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디트
[유디트]의 모델은 아델레 블로흐 - 바우어(1882 ~ 1925) 이다. 부유한 금융인의 딸로서 자기보다
18살 연상인 금융 제조업자 페르디난드 블로흐와 결혼한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클림트는 다른 고개들과 달리
이례적으로 아델레의 초상을 두 번 제작해 주었는데, 그 작품들 외에 그녀를 유디트의 모델로도 활용했던 것이다.
아델레가 유디트를 위해 모델을 서 주었다는 것은 그림이 발표될 당시에도 빈의 웬만한 문화인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이야기였다. 낮은 계층 출신의 모델이 아니라 빈의 사교계 여성이 이와 같은 요부상을 위해 모델을
서 주었다는 것, 그것은 두 사람 사이가 보통 관계가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림에서 볼 수
있듯 아델레는 자신의 나체를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두 사람이 서로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1899년부터인데,
꽤 오랫동안 정부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같은 사실은 클림트와 관련된 다음의 오래된 두 가지
주장이 항상 사실인 것만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클림트가 관능적인 주제의 그림을 위해 낮은
게층 출신의 여성들만을 모델로 사용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그 계층의 직업모델들하고만 육체적
욕망을 나누고 상류층 여인들과는 정신적인 사랑만을 나누었다는 주장이다 문명 클림트는 상류층 혹은 사교계
여성들에 대해 마치 청소년기의 남자 아이들이 여자 일반에 대해 갖는 두려움 비슷한 것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그들과 육체적 욕망을 나누려 한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클림트 역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때에 따라 자신의 관행에서 '탈선'하기를 원했고, 또 '탈선' 할 수도 있었던 위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실제로 탈선한것일수도 있다. 아델레 블로흐 - 바우어의 정부관계로 보아서.
유디트는 이스라엘의 애국 여걸이다. 때는 구약시대 앗시리아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한 도시를 에워쌌다. 앗시리아의 장군은 당시 명망이 자자했던 홀로페르네스로 이스라엘은
항복을 고려할 지경이 되었고 이 때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나선 여장부가 바로 '유디트'였다. 부유하고 아름다운
미망인인 유디트는 어떤 남자라도 한 눈에 호릴만큼 매혹적으로 치장을 하고서는 거짓계책을 가지고 홀로페르네스를
찾아가 술에 거나하게 취한 그의 목을 베어 들고 도망쳤다. 다음날 아침 목이 없는 장군의 시체를 발견한
앗시리아 군대가 혼비백산해 그 자리에서 퇴각해 버렸다. 유디트의 기지가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해낸 것으로
민족을 구했다는 전해지고 있지만, 전해지고 있지만, "유디트서(書)"가 실제 사실이라기보다는
소설적 상상의 산물일 것이라고 하는데, 기원전 160-100년 전에 씌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유디트]의 두 작품에서는 풀린 듯한 그윽한
눈은 남자를 사로잡을수 있는 매력과 드러난가슴은 성적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왼쪽을 들고 있는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는 너무나 상반된 느낌을 주고 있다. 유디트의 표정에서 표현할수 없는 묘한 표정이 연상되며,
절망과 황홀, 부드러운 듯 하면서 왼손에는 시체의 목을 들고 있는 이중성... 왠지 모를 힘에 딸려가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적의 머리를 자른것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는 느낌을 클림트가 표현하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클림트의 이 작품 [유디트 Ⅱ]는 1901년에 완성된 [유디트 Ⅰ]과 같은 주제를 담은 그림이다. [유디트
Ⅰ]이 좀더 장식적인 화려함과 유디트의 아름다운 모습에 집중했다면, 이 그림의 색채와 인물은 전형적인 아르누보풍으로
표현되었다. 클림트 회화의 특징이라고 하면 인간의 사랑과 성, 죽음에 대한 주제를 다양하면서도 화려한 무늬로
이루어진 장식 모자이크로 표현했다는데 있다. 그는 19세기말 "유겐트 스틸 Jugent Stil"
이라고 불리는 "아르누보" 양식을 창출하면서 "빈분리파"의 거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유디트 Ⅰ]은 8년 뒤인 1909년 [유디트 Ⅱ]와 나란히 유디트를 주제로 그린 클림트의
대표적인 회화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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