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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각산(月角山·456m)은 땅끝기맥에 있는 봉우리다.
땅끝기맥은 호남정맥 깃대봉과 삼계봉 사이에서 분기,월출산과 별매산, 두륜산, 달마산을 거쳐 해남 땅끝까지 뻗어내린 약 123km의 산줄기.
이 일대는 온통 달(月)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월출산과 월각산을 비롯하여 월곡,월남,상월,월평,월하,월산, 그리고 달을 먼저 맞는다는 들머리인 대월,송월까지...
월각산은 월출산국립공원 구역에 속한 산으로 산의 규모는 그리 큰 편이 아니다.
월출산이라는 명산이 바로 옆에 있어 상대적으로 빛을 보지 못했지만 아기자기한 암릉으로 이루어져 아주 예쁜 산이다.
거기다 눈앞에 펼쳐지는 천황봉부터 구정봉, 도갑산, 문필봉, 주지봉으로 이어지는 긴 월출산 하늘금은 한 폭의 수묵화 같다.
출발점은 대월(對月)리다.
네비엔 ‘대월리사무소’를 찍은 후 제법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댔다.
마을 입구에는 450년 묵은 웅장한 느티나무가 산객들을 맞는다.
마을 골목을 관통하여 민가가 끝나는 지점에 공원(한벽당 곽기수선생 시문학 체험장)이 조성되어 있고, 그 맞은 편 산으로 본격 진입을 한다.
입구에는 대나무를 엮어 출입통제 휀스를 쳐놨다.
그제사 이 산길이 통제구역이라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곧이어 암봉을 만나면서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가 펼쳐진다.
이 아기자기한 암릉길은 별매산에서 밤재를 거쳐 올라온 땅끝기맥을 만나기까지 1.5km의 거리로 이어진다.
능선길은 위험한 절벽 구간에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암봉 대부분 우회길이 있어 크게 위험하지 않다.
묵동치는 월출산 도갑산(375.8m)과 월각산, 묵동마을과 성전저수지를 잇는 고갯마루로 B팀들의 탈출로.
묵동치를 치고올라 남도산행에서 유난히 많이 보아왔던 주지봉 문필봉을 거쳐 왕인유적지를 답사하고 싶지만 그 길은 위험하기도 하고, 통제지역임을
익히 알고 있어 제외하였다.
대신 선택한 도갑산과 무위사 탐방이 우리의 루트.
도갑재에서 성전저수지 탈출로는 애시당초 찾을 수 없어 희미한 족적을 따라 능선길을 미끄러지듯 타고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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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궤적
주차장 옆엔 풍양조씨와 연일정씨 송덕비가 있고...
그 옆 조그만 다리 건너 스피커가 높이 달린 대월리사무소가 있다.
진행 방향으로 뿔의 모습 월각산이 버티고 섰다.
오래된 느티나무와 돌기둥을 지나...
이정표와...
안내판이 가리키는 산책로를 다른다.
여긴 '정약용의 남도 유배길' 61km(16시간)가 안내되고 있다. 다산의 실학정신과 영랑의 시혼이 빛나는 아름다운 길이란다.
길 옆 조그만 맞배지붕의 집과 돌담이 있어 가까이 가본다.
잠긴 대문 안으로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의혜각(義惠閣)이다.
안내판에 의하면 조득하(趙得夏 1867~1937)와 그 부인의 은혜에 감사하여 지은 비각이다.
월각산이 바라보이는 'ㅏ'자 갈림길에선 우측으로 진행...
호랑이 벽화가 그려진 마을길을 다른다. 10여년 전 호랑이 조형물과 확성기의 호랑이 울음소리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월각산이 바라보이는 우측엔 한벽당 곽기수 선생 시 체험장 공원이 있고 그 맞은 편으로 산책로 안내판이 있다.
좌측 마지막 민가 뒷쪽으로 산길이 열려 일행들은 모두 입산을 하였지만...
