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1요한 2,5)
교회는 오늘 교회의 위대한 학자이자 가톨릭 교리의 기초를 완성한 성인 아우구스티노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축일 하루 전인 어제 8월 27일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 성녀 모니카 축일입니다. 어제 교회가 기억한 성녀 모니카의 아들로서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과 이단 종교인 마니교에 빠져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길을 걸은 아우구스티노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신심으로 회개하여 사제가 되었으며 주교 암브로시오의 뒤를 이어 히뽀의 주교로 활동한 그는 이성의 탁월한 능력을 통해 교회의 교리적 기초를 완성한 성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를 기억하는 오늘, 어제 복음 말씀에 이어 오늘 복음 말씀 안에서도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을 비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 23,27)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불행을 선포하는 말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그들에 대한 비판의 말씀은 어제 말씀보다 그 비판의 수위가 더 높습니다. 겉꾸밈의 허위의 삶의 모습을 잔에 비유한 이전의 말씀에 비해 오늘 복음에서는 그들의 모습을 회칠한 무덤 그리고 예언자들을 살해한 이들이라는 더욱 과격한 표현들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마태 27,27ㄴ.31)
회칠한 무덤으로 비유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겉꾸밈의 삶.
그들의 이 같은 모습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판하시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회를 칠해 깔끔하고 보기에 좋지만 정작 그 안은 죽음의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찬 모습. 회칠한 무덤이라는 이 비유를 오늘날 현대식으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화려한 네온 싸인으로 장식된 옥외광고판 정도로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화려한 도시를 장식하는 많은 것 중에 하나가 도심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옥외 광고판이 있습니다. 색색의 네온싸인과 화려한 장식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과 잘생긴 남자 모델을 등장시켜 세상 누구나 그들이 광고하는 그것을 사고 싶고 소유하고 싶도록 유혹하는 광고판. 광고판에 등장하는 그 모든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고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아름답고 멋지게 보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그것을 보며 마치 홀린 듯 광고판이 드러내는 그 물건을 갖고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정작 세상 무엇보다 멋져 보이는 그 광고판의 속으로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빛과 그림자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환한 빛을 스크린 뒤에서 쏘아대고 스크린에 그려진 그림에 빛이 비추면 빛과 그림자로 하나의 이미지가 존재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빛이 만들어내는 허상의 존재로서의 이미지, 광고판에는 그 이미지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그것이란 다름 아닌 하나의 허상의 이미지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제 오늘에 이어 복음을 통틀어 가장 강한 수위로 행복이 아닌 불행을 빌어 주며 타인을 비판하는 유일한 모습을 보여주는 복음의 이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광고판과 같은 허상의 삶의 모습,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비롯됩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정작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는 아니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닌 온갖 더러운 것들로 악취를 풍기는 그들의 삶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신랄하게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어제 독서의 말씀에 이어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어떻게 수행해 나가는지를 이야기하면 그 수행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테살로니카 교회 공동체 모든 이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합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지시합니다.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을 따르지 않는 형제는 누구든지 멀리하십시오.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2테살 3,6-9)
바오로는 어제 독서 말씀에 이어 전통을 중시하며 절제 있는 삶을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 전통을 무시하며 무분별하게 사는 삶, 일하지 않고 먹을 것을 찾는 무위도식한 삶을 멀리하고 땀 흘려 일하며 자신이 먹을 것을 자신이 찾아 사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듯 보이는 이 말이 실상 우리 삶 안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현실이 바오로가 이 말을 당부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내가 땀흘려 일하지 않고서 그 결과만을 원할 때가 너무도 많고,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하대하고 모욕할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일하지 않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 드는 우를 범하는 우리들에게 바오로는 자신의 삶의 가장 기본적인 일에 충실할 때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 안에서 축복을 얻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삶의 당연한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복음의 말씀에 표현을 빌어 이야기해본다면 남들에게 보이는 외적인 모습, 곧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신경 쓰며 정작 내 내면의 참된 가치는 도외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내 삶의 가장 밑바닥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충실하라는 말씀으로 표현될 있습니다. 그 같은 면에서 삶의 기본에 충실치 못한 모습, 가장 기본적인 것, 전통을 도외시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비판하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회칠한 무덤과 같은 모습, 옥외광고판과 같이 허상뿐인 이미지로서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면에서 지금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어떠십니까?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정작 실상으로는 빛과 그림자의 이미지로서만 존재하는 허상의 존재에 집착하고 살고 있지는 않으신지, 속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악취가 진동하면서도 외적인 모습에만 집착해 악취를 막기 위해 자신의 삶에 회칠을 하고 계시지는 않으신지 오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생명의 샘이며 참 빛으로 우리의 눈을 제대로 뜨게 하여 사물을 온전히 바라보게 하는 빛은 하느님 그 분에게 있습니다. 참 생명의 샘이며 우리의 눈을 바로 보게 하는 빛이신 그 분을 찾으려 노력하십시오. 하느님 그 분만이 우리 삶의 참된 이유가 되어주시며 허상이 아닌 본질을 찾게 해 주시는 하느님 안에서 여러분의 삶이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 삶 그 자체로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언제나 기도하겠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1요한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