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6,6).
제3절 기도의 길잡이
수많은 증인들
2683우리보다 앞서 하늘 나라에 들어간 증인들,특별히 교회가 ‘성인’으로 인정하는 이들은 그들의 모범적인 삶과,전해 오는 그들의 글, 그리고 그들의 기도를 통해서 오늘도 살아있는 기도의 전통에 참여하고 있다.그들은 하느님을 뵙고,하느님을 찬양하며,지상에 남아 있는 이들을 끊임없이 돌보아준다.그들은 “기쁨”에 동참하여,“많은 일들을”맡게되었다.그들의 전구는 하느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그들의 봉사 중 가장 고귀한 것이다.우리는 우리와 온 세상을 위해 전구해 주도록 그들에게 기도할 수 있으며 또 해야 한다.
2684교회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다양한 영성이 발전되어 왔다.마치 엘리야의 “정신”이 엘리사와 세례자 요한에게 전해졌던 것처럼,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개인의 특은이 전달되어,몇몇 제자들이 그 정신을 나누어 받을 수 있게 되었다.어떤 영성은 전례적이며 신학적인 여러 흐름들이 만나는 합류점에서 형성되는 한편,신앙이 인간 사회와 그 역사 안에 정착하였음을 입증해 준다.그리스도교의 갖가지 영성은 기도의 살아 있는 전통에 참여하는 것이며,신자들에게는 필수적인 안내자이다.이 영성은,그 풍부한 다양성을 통해서,순수하고 유일한 성령의 빛을 반영한다.
“성령은 참으로 성인들의 처소이다.성인 또한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기 위해 자 신을 바쳤기에 성령께서 거처하실 만한 처소이니,그러므로 성인을 성령의 성전이 라고 부릅니다.”-성 대 바실리오,성령론
(을지로 09/27)
기도의 봉사자들
2685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기도를 가르치는 첫째 장소이다.혼인 성사 위에 세워진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가정 교회’이다.바로 거기서 하느님의 자녀들은‘교회로서’끊임없이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특히 어린이에게는 가정에서 날마다 바치는 기도가,성령께서 끊임없이 일깨워 주시는 교회의 살아 있는 기억을 처음으로 증언해 주는 것이다.
2686서품돤 봉사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신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의무를 지고 있다.착한 목자의 종들인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솟아나는 샘으로,곧 하느님 말씀,전례,하느님을 향한 삶,구체적 상황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오늘’로 인도하기 위하여 서품된 사람들이다.
2687수많은 수도자들이 그들의 전 생애를 기도하는 데에 바쳤다.이집트 광야에서,많은 은수자들과 남녀 수도자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백성을 위해 전구하고자 일생을 보냈다.봉헌 생활은 기도하지 않고는 유지되거나 확산되지 못한다.기도는 교회 안에서 관상 생활과 영성 생활이 솟아나는 원천 중 하나이다.
2688어린이들과 젊은이들과 어른들을 위한 교리 교육의 목표는 개인 기도 중에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고,전례 기도 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현재 상황과 연결시키며,또한 그 말씀을 항상 내면화하여 새로운 삶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하는 데에 있다.교리 교육은 대중 신심을 잘 검토하여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기본적인 기도문을 암기시키는 것은 기도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기초를 닦는 일이다.그러나 그 기도문의 의미를 음미하도록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2689‘기도 모임’,또는‘기도 학교’가 이 시대에 그리스도교적 기도의 진정한 원천에서 물을 길어 낸다면,교회 안에서 기도를 쇄신시키는 징표와 자극제가 될 것이다.친교에 대한 열망은 교회 안에 참다운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징표이다.
2690성령께서는 기도라는 공동선을 위해 일부 신자들에게 지혜와 믿음과 식별의 은총을 주신다(영적 지도).그러한 은총을 받은 남녀 신자들이 곧 기도의 살아 있는 전통을 위한 참다운 봉사자들이다.
기도에 적합한 장소
2691하느님의 집인 성당은 본당 공동체가 바치는 전례 기도에 적합한 곳이다.본당은 또한 성체 안에 실제로 현존해 계시는 그리스도를 흠숭하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이기도 하다.적합한 장소의 선택은 진실한 기도와 무관하지 않다.
-개인 기도를 드리기 위한 장소로는,우리 아버지 앞에서 ‘은밀하게’ 머무르기 위해,성경과 성화들이 비치되어 있는’‘기도의 골방’이 적합할 수 있다.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는,기도를 드리는 이러한 조그만 공간이 가족의 공동 기도를 촉진시켜 준다.
-수도원이 있는 지역의 경우에,수도 공동체는 신자들과 함께 성무일도를 드리도록 노력하며,더욱 열렬한 개인 기도를 위해 필요한 은거를 유지해야 할 소명이 있다.
-순례는 지상에서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여정을 상기시켜 준다.전통적으로 순례는 기도를 쇄신하게 하는 매우 좋은 기회로 간주되어 왔다.자신들의 살아 있는 샘을 찾는 순례자에게 성지는,그들이‘교회로서’그리스도교 기도를 체험하는 특멸한 곳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발췌)
주님께서 큰물 위에 좌정하셨네.
주님께서 영원하신 임금님으로 좌정하셨네.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권능을 주시리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평화로 강복하시리라.
