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희망으로 기다림/ 누가복음 21:25-36
대림절 둘째 주일
대림절 둘째주일이 밝았습니다. 일주일간 기다려본 예수의 탄생은 우리 마음에 어떤 깨우침을 가져왔습니까? 이번 주간에는 <희망>이라는 주제로 대림절 묵상을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누가복음 21장은 종말과 재림에 관한 예수의 어록입니다. 얼핏 보면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 오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루살렘이 로마에게 완전 파괴당하던 AD 70년 상황이 그 속에 그대로 녹아있을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의 집필 시기로 보아서 이미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가 이런 말씀을 남긴 것은, 종말과 같이 험한 때가 오더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며, 이때를 오히려 구원이 오는 때,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다가오는 때인 것을 잊지 말라는 당부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예수가 탄생하는 것 역시 고통 중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기어코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원리>라는 책을 남긴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라는 독일의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not yet become)이라는 개념으로 희망이 없어 보이는 현재 속에 잠재된 미래의 가능성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은 지금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되어 가는 과정”으로 인식합니다. 거기에서 인간은 희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지난 달 설교에서 삭개오가 당한 배타성을 언급하며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영화를 소개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블로흐도 이 개념을 사용합니다. “구체적 유토피아”(Concrete Utopia)라고 말입니다. “구체적 유토피아”는 현재의 조건과 가능성을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고 실현한다는 의미입니다. 꿈을 꾸지만, 현실을 바탕으로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워줍니다. 허무맹랑한 이상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현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진통제”가 아니라, 현실을 바탕으로 미래를 찾아가는 희망의 종교라고 말하는 신학도 여기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는 예수의 “탄생비화”가 나옵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왔다고 말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방출신이기에 인정받지 못하는 헤롯은 심지어 지배자 로마가 임명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불안한데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는 말에 결국은 “베들레헴 전 지역 영아 학살령”을 포고합니다. 아기 예수를 못 죽였으니 실패한 명령이지만, 희생당한 아이들의 부모가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고 합니다. 헤롯은 자기의 아들 둘과 아내와 장모까지도 처형한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도시를 만들고 무역을 잘 해낸 공이 있다는 평가를 남겼지만, 적어도 성경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탄생은 이런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져온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대림절은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는 죽은 기념일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앞으로의 미래를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를 깊이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블로흐가 말한 대로 현실을 바탕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희망하는 절기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당하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희망을 간직하고 기도하면서 늘 깨어서 주님 앞에 다시 설 수 있게 되라는 주님의 당부는, 오늘 이 현실을 살면서 절망하지 않도록 깨우시는 주님의 말씀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대림절 둘째 주간도 <희망>으로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2024년 12월 8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