나는 여러 시비(詩碑)가 세워진 공원 안을 둘러본다.
한벽당 곽기수(寒碧先 郭期壽, 1549~1616)는 성전 출신으로 1579년 진사과에 입격한후 1583년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해서 예조화랑(정6품)에 이르렀다.
그는 주역 연구로 유명했으며 국한문 혼용시인 만흥삼결등이 전해오고 있다.
문신·의병장·청백리(淸白吏)였던 그는 자는 미경(美璟), 호는 해미인으로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선조 때 벼슬에 나아가 부안현감을 지냈다.
정유재란 때 의병으로 주역에 능통했으나 광해군 집정 때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한벽노인’이라 자칭하고 두문불출 은둔생활하며 성전면 송월리 대월의
마을 뒤쪽에 있었던 한벽당(寒碧堂)에서 학문과 시를 읊었다.
그의 작품을 모은 시문집 한벽당문집(寒碧堂文集)에는 당시의 금릉(강진의 옛이름)지역의 의병에 관련한 자료 금릉창의록이 있어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안내석.
만흥삼결(漫興三闋) 中一首
초당(草堂)의 발근 달이 북창(北窓)을 비겨시니
시내 말근 솔애 두 귀를 절노 싯내
소부(巢父)의 기산영수(箕山穎水)도 이러턴동 만동
곽기수(郭期壽)
초당의 북창에는 밝은 달이 비껴 보이고
멀리 들려오는 시냇물 소리는 절로 귀를 씻어 주는구나.
옛날 중국의 은사였던 소부가 살던 기산의 영수도 이러한 곳이겠지
만흥삼결은 이렇다할 느낌이 없이 저절로 우러나는 흥취를 느끼게하는 세가지 풍류를 말한다.
-만흥삼결의 2수-
물은 거울이 되어 창 앞에 비꼈거늘
뫼는 병풍이 되어 하늘 밖에 여위었네
이 중에 벗 삼은 것은 백구 외에 없어라
강호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물은 거울이 되어 창 밖에 비스듬히 비쳐있거늘 산은 병풍이 되어 하늘 밖에 널리 펼쳐져 있네.
이 중에 벗 삼은 것은 백구 외에는 없어라.
시각적 이미지만으로 구성한 아름다운 동양화 한 폭이다.
이런 전원 속에서 오직 흰 갈매기만을 벗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읊었다.
강호한정, 물아일체라는 말은 이런 삶을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만흥삼결의 3수-
희황이 니건 지 오래니 시절이 보암 직지 아니해
술이 광약인 줄 내 먼저 알것마는
적은 덧 취향에 들어가 태고적을 보려 하니
현실에 대한 불만을 술로 잊어버리고 취흥 속에서라도 태곳적 평화를 찾아보겠다는 또 하나의 도피적 은일 시조이다.
희황은 복희씨의 다른 이름이다.
중국의 전설상의 임금 복희씨가 다스리던 태평 시절은 이미 가버린 지 오래이다.
지금의 현실이야 뭐 볼 것이 있겠느냐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복잡한 그런 현실을 잊어버리려고 그는 술을 찾고 있다.
술은 나를 미치지게 하는 약인 줄 알지만 잠시나마 취흥 속에 빠져 태곳적 태평성대를 찾아보겠다는, 그의 이상 세계의 염원을 담고 있다.
그는 벼슬을 그만 두고 삶의 위안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이다.
강호자연에서 명철보신하면서 은자의 이런 한정가들을 남겼다. <신웅순의 시조한담에서>
소지(小池 작은 못)
못위에 비추어진 햇살 서로 비추느라 요란하고
담장의 꽃은 하늘 허리에 걸려 뽐내는데
하는 일 없이 앉아 있으려니
바위에서 쏟아지는 폭포소리는 마치
옥구슬이 서로 부딪쳐 나는 소리 같구나.
