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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우(安祐)는 어릴 때 자(字)가 발도(拔都)이고 탐진현(耽津縣) 사람이다. 김득배(金得培)는 상주(尙州) 사람이고, 이방실(李芳實)은 함안현(咸安縣) 사람이다.
안우는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에 군부판서 응양군상호군(軍簿判書 鷹揚軍上護軍)에 임명되었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와 참지중서정사(叅知中書政事)를 역임하였다. 김득배의 아버지 김록(金祿)은 벼슬이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에 이르렀다. 옛날에 상주의 향리인 김조(金祚)에게 딸이 있었는데, 이름이 김만궁(金萬宮)이었다. 7살 때 김조가 거란적[丹賊]을 피하여 백화성(白華城)으로 가다가 추격하는 군사가 가까이 오자 급한 나머지 김만궁을 길에 버렸다. 3일이 지나자 숲 속에서 발견되니 김만궁이 말하기를, “밤이 되면 무엇이 와서 안아주고 낮이 되면 가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자취를 따라가 보았더니 바로 호랑이였다. 장성하여 상주의 향리인 김일(金鎰)에게 시집가서 김록을 낳았다. 김득배는 과거에 합격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보임되었고, 여러 번 옮겨 전객부령(典客副令)에 임명되었다. 공민왕을 따라 원(元)에 들어가 숙위(宿衛)하였다가 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임명되었다.
〈공민왕〉 6년(1357)에 서북면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倭賊防禦都指揮使)가 되었다가 곧이어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서북면도순문사 겸 서경윤 상만호(西北面都巡問使 兼 西京尹 上萬戶)가 되었다. 이방실은 충목왕(忠穆王)을 따라 원에 들어가 시종한 공로가 있었는데, 왕이 즉위하자 중랑장(中郞將)에 보임되었다가 호군(護軍)으로 옮겼으며 토지 100결(結)을 하사받았다. 〈공민왕〉 3년(1354)에 대호군(大護軍)으로 전임되었다. 선성(宣城)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 노연상(魯連祥)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방실이 용주(龍州)의 군사를 이끌고 몰래 강을 건너 노연상의 집으로 바로 들어가 아버지와 아들을 찔러 죽이고 머리를 개경으로 보냈다. 〈공민왕〉 7년(1358)에 안우를 안주군민만호부만호(安州軍民萬戶府萬戶)로 삼고 김원봉(金元鳳)을 부만호(副萬戶)로 삼았으며, 경천흥(慶千興)을 서경군민만호부만호(西京軍民萬戶府萬戶)로 삼고 김득배를 부만호로 삼았으며 이방실을 편비(偏裨)로 삼았다. 행군하려하니 재추(宰樞)들이 도성의 성문 밖에서 환송회를 열었는데, 안우가 술에 취해 누워서 자는 바람에 해가 정오가 되어도 일어나지 않아 휘하 군사들이 실망하였다.
