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 강희안
벽지의 방 외
왜 그는 세상 등 지고 돌아앉았을까 모기 잡기 좋은 하얀 벽지의 방이군요 정말 제 방은 화려해서 정신없어요 벽지도 문도 나도 모기의 소음에 넋이 빠져요 가령 모기도 내가 한심한지 한참을 골똘이 앉아 있다가 갸우뚱 날아가요 날을 잡아야겠어요 나를 잡기 흐린 궂은 날의 연속이었어요 이사도 감사도 원색적으로 튀어나왔어요 아마 목이 잡기 좋은 하얗고 가늘은 각도군요
소주병 가운데 놓고 알 품은 듯 잠들었다 여기가 어딘데 이리 적막할까 이 무덤을 열고 나가고 싶다 칡덩굴에 뒤덮인 봉분을 벌초하고 싶다 왜 이리 암울하게 휘갈긴 잡풀들의 낙서뿐이더냐 다시 돌아갈 수 없겠구나 백만 년 걸려도 못 치울 것 같은 빈 병의 말에 귀 기울였지 무슨 일 있었는지 안 물어 어디서 어찌 술만 동내는지 안 물어
영어로 불어도 안 물어 내 잔만 가득 차면 돼 내가 무덤을 기르면 돼 이제 곧 소주병이 동그랗게 도열하여 나를 품을 테니까 잠에서 깨어나면 날개가 돋혀 있을 테니까 당신을 가운데 놓고 알 품은 듯 잠들었어 여기가 어딘데 이리 따뜻할까 이 무덤을 닫아걸고 싶다 당신의 팔에 휘감겨 우거지고 싶다 죽음보다 깊은 뿌리를 내리고 싶다
왜 그는 어둔 등지고 돌아버렸을까 두근대고 설레이는 멜로는 간지러운 걸까요 부끄러운 건 불편한 거예요 그의 장르는 남다르거든요 가령 목을 드리운 건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거죠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건너뛰어 보자는 거죠 새로 통정해도 어제와 늘 똑같은데 왜 그는 환한 등지고 돌아왔을까 모기의 목을 만져보며 머리를 긁적였을까 참 궁금해지는 날들의 연속이네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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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의 히스토리
혼자 술 마시며 조용히 내지르는 욕에는 스토리가 있다 뱀은 하기 싫었으므로 그는 늘상 용만 했다 독하게 순해지고 싶어 두꺼비만 잡아먹었다 그가 오래된 나무의 구멍에서 떨군 비늘은 무슨 색이었을까 욕망이 사라지는 건 술 마실 때 잘 때 말할 때뿐이었다 홀로 술 마시며 고요히 내뱉는 욕의 뒷모습에는 표정도 있다 유불선의 사정에 따라 주종이 달라진다
사람들의 그림자에 휩싸여 용을 쓰기에도 벅차다 그는 펄펄 날뛰는 생선만 보면 진저리치듯 용트림을 한다 하얗게 풀려나온 원색의 욕이 떠오른다 그리하여 그는 술만 먹으면 노상 무지렁이 자세를 취한다 황룡이 아닌 땅만 파먹는 토룡으로 입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호젓이 술 마시며 뇌까리는 욕에는 날것의 향기가 난다 싱싱할수록 투명한 비릿한 살의 맛이다
겹겹의 켜도 껍데기도 없는 온전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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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안
1990년 《문학사상》 신인발굴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나탈리 망세의 첼로』, 『물고기 강의실』, 『너트의 블랙홀』 등이 있으며. 저서로 『고독한 욕망의 윤리학』, 『새로운 현대시론』 등이 있다. 현재 배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