<곽기수 선생 詩>
안내판
취원당10경단가(聚遠堂十景短歌) 중 1수인 산점취연(山店炊烟)
안내판
끝머리에 만력갑신초추(萬曆甲申初秋)와
정해후인곽기수(貞海後人郭期壽) 미수(眉叟)가 읽힌다.
봉별(奉別)/ 어대주인(魚臺主人)을 제목으로 쓴 편지형식의 시로 학봉 김성일의 종가에서 최근 발견되었다.
삼가 어대주인(낚시터 주인,학봉 김성일을 말함)과 이별하며
이렁저렁 어지러운 세상 아는 사람 적은데
늦은 나이에 만난 당신은 바로 나의 스승이라오
전날에 비가 왔다 구름이 끼었다 해서는 안 된다 말씀하셨는데
오늘날은 산이 돌고 바다가 변하는 시기라
아! 어찌 알았으리오 무단히 멀리 이별하게 될 줄을
꿈속의 넋이라도 천리 먼 길 찾아오고 찾아가리라
만력 갑신(선조 17년 서기 1584년)초가을
정해후인 곽기수 미수
안내판
이제 일행들이 다 떠나고 없는 산길을 헐레벌떡 따라 오른다.
사각정자를 지나고...
본격 오름 산길에는 대나무 휀스가 쳐져 있다.
어쩔 수 없음이다.
월각산이 올려다 보이고...
가쁜 숨 몰아쉬며 뒤돌아보니...
조망이 트이기 시작이다.
이제 일행들의 꽁무니를 물었다.
남동 방향의 화강암 바위는 릿지화를 신은 것처럼 착착 붙는다.
다들 조망을 즐기면서 시간이 지체되고...
남도의 풍경을 담느라 여념이 없다.
개스가 끼어 시계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암릉에서의 우리들의 유희(遊戱)는 끝날 줄을 모른다.
앞으로 나아 갈수록...
암릉의 멋은 더 빼어나고...
돌아보면 남도의 들녘은 풍요로워 보인다.
악어가 나타났다.
기암을 지나고...
거대한 바위를 다시 만난다. 장군바위인가?
옆으로 눈 돌리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암릉.
볼록배를 보듬고 감투정신을 발휘하는 성사장이 바위에 걸터 앉았다.
나아갈 능선에는 아직도 암봉이 수두룩하다.
몰아한 '미소'님의 무아지경.
장군바위에선 쉼을 하며 목을 축인다.
다시 진행하다 돌아보는 장군바위.
살짝 당겨보니 그 우람함이라니...
다시 칼날 암릉길은 계속되고...
칼날 암릉을 좌로 하강 우회하여 다시 올라선 암릉길.
그러자 다시 트이는 조망.
일행 중 한 명이 암봉에 올라섰다.
뒤 돌아본 우리가 걸어온 길.
바위 틈새에 창숙씨가 섰다.
기묘한 바위를 타고...
월평제 너머로 별뫼산이 구름에 가렸다.
진행방향 끄트머리에 월각산.
칼날 암릉을 지나...
기기묘묘한 바위들을 두루 섭렵하고...
다시 올려다 본다.
제각각의 모습으로 두각을 나타내더니...
저쪽 후미에 일행의 모습이 하늘금에 닿았다.
땅끝기맥 갈림길을 만난다.
날개 떨어진 땅끝기맥 밤재 이정표
다른 각도의 모습
미소님 잠깐 쉬더니 원기회복하고...
묵동치 갈림길에는 만식씨와 일행들이 월각산을 다녀왔다.
월각산과 묵동치 갈림길의 이정표. 월각산에선 U턴을 하여 되내려 와야만 한다.
그리고 단체 인증 샷. 정상 표석 뒤로는 무위사 방향으로 산꾼들이 밟고 내려간 길흔적이 나 있었다.
월각산에서의 조망에 특이한 지형지물인 뾰족한 문필봉이 보인다.
올해 처음 나리꽃을 보았다.
가방을 벗어놓은 갈림길에 돌아 왔다. 고도가 점차 낮아지더니 묵동치(약 190m)에서 B팀들이 탈출을 하고 우리는 곧장 도갑산으로 오름짓을 한다.