이듬해에 홍두적(紅頭賊)이 글을 보내기를, “민[生民]이 오랫동안 오랑캐에게 지배당한 것을 개탄하여 정의로운 군사를 일으키고 중원(中原)을 회복하니, 동쪽은 제(齊)·노(魯)의 땅을 넘고 서쪽은 함진(函秦)까지 나갔으며, 남쪽은 민광(閩廣)을 지나고 북쪽은 유연(幽燕)에 이르렀다. 모든 사람들이 정성껏 귀부하니 마치 굶주린 사람들이 살진 고기와 좋은 곡식[膏粱]을 얻고 병든 자들이 약과 침을 얻은 것 같았다. 이제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사졸들을 엄격하게 다스려 민(民)을 괴롭히지 않도록 하였다. 민으로 귀화하는 사람들은 어루만질 것이나 고집부리며 어리석게 항거하는 사람들은 처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적의 우두머리인 가짜 평장(平章) 모거경(毛居敬) 등은 〈자신들의〉 무리를 40,000명이라고 말하면서 얼어붙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의주(義州)를 함락시키고 부사(副使) 주영세(朱永世)와 주민(州民) 1,000여 명을 죽였다. 또 정주(靜州)와 인주(麟州)를 함락하여 도지휘사(都指揮使) 김원봉(金元鳳)을 죽이고 마침내 인주에 웅거하였다. 안우가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니 적이 무너져 달아났다. 〈안우가〉 추격하여 30여 명의 목을 베자 적이 철주(鐵州)로 들어갔다. 안우가 기병 70여 기를 거느리고 전장으로 가다가 산에 올라 말을 쉬게 하였는데, 갑자기 적의 우두머리 모귀양(毛貴揚)의 군사가 쏟아져 나왔다. 장졸들이 모두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였으나 안우는 태연자약하게 웃고 이야기하면서 대·소변과 세수·양치질을 마쳤다. 조용히 말에 올라 군사를 이끌고 바로 전진하여 청천강(淸川江)을 끼고 진(陣)을 쳤다. 적의 기병 몇 명이 다리에 올라 창을 휘두르면서 용맹을 자랑하자 병마판관(兵馬判官) 정찬(丁贊)이 칼을 휘두르고 크게 소리치면서 먼저 다리에 올라 적장 1명을 베었더니 적이 조금 물러섰다. 안우가 이방실, 장군(將軍) 이음(李蔭)·이인우(李仁祐) 등과 함께 분전하여 적을 크게 깨뜨리니 적이 인주·정주 등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일이 보고되자 왕이 사신을 보내어 안우에게 금대(金帶)를 하사하였다.
선주(宣州) 관내 현(縣)의 민들이 적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흩어지니 적이 병력 1,000여 명을 보내어 그 〈마을의〉 곡식들을 약탈하였다. 안우와 김득배가 보병과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쫓았는데, 적은 곡식을 짊어지고 있어서 달아날 수 없었다. 추격하여 적의 주둔지에 이르렀더니 적이 정예병을 총동원하여 반격하였다. 안우 등이 패하여 천호(千戶) 오중흥(吳仲興)과 장군 이인우는 전사하였고 군사와 말을 많이 잃었다. 퇴각하여 정주(定州)에 주둔하니 적이 마침내 서경(西京)을 함락하였다.
또 이듬해에 이방실이 적을 철화(鐵化)에서 만나 1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여러 군사가 생양역(生陽驛)에 주둔하니 총 20,000명이었는데, 당시 날씨가 추워서 군사들의 손발이 얼어 터져 쓰러진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적은 우리 군사들이 장차 싸우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죽이니 10,000명을 헤아렸고 시체가 언덕처럼 쌓였다. 우리 군사들이 보병을 앞세워 서경을 공격하니 짓밟혀 죽은 자가 1,000여 명이었고, 적의 전사자도 무려 수 천 명이나 되었다. 적이 물러나 용강(龍岡)과 함종(咸從)에 주둔하였다. 왕이 안우를 안주군민만호부도만호(安州軍民萬戶府都萬戶)로 삼고 이방실을 상만호(上萬戶)로 삼았으며 김어진(金於珍)을 부만호(副萬戶)로 삼았다. 안우 등이 함종으로 진군하였으나 적이 우리 군사가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서 돌격하여 우리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적이 정예 기병으로 쫓아오니 안우·이방실·김어진·대장군(大將軍) 이순(李珣) 등이 뒤에서 그들을 막아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마침 동북면천호(東北面千戶) 정신계(丁臣桂)가 군사 1,000명을 이끌고 와서 적과 죽기로 싸워 수십 명의 머리를 베니 적이 50리쯤 쫓아오다가 그만두었다. 