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성경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오늘은 기독교가 정한 ‘성서주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치를 알고 성경을 더 존귀하게 여겨 사랑하고 성경을 전하고 잘 보존해나가자는 취지로 정한 기념주일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어떤 작은 책이라도 저자가 책을 기록할 때는 목적이 있습니다. 저자가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저술하듯이 오늘 예수님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인 사도 요한도 이 복음서를 기록한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바로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전하려고, 그래서 우리가 생명을 얻도록 하려고 기록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과 3년 동안 동행하면서 수없이 많은 표적들을 보았고 가르침을 들었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한 일들을 다 기록할 수 없어 그 많은 표적들 중에서 오직 몇 가지만 뽑아서 기록했습니다. 그 표적들만을 선택하여 고른 이유는 그것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변증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충분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31절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예수님이 행하신 다른 많은 표적이 수없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내가 몇 가지를 선택하여 기록한 것은’이라는 뜻입니다. 그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영생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딤후3:17에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는 사건 중심, 표적과 기사를 중심으로,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을 중심으로 기록했다면 요한복음은 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후에 나눈 대화를 상세히 기록한 점이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대화중심입니다. 대표적으로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대화, 나다나엘과 대화, 니고데모와 대화,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과 대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과 대화, 38년간 병자와 대화,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과 대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마르다와 대화, 부활 이후 도마와 대화,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대화 등등 사건 중심이기보다 대화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대화는 다른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나오는데, 예수님이 행한 큰 표적과 기사만으로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하려고 한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은 사건 전후에 나눈 대화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이 결국 예수님에게 어떠한 고백을 했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화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으니 이들이 남긴 결론만 보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장 34절에서 세례요한의 고백입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 때에 성령이 하늘로써 비둘기같이 임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만난 나다나엘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1:49입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했습니다.
2장의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표적을 보이셨는데 이에 대해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11절에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이 첫 표적인데,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장에서는 바리새인 니고데모와 나눈 대화인데 그에게 예수님은 복음의 가장 핵심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낸 목적, 예수님이 왜 세상에 오셨는지를 기록합니다.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심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어야 심판에 이르지 않고 구원받습니다. 니고데모와 이어지는 대화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빛이요 진리이심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온 분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이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랐다는 고백은 없습니다만 그의 행적이 그의 신앙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독촉할 때 니고데모가 이렇게 말합니다. 7장 50절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앞서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가서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지 아니하면 당신이 행하는 이러한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 연장선에서 예수님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변호한 것입니다.
그리고 니고데모의 행적이 한 번 더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19:39입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 그의 장례를 치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비록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입술로 고백한 것이 기록되어 있진 않더라고 이러한 행적들을 보면 그가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따랐는지를 충분히 알게 하지 않습니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성을 지나다가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이 여인은 숨기고 싶은 과거에 매여 살아가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더운 낮에 우물가에 갔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과 대화 중에 여인은 예수님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처음에는 10절에 예수님이 여인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하자 당신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자기 조상 야곱과 비교해서 그보다 조금 못한 분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다 자신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이 자신의 과거를 훤히 알고 있는 것을 보고 19절에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예배에 대한 대화를 하면서 예수님이 오실 메시야 곧 그리스도인 것을 말하자 이 여인이 물동이를 두고 마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4장 29절에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하고 이 여인의 말로 인해 그 동네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42절입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이 여인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야곱보다 크지 않다고 했다가 그 다음에는 선지자로 인정했다가 그 다음엔 세상에 오신 구주인줄 믿게 되었습니다.
5장에서는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치료받고 나서, 9장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뜨고 나서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음을 기록합니다. 11장에서는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을 통해서 마르다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요11:27입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리고 나사로 일로 인해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많이 믿고 따랐다고 기록합니다. 12장 10절입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예수님의 죽음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주장 때문입니다. 요19:7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주장하므로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이 처형할 죄명입니다.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라고 하자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금도 이 주장을 굽히지 않으므로 빌라도에게 넘겨 결국 처형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에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도무지 믿지 못한다고 주장할 때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때 도마도 고백합니다. 요20:28에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
도마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곧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바울도 롬9:5에서 같은 고백을 합니다.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여기서 그는 조상들의 혈통을 따라 온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사도바울도 도마처럼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아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아들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계시듯 아들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아들로 오신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보냄을 받고 오셨습니다. 아들 하나님은 보이지 않던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아들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 하셨고 나와 아버지는 동등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자신을 아버지라고 하거나, 아버지가 아들 되었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되고 아들이 아버지가 된다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인격이 각각 존재하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도 예수님을 사대 성인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예수 이름만이 구원의 이름인 줄 믿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이때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영생한다고 우리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처럼 영생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전하려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진리요 생명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대로 믿고 영생에 이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