우측 숲 사이로 성전저수지와 월출산의 위용이 살짝 드러나고...
정면으론 주지봉 문필봉이 성큼 다가와 있다.
그리고 기가 막히는 전망대에 섰다. 묵동치를 지나 만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의 조망처다.
성전저수지와 월출산.
문필봉과 주지봉.
조금 당겨봉 월출산과 그 앞으로 기죽은 도갑산의 움추린 모습.
흑석산과 땅끝기맥
아무런 특색이 없는 주지봉 문필봉 갈림길에 섰다. 이 갈림길을 지나 상곤씨가 문필봉 방향으로 가고 말았다. 아마 의도적(?)인 알바였으리라.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걷는 것.
오른 발 왼 발 그저 부지런히 발자국을 들었다 놓았다 본능적으로 반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또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발 밑의 암초가 문제. 엊그제는 뒤로 자빠지고 오늘은 앞으로 엎어졌으니 온 몸이 피멍자국.
에구~ 성한 데가 없으니...
주지봉 갈림길에서 지도상의 도갑산을 근 1시간 만에 도착을 한다.
도갑산엔 아무런 표식이 없이 그저 산죽밭에 둥그런 마당이 조성되어 있을 뿐.
우리가 내려갈 성전저수지가 눈아래 가까이 보이지만 도갑재로 되내려가 길을 찾아보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올라온 도갑산 산죽마당. 발품을 팔아 예까지 올라왔으니 이렇게 기념 인증샷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리곤 다시 월출산 방향 100여 미터 전방 산죽밭 갈림길에서 직진 우측(좌측은 월출산)으로 선답자들의 흔적을 좇는다.
희미한 족적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서니...
건계곡을 만난다.
마른 계곡을 따라 좌측으로 길냄새를 맡으며...
비포장 임도에 내려선다.
우선 계곡 맑은 물에 세수부터 하였다.
그리곤 임도를 따라...
성전저수지에 내려섰다.
저수지 갈림길의 안내판과...
출입금지 안내판. 그러니까 무위사를 아우르는 모든 산길은 비법정 탐방로였다.
총소리가 시도때도 없이 무섭게 들리는 길을 따라 저 아래 죽전마을이 보이고...
좌측 농로를 따라 무위사로 질러 들어오니 눈에 익은 반가운 우리 버스.
그리고 무위사는 나와 계곡을 따라 경계를 긋고 있다.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관음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은 절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공사가 진행되면서 이름도 무위사로 바뀌게 되었다.
계곡을 따라 올라 무위사의 상단부에서 먼저 맞배지붕의 천불전을 본다.
돌담과 접시꽃이 곱게 어우러진 무위사. 돌담은 문외한의 시각으로 그랭이 공법으로 보인다.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보물 제507호)는 선각대사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려 정종 원년(946)에 건립되었다.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고려 태조 원년(918)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탑’이라 하였다.
입적한 지 28년만에 세워진 것이다.
월출산 산신각과...
미륵전이 나란히 서 있다.
비는 받침돌과 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에 관한 기록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받침돌은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나워 보이며 사실성이 뚜렷하다.
중앙에 마련되어 비를 직접 받치고 있는 비좌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의 조각을 새겼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3단의 받침이 있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그 주위로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같은 시대의 다른 석비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안내판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보전은 세종 12년(1430)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康津 無爲寺 極樂寶殿, 국보 제13호)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주심포(柱心包)식 건물이다.
지붕은 맞배지붕,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자료>
극락보전 불단 위에 모셔져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이다.
가운데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상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본존불은 건장한 체구에 무릎이 넓어 안정감 있는 신체비례를 지닌 모습이다.
둥근 얼굴을 하고 가슴 부분은 약간 쳐진 듯 표현되었으며,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다.