우리 보병들 중에 산으로 올라가서 죽음과 노략질을 면한 자들도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적 400여 명이 숙주(肅州)의 산골짜기에 주둔하였다가 자신들의 무리가 서경에서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의주로 서둘러 되돌아갔다. 중랑장(中郞將) 유당(柳塘)과 낭장(郞將) 김경(金景)이 의주에서 성문(城門)을 수리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의주천호 장륜(張倫)을 불러 용주 등지에 있는 군사들을 동원하여 그들을 공격하였다. 적이 정주성으로 들어갔으나 유당 등이 진격하여 그들을 섬멸하였다. 우리 군사들 또한 함종에서 싸우다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신부(辛富)와 장군 이견(李堅)이 전사하였다. 여러 군사들이 힘을 다하여 싸우니 적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목책 안으로 들어가 지켰다. 우리 보병들이 목책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공격하였고 기병은 목책 주위를 둘러싸면서 화살을 마구 쏘아 20,000여 급을 죽였으며, 가짜 원수(元帥) 심자(沈刺)와 황지선(黃志善)을 사로잡았다. 적이 증산현(甑山縣)으로 물러나서 지키자 이방실이 정예 기병 1,000기로 연주강(延州江)까지 추격하였으며, 안우·김득배·김어진 역시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잇달아 도착하였다. 적이 궁지에 몰려 강을 건너다가 얼음에 빠져 죽은 사람이 거의 수 천 명이나 되었다. 적이 언덕에 올라 대오를 이루고 저항할 태세를 갖추니 우리 군사들은 궁지에 몰린 도적들이 죽기로 싸울까 의심하여 군사를 거두고 쫓지 않았다. 이날 밤에 적이 달아나니 이방실은 이른 아침에 〈군사들에게〉 밥을 먹이고 그들을 추격하였다. 적의 무리들이 굶주리고 지쳐서 안주(安州)와 철주의 몇 고을 사이에서 죽는 자가 줄줄이 이어졌다. 이방실이 추격하여 옛 선주 땅에 이르러 날쌘 기병으로 그들을 쫓아 수백 명을 죽이자 적이 죽기로 싸웠다. 이방실은 사람과 말이 많이 지치자 군사를 거두고 〈공격을〉 멈추었다. 나머지 적 300여 명이 하루 밤낮 동안 의주에 이르러 압록강을 건너 달아나니 이방실과 안우 등이 쫓다가 미치지 못하여 돌아왔다. 안우 등이 처음 압록강으로부터 서경에 이르고 또 함종으로부터 압록강에 오가면서 무릇 9번을 싸웠다. 안우와 김득배가 경천흥(慶千興)과 함께 이순(李珣)과 김인언(金仁彦)을 보내어 승첩을 보고하니 왕이 노고를 위로하고 소환하였다. 이성만호(泥城萬戶) 김진(金璡)에게 명령하여 압록강의 여름철 방비[夏防]를 지키게 하였다.
안우(安祐) 등이 장계를 올려 하례하기를, “홍건적이 침입하여 매처럼 사납고 이리같이 탐욕스러우니 비록 흰 호랑이[白額]가 앞을 막더라도 여우처럼 약삭빠르고 토끼같이 교활하여 욕심을 부리면 반드시 얻었습니다. 〈홍건적은〉 험준한 요새라고 하더라도 맞닥뜨리면 도륙하지 않음이 없었고 사나운 불꽃처럼 모두 불살랐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기만 해도 간담이 무너지고 악취가 풍겨오는 듯해서 움직일 때마다 마음이 슬펐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태평을 누린 민(民)으로서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덤비는 적을 당해내기는 참으로 역시 어려웠습니다. 청천강(淸川江)과 안주(安州) 싸움에서 불리했던 것은 비록 신들이 부족한 탓이었습니다만, 서경(西京)과 함종(咸從) 전투에서 공(功)을 세운 것은 사직(社稷)에 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들판에 쌓인 시체가 수만이었고 관문과 나루터로 돌격한 기병(騎兵)이 1,000명을 넘었습니다. 그 흉악한 괴수를 놓쳐 한이 남습니다만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한 자가 많았으니, 그들이 궁지에 몰렸음은 물을 것도 없습니다. 