은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뜻이다(15절).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것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서 쓰고 있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었다.“ 만나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지 생각해보자.
작다(14절)-그의 겸손을 말한다. 그는 젖먹이와 종이 되었다.
둥글다(14절)-그의 영원하심을 뜻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 8:53-59).
희다(31절)-그의 순전성과 무죄하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시다.
달다(31절)-그의 성품을 뜻한다. “오,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눈으로 보고 알라!“ 그러나 민수기 11장 4-8절을 보면 유대인과 함께 온 신자 중에서 “혼합된 군중“은 만나의 진가를 알지 못하였다. 세상적인 군중은 애굽의 부추, 양파, 마늘을 원했다. 그들은 단순한 만나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만나를 가루로 만들어 반죽하여 떡을 만들었다“. 그러자 만나는 꿀맛이 아니고 “기름“ 맛이었다. 우리는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개량하려 해서는 안된다.
만족케 한다-이 민족이 거기서 38년 동안을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떡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 양육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신다.
2. 만나는 예수께서 오신 방법을 예시한다
하늘에서-만나는 애굽에서 들여온 것이 아니고 광야에서 만든 것도 아니며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굶주린 죄인들에게 주는 아버지(하나님)의 선물이 되어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요 6:33). 그리스도를 “보통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
밤에-만나는 밤에 내리는데 이는 이 세상이 죄로 어두움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때도 밤이었는데 그것은 세상의 빛이 되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를 거절한 사람들의 마음은 아직도 밤이다(고후 4:1-4).
이슬 위에(13절)-이것은 성령의 모형이다(민 11:9). 왜냐하면 예수께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눅 1:34-35). 예수께서 처녀에게서 나지 않으셨다면 그는 결코 “거룩한 자“로 불리워 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슬은 만나가 땅으로 말미암아 더러워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광야에-이 세상은 낙원이 아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세상은 놀라운 곳이겠으나, 영광을 향해 순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은 광야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림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웬 은혜인가 !
반역하는 백성에게(1-3절)-이스라엘은 얼마나 잘 잊곤 하는가! 그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것이 6주 밖에 안되었는데 하나님의 여러 기적들을 벌써 잊어버렸다.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께 대항하여 불평하였으며(15:22-27), 옛 생활의 육적인 음식을 갈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자비로 그들에게 떡을 공급하셨다. 4절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겠다. “감사치 않는 죄인들에게 불과 유황의 비를 내릴 것이라!“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떡의 비를 내리셔서 그들을 향하신 그의 사랑을 증명하셨다(롬 5:6-8 참조). 2백만 명에게 6파인츠(한 오멜)씩 공급하려면 60대의 자동차분량을 싣는 화물열차 네 대분이 매일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관대하신가 !
그들이 있는 곳에-만나는 유대인들이 거두어 들이기 쉬운 곳에 있었다. 산을 오르거나 시내를 건너야 할 필요는 없었다. 만나는 그들이 있는 곳에 내렸다(롬 10:6-8).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라도 그에게 올 수 있다.
3.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 할 일을 보여 준다
우리는 필요를 느껴야 한다-그리스도만이 만족시킬 수 있는 영적인 배고픔이 내면에 있다(요 6:35).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가 용서를 구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내가 주려 죽는구나“라고 말했을 때였다(눅 15:17-18). 오늘날 세상의 불안과 죄는 대개 영적인 배고픔을 채우지 못한 결과이다.
우리는 몸을 구부려야 한다-만나는 식탁 위에나 나무에 내리지 않았다. 만나는 땅에 내렸으며 그것을 집으려면 몸을 구부려야만 했다. 스스로 겸손하지 못한 죄인들이 많아서 허리를 굽히지 않으려 한다. 교만은 아마도 다른 어떤 죄보다 사람들을 더 많이 지옥으로 보내는 것 같다.
우리는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사람은 만나를 바라보거나, 찬양하거나, 다른 사람이 먹는 것을 보고 있어서는 배부르지 못하다. 스스로 그것을 먹어야만 했다! 죄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내적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요한복음 6장 51-58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은 그리스도께서 문자 그대로의 살과 피를 의미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힌다. 요한복음 6장 68절은 그가 말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HIS WORD)이었음을 알려 준다. 우리가 그 말씀을 받을 때, 살아계신 말씀인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일찍 그 일을 해야 한다(21절)-“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이 말은 이사야 55장 6절에 나오는 경고이다. 만나는 태양으로 인해 뜨거워지면 사라졌으며 이것은 심판의 날이 이르면 그리스도께로 돌아서기에 때가 늦음을 암시하고 있다(말 4장). 만일 만나를 줍지 않으면 만나 위를 걸어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 얼마나 가혹한 처사인가!