(시편29,10-11)
10-11절에서는 임금이신 주님이 지상에서 평화를 주실 것을 찬양한다.이 두 절에서“주님께서”가 네 번 반복된다.이는 고대 근동의 신화적 표상을 사용하지만 바알이나 마르둑이 아니라 주님이 임금이심을 강조하기 위함이다.바알은 홍수와 바다의 신 얌을 정복한 후,마르둑은 바다의 신 티아맛을 정복한 후 임금이 되었다.주님은 혼돈의 상징인 큰물을 정복하신 후 임금으로 그 위에 좌정하신다.가나안과 바빌론에서는 큰물과 바다가 신격화되었지만 여기서는 큰물이 혼돈의 상징일뿐이다.우주의 임금으로 좌정하신 주님은 모든 신의 임금이요 동시에 이스라엘의 임금이시다.큰물과 바다가 주님께 정복되었다는 것은 참된 임금이신 주님의 영원한 다스림을 상징한다(시편93편).이는 예수님이 풍랑을 제압하시는 것을 연상시킨다.“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잠잠해져라.조용히 하여라!’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마르4,39). 소 아르노비우스에 따르면,“주님은 큰물,곧 죄를 씻어버리는 물속에 사시며,그 같은 물속에서 주님은 영원히 좌정하신다.거기서 그분은 백성들,곧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 힘을 주신다.그분의 백성들에게 평화의 복을 주신다.”
주님이 큰물을 정복하고 왕권을 확립하여 백성을 잘 다스리게되었다.시인은 이제 백성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도록 기도한다.주님은 백성에게“권능”과“평화”를 주신다.권능은 평화가 샘솟는 원천이다.주님이 ‘백성에게 강복하신다’는 것은 그분의 백성이 행복과 복지를 누리게 하거나 단순히 백성들을 번영하게 한다는 뜻이다.참 평화는 주님에게서 온다.
시편29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29편은 영원한 임금이신 주님이 모든 자연을 지배하고 비를 주셔서 백성에게 권능과 참된 평화의 복을 주심을 찬양한다.주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는 영광과 권능을 지니신 임금이므로 천상과 지상의 모든 존재는 마땅히 그분만을 경배하여야 한다.이 시편에서 주님은 천상의 신들을 지배하고 그들의 경배를 받으신다.그분은 큰물을 정복하시고 레바논의 향백나무를 부러뜨리시며 견고한 시르욘을 흔들어 놓으신다.그분의 소리에 땅이 흔드리고 동물들이 두려움에 떤다.그분은 천둥과 지진으로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신다.시인은 당시 고대 근동의 신화적 요소들을 사용하여 주님이 바빌론이나 가나안의 큰 신들보다 훨씬 우세하며 주님만이 참되고 영원한 임금이심을 강조한다.주님의 왕권은 역사와 자연계의 영역에서 모두 나타난다.시인은 역사와 자연 안에서 승리하신 주님이 백성에게 번영과 평화의 복을 주심을 찬양한다.참된 평화는 하늘에서 모든 신보다 더 높으시고 영원하신 주님으로부터 온다.천상(“그분 궁전”)에서는 모든 신이 그분께“영광이여!”(9절)라고 칭송하고,지상에서는 참되고 영원한 임금이되신 주님이 백성에게 평화를 주심을 찬양한다(11절).이것은 신약성경에서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두고 천사와 하늘의 군대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4)라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과 관련이 있다.(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시편1-41편/전봉순 著/바오로딸)
사회 교리는 바로 사회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교회의 가르침이다.사회를 복음화 한다는 말은 복음의 의미인 하느님 나라의 가치들을 인간들의 마음에 불어넣어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인류 일치의 새로운 유형”인 친교의 인간사회를 만들어 간다는 의미이다.이로써 모든 인간은 더욱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으며 이는 곧 하느님 나라와 더욱 일치하는 발전의 길을 가는 것이다.비록 교회가 선포하는 구원은 초자연 질서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는 자연의 질서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 질서 안에 있고 초자연적 질서를 지니며 초자연적 질서로 드높여지는 인간의 질서를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은 정치와 사회,경제와노동,문화와과학,민족들의 관계와 같은 이 세상의 실재를 통하여 이 세상에도 현존한다.그래서 교회는 현세사물에도 구원과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 주는 복음을 끊임없이 선포하고 있는 바 이것이 바로 사회 교리이다. 교회의 사회 교리는 복음화의 도구로써 말씀의 봉사직과 예언직을 수행한다.교회가 사회 교리를 가르치고 보급하는 것은 부차적인 사안이나 활동도 아니고 교회 사명 수행에 덧붙여진 것도 아니다.오히려 이것은 교회 봉사직의 핵심이다.교회는 사회 교리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을 선포하며, ...인간을 인간 자신에게 드러내 보여준다.”(백주년54항)
교회는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복음을 선포할 교회의 고유권한으로 말한다.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의 사회 교리로 사회의 세부적이나 전문적인 문제들에 개입하거나 사회 구조의 체계나 모형을 제시하지도,확립하지도 않는다.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사명이 아니다.단지 교회는 사회 교리를 통하여“구원의 길에 있는 인간을 돕고자”한다.(백주년54항 참조)이는 교회의 의무이며 권리이다.
(‘가톨릭 사회 교리 주제편’,복음화와 사회 교리 18-19쪽/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고요히 고요히
가을은 고요히
햇살은 고요히
씨앗처럼 고요히
산맥처럼 고요히
고요히 고요히
상처는 고요히
성숙은 고요히
별들처럼 고요히
희망처럼 고요히
고요히 고요히
여행은 고요히
길들은 고요히
내 안으로 고요히
걸어오는 것들
내 안에서 고요히
피어오는 것들
(고요히 고요히/박노해)
행복하고 즐거운
추석 명절 보내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