또한 남편과 부인이 서로 목을 찔러 죽은 자가 반이나 되었으니 꾀한 바가 이미 다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다시 우리나라에 〈침입할〉 뜻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비록 그렇다고 하지만 적들 중에는 활과 말에 능숙한 자가 매우 많은데,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근년 사이에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만일 선성(宣城)에 있는 무리들의 싹을 미리 잘라버리지 않으면 분명히 다시 장래의 우환이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 등이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고생하고 죽음의 치욕에 내버려진 것을 염려하시어 개선하겠다는 보고를 윤허하시고 명령을 내려 소환하시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가슴을 적셨고 용안(龍顔)을 뵈올 기쁨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변방의 일은 모두 여름철 방비[夏防]에 돌렸습니다만, 이 지역의 형편을 돌아보건대 몇 해를 지나야 숨을 돌릴 것이니 지게미와 쌀겨를 얻어 입에 풀칠하는 것 또한 오히려 다행한 일입니다. 술과 고기를 민에게 요구하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니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왕래하면 아침저녁의 죽과 밥을 제외하고 술자리의 비용은 일체 금지하십시오. 변방의 역관(驛館)은 도로의 가장자리에 있어서 역리[騶吏]가 주현(州縣)에서 출발하면 고을과 역의 거리가 가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리고 물자 공급과 인원 교대도 거의 한 달이 걸립니다. 안주 이남을 제외한 가주(嘉州)·정주(定州)·수주(隨州)·곽주(郭州)·선주(宣州)·철주(鐵州)·용주(龍州)·인주(麟州)의 사람들은 마땅히 본주(本州)에서 나오지 않은 채 빈객을 대접하게 하고 당분간 그곳의 역관을 폐지하십시오. 인민들 가운데 부득이 오랑캐에게 노예처럼 욕을 당하거나 군관(軍官)들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산으로 도망하여 숨은 것은 형세가 구차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힘이 넉넉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고의로 도모한 자들을 제외하고 마땅히 먼저 그 허물을 헤아리고 이를 용서하신다면, 은혜와 위엄을 함께 행사하시어 어긋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평민(平民)·노비(奴婢)·양가자손(良家子孫)·장사(將士)들 중에 스스로 공로를 세우려다가 혹 포로가 된 자가 있습니다. 주장(主將)이 비록 명령을 내렸더라도 어찌 매우 급하게 추궁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인 아이와 남녀를 제외한 사람들은 또한 마땅히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세심하게 살피게 하여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가게 하십시오. 신 등은 예전부터 전투를 치르면서 간간이 건의해야 할 일들이 있었지만, 이번 달 초하루에 군영을 떠나 조정으로 가게 되어 삼가 장계를 받들어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답하여 말하기를, “궁지에 몰린 도적이 와서 벌과 전갈처럼 독(毒)을 함부로 뿜었으나 의로운 병사가 가는 곳마다 평정하였으니 위엄이 어찌 우레와 천둥뿐이겠는가? 개선을 아뢰고 돌아오면서 장계를 올려 하례하니 가상하구나.”라고 하였다. 군사들이 개선하자 장사(將士)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고 안우에게 추충절의정난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김득배는 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 정당문학(政堂文學), 이방실은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임명하였다.