이 아미타불은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이며, 연꽃대좌와 하나의 나무로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양식의 관음보살상은 왼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 놓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간단한 모양의 가슴장식이 있으며, 양어깨에 곱슬한 머리칼이 흘러내린 모습이다.
두손은 앞에 모아서 보병을 받쳐들고 있다.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있는 지장보살상은 비교적 작고 갸름한 얼굴이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의 앞쪽에 흘러내린 옷주름은 아래 대좌에 표현되어 있어 불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모습이다.
후불벽 앞면의 아미타삼존불벽화(보물 제1313호)는 앉은 모습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이,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이 서 있는 구도를 하고 있다.
화면의 맨 위부분에는 구름을 배경으로 좌우에 각각 3인씩 6인의 나한상을 배치하고 그 위에는 작은 화불 2불씩이 그려져 있다.
아미타극락회도 장면을 그린 이 벽화는 앞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상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비교적 높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뒤로는 키모양의 광배가 표현되었다.
왼쪽에 서있는 관음보살은 머리칼이 어깨 위에 흘러내린 모습에 얇고 투명한 겉옷을 입고 있으며, 오른쪽의 지장보살은 오른손으로 석장을 짚고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 벽화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단청이 되지 않은 극락보전의 정면에 당간지주가 나란히 세워져 있고, 그 중앙에 넓직한 판돌 하나가 놓여있다.
정면에 무딘 세월을 맨땅에 누워 극락보전 아미타불을 돌보며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는 길이130㎝ 너비98㎝ 높이 9㎝의 직사각형의 배례석이다.
중앙에 부처님을 상징하는 연꽃문양이 양각으로 하나 새겨져 있고 그 안에 자방에는 연씨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가장자리에 음각으로
태(선)를 두르고 직사각형의 측면과 정면에 안상(眼象)을 새기지 않은 대신 모서리를 두께의 절반쯤 깎아 들어내 한층 멋을 내었다.
무위사 3층석탑(문화재자료 제76호)은 전형적인 2층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 된 석탑이다.
지대석은 수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 중식이 연결되고 있으며 각 면에는 면상이 새겨져 있는데 그 조식이 정교하여 세련되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석씩으로 탑신에는 양면에 우주가 모각되고 2.3층에서는 그 높이를 줄여 체감을 보였다.
옥개석은 상면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중앙에서 직선을 이루다가 우동의 합각에 이르러서는 가벼운 반전을 보였다.
이 탑은 3층 옥개석과 1층 옥개석 일부에서 약간의 훼손을 입었으나 그외의 부재에서는 완전한 상태로서 비교적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이 탑의 조성 연대는 선각대사 편광탑비의 조성 연대(946년)와 동시대이거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은 고려초기로 보인다.
안내판
보제루(普濟樓)를 지나...
돌아보니 건축연대가 일천한 보제루가 시선을 막아섰다.
보제루 편액
무위사중건공적비를 지나...
일주문을 벗어난다.
월출산 무위사 일주문. 일주문에서 극락보전까지 한 줄로 배열하는 건 다른 사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위사 안내문
무위사는 국보급 문화재와 보물들이 있었지만 입장료를 받지 않는 게 우선 좋았다.
무위(無爲)란 목표한 것을 이루지 못함을 말한다.
무위사는 높은 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정진하는 사찰임에 틀림없어 뵌다.
알바한 일행을 기다리며 한참이나 무위사에 머물렀다.
산 마을의 집에서 우연히 만난 자리, 손님얼굴 대하니
곧 나로 하여금 짙었던 온갖 시름 사라지게 하네
남풍 부는 사월에 지루한 비 내리고
오래된 절간에선 쓸쓸하게 종이 울리네.
소나무는 본래부터 줄이 없는 데에도 곡조 잘 연주하고
새들은 무슨 생각 있기에 숲을 둘러 좇는고
아마도 경포대 앞에서의 저녁 때
산과 들의 나물 안주 술을 마실 만하네
<조선말기의 문인이요 시인이었던 조승하가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을 배경으로 읊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