우리는 계속해서 그를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물론 한 번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요 10:27-29). 그러나 우리의 순례여행에 대비하여 힘을 얻으려면 유대인들이 유월절 양을 먹었던 것처럼(출 12:1-) 그리스도로 양식을 삼는 일이 중요하다. 신자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는가? 그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한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일찍 일어나 말씀으로부터 영혼에 영양을 공급할 귀중한 만나를 모으도록 초청하고 계신다. 우리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저장해 두어서는 안된다(16-21절). 우리는 매일 새로운 날에 신선한 음식을 모아와야 한다. 성경에 표시를 하고 노트에 요약하지만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먹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다. “저장된 만나“는 벌레가 생겨 그들에게 양분이 되기는커녕 독이 된다.
그리스도이신 영적 만나는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내렸던 육적인 만나보다도 더많은 것을 성취함에 유의하자. 구약의 만나는 육체의 생명을 지탱했으나 그리스도는 그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영적인 생명을 주신다. 구약의 만나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었으나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게 자신을 제공하신다(요 6:51). 이스라엘을 위해 만나를 확보하는 데 모세는 아무 값을 치루지 않았으나 그리스도는 세상이 자신을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영접함으로 살기 위해 몸을 구부리는 대신 그리스도 위를 걸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매일 만나를 모으는 것은 이스라엘의 순종여부를 보시려는 하나님의 시험이었고(4절) 아직도 그는 자기 백성을 시험하신다. 성경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여 영적인 음식을 모으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믿고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슬픈 일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육적인 식성으로 굶주려 있다는 사실이다(3절). 목회자나 주일학교 교사에게 대신 만나를 모아다가 수저로 떠 먹여 달라는 사람도 많다. 우리가 영적으로 행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나의 날을 시작하기에 충분할 만큼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생각하는가 ?“를 시험해보는 것이다.
여호수아 5장 10-12절은 유대인들이 길갈에서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만나가 그쳤으며 “그 땅의 묵은 곡식“을 먹었다고 되어 있다. 만나는 위에서 내려왔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기형을 말하고 있다. 곡식은 장사되는 곳, 죽음의 장소를 벗어난 곳에서 자랐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천국에서의 사역을 말하고 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국의 유업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엡 1:3). 천국의 유업에 참여한다 함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천국의 제사장직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는 축복들을 붙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과 사역을 중시하여 “육신에 따라 그리스도를 알고“(고후 5:16)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천국의 제사장 직분에 참여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너무도 많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제사장 직에 참여할 때 그들은 “그 땅의 묵은 곡식“을 먹게 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다."
출 17:1-7
광야에서의 문제들-출애굽기 17-18장-
이스라엘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때에 여러 다른 경험들과 시련들에 봉착하게 되며, 이런 체험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것과 아울러 자신들을 보다 잘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되었다. 이 장들에서는 세 가지 이러한 경험들이 나온다.
1. 바위에서 솟는 물(17:1-7)
이 회중은 전에도 목이 말랐었는데(15:22)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해결해주셨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 백성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잊은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곳에 있다면 결국 그들을 돌볼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12절에서 우리에게 경고하는바, 백성은 모세를 비난하며 하나님께 불평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태도로써 사실상 “여호와를 시험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으며 돕지도 아니하신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평을 반복함으로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었다.
모세는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의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본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주님께 돌이켜 인도해 주실 것을 요청했다(약 1:5). 주님은 지팡이를 들어 바위를 치라고 모세에게 지시했으며 물이 나올 것을 약속하셨다. 이 바위는 그리스도이신데(고전 10:4 참조), 바위를 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말한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의 지팡이를 느끼셨다(이 지팡이는 뱀으로 변했던 그 지팡이였고-출 4:3 , 애굽에 재앙을 내리는데 도움을 준 지팡이인 것을 기억하라).
여기서는 일의 순서가 놀랍다. 16장에서는 만나가 나오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지상에 오심을 나타내며, 17장에서는 바위를 치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나타낸다. 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은 후에 주신 성령을 상징한다(요 7:37-38).
바위와 관계되는 두번째 경험에 대하여는 민수기 20장 1-13절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바위에게 물을 내라고 말하도록 모세에게 지시하셨으나, 그는 자기 뜻대로 바위를 쳤다. 이 일로 인해서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모세는 모형을 망쳐 놓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한 번만 죽을수 있기 때문이다(롬 6:9-10/히 9:26-28 참조). 성령은 단번에 주어졌다. 그러나 하나님께 구함으로써 부가적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 “두번째 축복들“과 성령의 “세례(침례)“를 구하는 사람들은 모세가 범한 것과 같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를 새로 못박는 것이며 이 죄는 모세로 하여금 축복의 장소 밖에 머물게 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은 이스라엘이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에서 마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내려침을 받은 반석이 광야를 통과할 때 유대인들과 함께 여행을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더러 있으나 이 설명이 바른 것 같지는 않다. “저희“(them)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전에는 없는 것으로, 이 문장은 그들이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는데 이 일은 만나를 주신 다음의 일이라는 뜻이다(10:3/출 16:1-)."