홍건적의 배 70척이 또 서해도(西海道)를 침략하자 이방실을 보내어 풍주(豐州)에서 격퇴하여 30여 명의 목을 베니 적이 배를 타고 도망쳤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이방실에게 옥대(玉帶)와 옥영(玉纓)을 하사하였다. 공주(公主)가 말하기를, “어찌 귀중한 보물을 아끼지 않고 가벼이 남에게 주십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우리의 종묘사직이 병란으로 폐허가 되지 않게 하고 백성들이 어육(魚肉)이 되지 않은 것은 모두 이방실의 공로입니다. 내가 비록 살을 베어 주더라도 오히려 보답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이까짓 물건 따위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紅賊]의 가짜 평장(平章)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가 용봉(龍鳳)을 연호로 삼고 무리 20만 명을 거느리고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삭주(朔州)와 이성(泥城)을 침략하니 안우(安祐)를 상원수(上元帥), 김득배(金得培)를 도병마사(都兵馬使), 이방실(李芳實)을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삼았다. 지숙주(知肅州) 강려(康呂)가 민가[民戶]를 불태우고 도망치자 적이 무주(撫州)에 주둔하였다. 이방실이 적은 많고 아군은 적으니 군사를 멈추게 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은주(殷州)·순주(順州)·성주(成州) 3주와 양암현(陽岩縣)·수덕현(樹德縣)·강동현(江東縣)·삼등현(三登縣)·상원현(祥原縣) 5현의 민(民)과 곡식을 절령책(岊領柵)으로 옮기도록 요청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 이방실이 판사농사(判司農事) 조천주(趙天柱)·좌승(左丞) 유계조(柳繼祖)·대장군(大將軍) 최준(崔準) 등을 보내어 적을 박주(博州)에서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예부상서(禮部尙書) 이순(李珣)은 태주(泰州)에서 〈적을〉 맞아 공격하여 7명의 목을 베었다. 이방실은 지휘사(指揮使) 김경제(金景磾)와 함께 개주(价州)에 가서 공격하여 15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안우가 조천주·정리(鄭履)·장신보(張臣輔)·이원계(李元桂)·홍선(洪瑄)·정선(鄭詵) 등을 보내어 보병과 기병 400명을 거느리고 박주에 진격하게 하여 1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방실이 또 1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연주(延州)로 진격하여 2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안우가 여러 부대를 거느리고 안주(安州)로 나아가 주둔하여 승첩을 올리기를,
“정찬(丁贊)·왕안덕(王安德)·김인언(金仁彦)·허자린(許子麟)·박수년(朴壽年)·김기(金琦)·정원보(鄭元甫)·유지철(兪之哲)·변안렬(邊安烈)·권장수(權長壽)·조린(趙麟)·조인벽(趙仁璧) 등이 모두 힘써 싸워 공로가 있으니 상을 주어서 사기를 진작시키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안우에게 명령하여 도원수(都元帥)로 삼고 말하기를, “변방의 일은 장군이 다스릴 것이니, 그대는 명령을 듣는 자에게 상을 주고 명령을 듣지 않는 자는 벌을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적이 안주를 습격하니 아군이 패배하였고 상장군(上將軍) 이음(李蔭)과 조천주가 죽었다. 적이 김경제를 사로잡아 그들의 원수(元帥)로 삼고 글을 보내기를, “군사 1,100,000명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갈 것이니 속히 맞이하고 항복하라.”고 하였다. 왕이 밀직제학(密直提學) 정사도(鄭思道)와 김규(金㺩)를 보내어 절령책(岊嶺柵)을 지키게 하였다. 적이 밤에 군사 10,000여 명을 책 근방에 매복시켰다가 닭이 울자 철기(鐵騎) 5,000명으로 책문을 공격하여 부수니, 우리 군사들이 크게 무너지고 안우와 김득배 등은 단기로 도망쳐 돌아왔다. 안우가 가서 군사들을 수습하여 총병관(總兵官) 김용(金鏞) 등과 함께 금교역(金郊驛)에 주둔하였다.
김용이 좌상시(左常侍) 최영(崔瑩)을 보내어 경병(京兵)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왕이 사태가 위급함을 알고 마침내 피난하기로 작정하여 경성(京城)의 부녀자와 노약자들을 먼저 성을 나가게 하니 민심이 흉흉해졌다. 적의 선봉이 흥의역(興義驛)에 이르자 왕과 공주가 장차 남행(南行)하려고 하였다. 김용·안우·이방실 등이 달려와서 경성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며, 최영이 더욱 통분하여 크게 소리쳐 말하기를, “원컨대 주상께서 잠시 머물면서 장정들을 모집하여 종묘사직을 지켜야합니다.”라고 하니 재신(宰臣)들이 서로 돌아보며 말이 없었다. 어가가 민천사(旻天寺)에 행차하여 근신(近臣)들을 큰 네거리로 보내어 의병(義兵)을 크게 불러 모았으나, 도성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응하는 자가 겨우 몇 사람이었다. 안우 등이 어쩔 수 없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 등이 여기에 남아 적을 막을 것이니 왕께서는 떠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마침내 남행하려고 숭인문(崇仁門)으로 나가자 늙은이와 어린아이가 자빠지고 엎어지며, 자식과 어미가 서로 헤어져 짓밟힌 자들이 들에 가득 찼고 통곡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그 후 며칠 만에 적이 경성을 함락하여 수개월 동안 주둔하였다. 〈적은〉 소와 말을 죽여 가죽을 펴서 성(城)에다 두르고 물을 부어 얼게 만들어 사람들이 타고 오를 수 없게 하였다. 또 남녀를 붙잡아 불태워 죽이고 혹은 임신한 여자의 젖을 구워 먹으며 잔학한 짓을 자행하였다. 〈이에〉 왕이 복주(福州)에 있으면서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아 모든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공민왕〉 11년(1362)에 안우·이방실·김득배·황상(黃裳)·한방신(韓方信)·이여경(李餘慶)·안우경(安遇慶)·이구수(李龜壽)·최영이 군사 200,000명을 거느리고 〈개경〉 동교(東郊)의 천수사(天壽寺) 앞에 주둔하였다. 정세운이 명령을 내려 진군하게 하니 여러 장수들이 경성을 포위하였으며, 정세운은 도솔원(兜率院)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그때 마침 비와 눈이 내려 적의 방비가 해이해졌다. 이여경이 숭인문을 담당하였는데 휘하의 호군(護軍) 권희(權禧)가 이를 정탐하여 알아채고 말하기를, “적의 정예가 모두 여기에 모였으니 나가서 불시에 공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권희가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달려 들어가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맹렬하게 공격하자 적들이 놀라 두려워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이를 틈타 사방에서 급습하였는데, 우리 태조(太祖)는 휘하의 친병(親兵) 2,000명으로 먼저 올라가 크게 깨뜨렸다. 해질 무렵에 적의 괴수 사유(沙劉)와 관선생(關先生) 등을 베니, 적의 무리들이 서로 밟고 쓰러져 엎어진 시체가 성에 가득하였다. 베어낸 머리가 무려 100,000여 명이었고 원(元) 황제의 옥새(玉璽) 2개, 금보(金寶) 1개, 옥인(玉印) 3개, 금·은·동인(金·銀·銅印), 금은(金銀) 그릇, 패면(牌面) 등의 물품을 노획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함께 말하기를, “궁지에 몰린 도적을 모두 죽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이에 숭인문과 탄현문(炭峴門) 두 문을 열어주니 잔당 파두반(破頭潘) 등 100,000여 명이 달아나 압록강을 건너갔으므로 적이 마침내 평정되었다. 성을 공격하던 날에 적이 비록 궁지에 몰려 위축되었으나 보루를 쌓고 굳게 지켰으므로 여러 군사들이 진격하여 포위망을 좁혀들어 갔다. 태조가 길 가의 민가에 머물고 있었는데, 밤중에 적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려고 하였다. 태조가 달려가 동문(東門)에 이르니 적군과 아군이 문을 다투어 혼잡하였으므로 나갈 수가 없었다. 뒤에서 오는 적이 있어서 창으로 태조의 오른쪽 귀 뒤를 찔러 형세가 위급해졌다. 태조가 칼을 뽑아 앞에 있는 7~8명을 치고 말을 몰아 성을 뛰어 넘었는데도 말이 넘어지지 않자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김용(金鏞)은 평소에 정세운(鄭世雲)과 함께 왕의 총애를 다투었고, 또 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芳實) 등이 큰 공을 이루어 왕이 중하게 여길까 염려하여 안우 등으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이로 인하여 죄를 씌워 모두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거짓 왕명으로 글을 만들어 그의 조카인 전 공부상서(工部尙書) 김림(金琳)을 시켜 몰래 안우 등을 설득하여 정세운을 도모하게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정세운이 평소에 경등을 시기하여 적을 격파한 뒤에는 반드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찌 먼저 도모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안우와 이방실이 김득배의 군막으로 가서 말하기를, “지금 정세운이 적을 겁내어 진격하지 않고 김용의 글도 이와 같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김득배가 말하기를, “이제 겨우 적을 평정하였는데, 어찌 우리들끼리 서로 베어 죽이겠습니까? 옛날에 양저(攘苴)는 장가(莊賈)를 함부로 죽였으나 위청(衛靑)이 소건(蘇建)을 죽이지 않았던 일은 고금의 귀감이니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부득이하면 잡아서 대궐로 보내어 주상의 처결을 듣는 것이 역시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안우와 이방실이 물러갔다가 밤에 다시 와서 말하기를, “정세운을 죽이라고 한 것은 임금의 명령입니다. 우리들이 공로를 세웠다고 하더라도 왕명을 받들지 않으면 그 후환을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득배가 굳이 할 수 없다고 하니 안우 등이 강요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사람을 시켜 정세운을 부르게 하였다. 그가 도착하자 안우 등이 장사(壯士)에게 눈짓하여 앉은 자리에서 그를 쳐 죽이게 하였다.