출 17:8-16
2. 대적과의 싸움(17:8-16)
새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축복인 동시에 하나의 전쟁인 것에 놀란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은 싸워야 할 필요가 없었다. 여호와께서 그들 대신 싸워 주셨기 때문이었다(13:17).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께서 적을 정복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통하여 싸우신다.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자손들로서(창 36:12/창 36:16) 육신으로 인한 방해를 보여 준다(창 25:29-34).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단번에 세상(애굽)에서 구원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께서 돌아 오실 때까지 언제나 육과 싸울 것이다.
성령을 상징하는 물이 주어진 후에 아말렉족속이 등장하는 것에 주목하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갈 5:17).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의 본성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죄악된 본성이므로 대립이나 대결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본성은 계속 싸우게 된다. 신명기 25장 17-19절은 아말렉이 “비열하게 공격“했고 뒷편에서 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적이 부지중에 다가온다.
이스라엘은 적을 어떻게 이겼는가? 그들에게는 산에 중재자가 있었고 골짜기에 사령관이 있었다! 산 위의 모세는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을 보여주며, 검을 가진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을 보여 준다(히 4:12/엡 6:17-18). 물론 모세는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에 대한 불완전한 모형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지치지도 않으시며 조력을 필요로 하시지도 않기 때문이다(히 4:16/히 9:24). 바울은 신자들이 “기도로 서로 도울 수 있다“고 말한다(고후 1:11). 아론과 훌이 한 것도 바로 이 일이다. 모세의 손에는 지팡이가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말한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적을 무찔렀으며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큰 승리로 세상을 이기신 것과 같다.
하나님의 백성이 육신을 이기고 승리를 얻는 데 있어 하나님과 협력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로마서 6장은 간주하는 것과 순복하는 것, 그리고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을 말해 준다. 모세 혼자서는 전쟁에 이길 수 없으며, 여호수아 역시혼자서는 전쟁터에서 승전할 수 없었다. 승리는 둘 다를 요구했다. 우리에게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고(롬 8:34), 우리를 위하시는 성령께서 내주하시며(롬 8:26), 그리고 손에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여호수아가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섬멸하지 않았음에 유의하자. 그는 그들을 파했을 뿐이다(13절). 이 생애 중에는 육을 멸하거나 “근절시킬“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에 우리에게 새 몸을 주실 것이다(빌 3:21). 육을 완전히 섬멸시키겠다는 약속은 14절에 나온다. 사무엘상 15장을 조사해 보면 사울의 죄는 아말렉을 끝까지 처치하기를 거절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사무엘하 1장 6-10절은 그를 죽인 사람이 그가 살려 두었던 아말렉 사람 중의 하나였음을 알려 준다. “육을 위해서는 대비를 하지 말자!“
“여호와닛시“(Jehovah-Nissi)는 “여호와는 우리의 깃발“이란 뜻이다. 우리가 승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요 16:33/요일 2:13-14/요일 5:4-5)."
출 18
3. 세상에서 온 지혜(18장)
이드로가 모세에게 준 충고가 주께로부터 온 것인가 육신에서 온 것인가에 대하여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 장이 미래의 왕국을 상징하며 이 때에 신부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이방인(이드로로 상징됨)이 이스라엘의 축복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며 그의 통치권을 함께 나누어 가지게 될 것은 분명하며 이것은 마치 부장들이 모세와 함께 통치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드로의 권면이 육신적인 것이며 주께로부터 온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 한 가지 이유는 민수기 11장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그의 영을 70장로들에게 부어 그 능력을 나누어 주었다. 이드로는 다분히 이기적으로 문제를 해석했다. “어찌하여 그대는 홀로 앉았고,“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이 말은 마치 베드로가 마태복음 16장 21절 이하에서 “주여, 자신을 불쌍히 여기사 십자가를 지지 마소서“라고 말한 것과 같게 여겨진다. 하나님은 3-4장에서 모세에게 그가 단독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은혜를 공급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이드로의 의견에 동의하고 하나님께 불평하였다. 11절에서 이드로는 여호와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다“고 시인하지만, 시인이란 진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정확히 고백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27절에서 이드로는 이스라엘과 함께 머물기를 거절하고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확실히,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그 조직에 있어 잘못된 것은 결코 없다. 그러나, 이드로에게서 온 “세상적인 지혜“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이드로 자신조차도 확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3절). 그는 여호와께서 하신 모든 일을 기뻐하였으나(9-10절) 하나님께서 모세를 도와 생의 일상적인 짐을 질 수 있게 하심을 믿으려 하지는 않았다. 모세는 이드로의 책략을 채택했고 백성들도 동의했다(신 1:9-18). 그러나 하나님이 이 조직을 인정하셨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사실상 민수기 11장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태도로 볼 때 그렇지 않음을 알수 있다.
아말렉이 공격해 오듯 공개적이고 분명한 육신의 공격이 있는 반면 또한 이드로의 경우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육신의 생각들도 있다.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라고 부르신 일을 무엇이나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은 곧 하나님의 가능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동정하여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고 느끼고 하나님이 너무 큰 짐을 지게 하셨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이사야 40장 31절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