왕이 변고를 듣고 직문하(直門下) 김진(金瑱)을 보내어 사면을 반포하고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행재소(行在所)로 오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이윽고 복주(福州)의 수령 박지영(朴之英)이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이방실이 홀로 정세운을 죽였고 안우(安祐) 등도 역시 해를 입었습니다.”라고 하니, 왕은 다른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곧 김진을 소환하고 장차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을 토벌하려고 하였다. 판사(判事) 김현(金賢)과 상장군(上將軍) 홍사우(洪師禹)가 와서 여러 장수들이 정세운에 대해 논의한 글을 올렸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김현에게 금(金)·은(銀)·포백(布帛)을 하사하고 다시 김진을 보내어 사면을 반포하였다. 박지영을 불러 꾸짖기를, “네가 어찌 망령된 말을 하였느냐? 내가 너의 연로함을 생각하여 법에 따라 처리하지 않고 다만 파직하여 향리(鄕里)로 돌아가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또 지주사(知奏事) 원송수(元松壽)를 보내어 여러 장수들에게 의복과 술을 하사하였다. 안우가 함창현(咸昌縣)에 이르니 왕이 대신 가운데 꾀가 있는 사람을 택하여 가서 맞이하게 하고 비상시를 대비하여 시중(侍中) 유탁(柳濯)을 보냈다. 유탁이 가서 꿇어앉아 술을 올리고 원수(元帥)가 서서 마시기를 청하였으나 안우가 감히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탁이 말하기를, “지금 공께서 삼한(三韓)을 수습하여 회복하였으니 내가 감히 작위(爵位)를 마음 쓰겠습니까? 한 잔을 올린 후에 어찌 다시 서서 마시기를 청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튿날 안우가 개선하여 행궁(行宮)으로 나아가 주상을 알현하려고 하는데, 김용이 목인길(睦仁吉)을 시켜 중문(中門)으로 인도하게 하고 문지기에게 그의 머리를 내리치게 하였다. 안우가 말과 얼굴색이 변하지 않고 3번이나 차고 있던 주머니를 두드리면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조금만 늦추어라. 주상 앞에 가서 주머니 속의 글을 올리고 죽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다.
왕이 미처 듣지 못한 사이에 내리친 자가 다시 쳐서 죽이고 뜰로 끌어 내렸다. 왕은 그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교지(敎旨)를 내리기를, “너희들은 함부로 정세운을 죽여 몸과 머리를 떨어뜨려 놓았으나 지금 너희들을 목 베지 않는 것은 큰 공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주머니 속의 글은 곧 김용이 안우 등을 속여 정세운을 죽이라고 한 글이었다. 김용은 김림이 그의 음모를 누설할까 두려워하여 먼저 그를 목 베고 마침내 왕에게 아뢰기를, “안우 등이 함부로 지휘관을 죽인 것은 바로 전하를 무시한 것이니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안우가 죽고 그의 어린 아들이 헐벗은 채로 길가에 버려졌다는 말을 듣고는 불쌍히 여겨 궁궐로 불러 머물게 했다가 돌아갈 곳을 수소문하여 보내주었다. 〈안우의〉 휘하 군사들이 놀라 동요하자 왕이 불러 술과 음식을 하사하여 위로하였다.
김용(金鏞)이 홍언박(洪彦博)·유탁(柳濯)·염제신(廉悌臣)·이암(李岩)·윤환(尹桓)·황상(黃裳)·이춘부(李春富)·김희조(金希祖)와 함께 교지(敎旨)를 받들어 방문(榜文)을 걸기를, “안우(安祐) 등이 불충하여 정세운을 함부로 죽였다. 안우는 이미 처형당하였으니 김득배(金得培)와 이방실(李芳實)을 잡는 사람은 3등급을 올려 임명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장군(大將軍) 오인택(吳仁澤), 어사중승(御史中丞) 정지상(鄭之祥), 만호(萬戶) 박춘(朴椿)과 김유(金庾) 등을 나누어 보내 그들을 잡게 하였다. 이날 이방실이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면서 용궁현(龍宮縣)에 이르자 왕은 이방실의 장인인 우산기(右散騎) 신순(辛珣)과 안렴(按廉) 성원규(成元揆)에게 가서 맞이하게 하였다. 박춘이 도착하여 교지를 가지고 왔다고 하자 이방실이 뜰로 내려와서 꿇어앉았다. 오인택이 칼을 빼어 내리치니 바로 엎어져 기절하였다가 조금 후에 다시 깨어나서 담을 넘어 달아났다. 박춘이 쫓아가 그를 잡으려고 하니 이방실이 박춘의 칼을 뺏으려고 하였는데, 정지상 등이 뒤따라와 그를 쳐서 죽였다. 김득배는 기주(基州)에 이르러 변고를 듣고 기병 몇 명을 거느리고 도망쳐 산양현(山陽縣)의 선영(先瑩) 곁에 숨었다. 그의 아우 김득제(金得齊)를 화산(花山)으로 유배 보내고 김득배의 아내와 자식을 잡아 가두고 국문하였다. 그의 사위인 직강(直講) 조운흘(趙云仡)이 장모에게 말하기를, “바른대로 말하여 고초당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니 장모가 오랫동안 참다가 마침내 고백하였다. 이에 김유·박춘·정지상·성원규 등이 김득배를 체포하여 목을 벤 뒤에 상주(尙州)에서 효수(梟首)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가 51살이었는데, 보는 자들이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득배의 문생(門生)인 직한림(直翰林) 정몽주(鄭夢周)가 왕에게 청하여 시체를 수습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지내기를, “아아 하늘이시여! 나의 죄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아 하늘이시여!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듣건대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은 하늘이요,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사람입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이치는 하나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기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긴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이치이며,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는 것 또한 무슨 이치입니까? 지난날에 홍건적이 난입하자 〈주상께서〉 어가를 타고 피난가시니 나라의 운명이 마치 실에 매달린 듯이 위태로웠습니다. 오직 공께서 앞장서 대의(大義)를 부르짖으시니 온 나라가 호응하였고, 몸소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삼한(三韓)의 대업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무릇 지금 사람들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잘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누구의 공로입니까? 비록 죄가 있더라도 공로로 덮어주어야 옳습니다. 죄가 공보다 무겁더라도 반드시 죄를 자복시킨 뒤에 처형해야 옳습니다. 어찌하여 전쟁터에서 흘린 땀[汗馬]이 마르지 않았고 개선하는 노래도 그치지 않았는데, 마침내 태산 같은 공로를 도리어 칼날의 피가 되게 하였습니까? 이것이 내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에게 묻는 것입니다. 나는 그의 충성스럽고 장한 혼백이 천추만세토록 반드시 구천(九泉)의 지하에서 눈물을 삼킬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아! 운명이란 것이 어찌 이러합니까? 어찌 이러합니까?”라고 하였다. 이방실의 아들은 이중문(李中文)이다. 안우의 아들은 겨우 10여 살이었는데, 저잣거리에서 놀고 있으면 사람들이 다투어 먹을 것을 주면서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이 편안히 먹고 잘 수 있는 것은 세 원수(元帥)의 공이다.”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