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 - 이 이름은 1:42에 나오는데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새로 주셨었다. 그렇게 하신것은 그에게서 수제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 부인함으로써 '반석'이라는 의미의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질 수 없었다 하겠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와 같은 호명은 단지 베드로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그의 나약함을 들추어 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겸손을 유도해내고 그에게 다시 새로운 소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본문에서 '이사람들'은 개역성경의 난하주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것들'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본문은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네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2)'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3)'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모든 해석이 다 가능하며 타당성을 갖는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 가장 타당한 해석은 첫번째 것이라고 본다. 비록 예수를 사랑하는 제자들의 열성에 우열을 가린다는 것이 어색해 보이긴 하지만,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의 뛰어난 충성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러한 결론은 무리가 되지 않는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사용한 단어는 '아가파오'였는데 베드로는 '필로'를 사용하여 대답하였다. 흔히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 숭고하고 헌신적인 사랑, 완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가리킨다고 보며 후자는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 친근하고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데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의 두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아니면 위에서 구분한 대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가이다. 혹자는 두 단어가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물었는데 비해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한 경험도 있고 해서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고 단지 그보다는 다소 차원이 낮은 사랑 즉 인간적인 우정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대답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는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렇게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의 물음에 대해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질문에 대해 변경된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런만큼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고 다른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절에서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베드로가 비록 실패를 하기 했지만 아직도 예수에 대한 애정과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본절에서부터 17절에 이르기까지 '먹이라', -'치라' -'먹이라'는 명령이 연속되고 있는데 혹자는 첫번째와 세번째는 양들응 목초지로 인도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두번째는 양들의 모은 활동을 돌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뚜렷이 구분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며 먹이는 것과 돌보는 것이 크게 보아 같은 범부에 든다고 할 때 오히려 같은 의미의 반복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한편 '어린 양'에서 '어린'이라는 표현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소명은 힘이 들고 많은 사랑을 요하는 것이다.
[요 21:16]"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두번째 가라사대...내 양을 치라 - 두번째 질문은 다른 것과 비교하지 않고 다만 사랑하는가의 여부를 묻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첫번째 질문은 다른 제자들보다 우월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 베드로의 호언장담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자 했던 것같다. 이제 예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예수 자신과 베드로 사이의 관계를 묻고있다.
문제의 핵심은 다른 것과의 비교 차원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일대일 차원의 관계에 있었다. 베드로의 대답은 앞의 것과 동일하다. 적어도 베드로는 이 시간 매우 진지하고 솔직하게 그리고 과장없이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베드로의 대답은 세번 모두에 걸쳐 '주께서 아시나이다'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주께서 아십니다'가 주절로,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말이 종속절의 형식으로 진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 21:17]"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사랑하느냐 - 앞의 두 번의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사랑'을 '필레오'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읕 베드로가 계속해서 사용한 단어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진실성과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수용하겠다는 마음의 표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친근한 사랑을 확인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본절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진정 나의 친구이냐?"로 번역하고 있다. 근심하여 가로되 - 베드로는 예수의 세번째 질문을 받고는 근심에 빠졌다. 베드로가 근심하게 된 이유는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번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인 바 어쩌면 자기가 세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예수께 대한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는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예전처럼 자신있게 호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모은 것을 아시오매...아시나이다 - 그러나 베드로는 허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아시오매'는 하나의 기독론적 고백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이말 속에는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신적 통찰력을 갖고 계시다는 고백이 들어 있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고 있고 그런 만큼 그분 앞에서는 오직 진심을 이야기해야 함을 악고 있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베드로의 세번에 걸친 대답 가운데 세번째의 '아시나이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원어상 바뀌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즉 앞의 두 '아시나이다'는 헬라어 '오이다'의 번역으로서 어떤 사실에 대한 직관적인 앎을 의미한다는 것이며 그에 비해 세번째의 '아시나이다'는 헬라어 '기노스코'의 번역으로서 이 말은 '오이다'보다 더 갗한 의미를 가지며 경험을 매개로 하여 얻어지는 지식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이 옳다고 한다면, 베드로는 비록 근심으로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대답을 했지만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인정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으며 그것을 담대히 그러나 교반하지 않게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내 양을 먹이라 - 예수는 베드로의 사랑을 세번 확인하였고 그에게 동일한 사명을 세번 반복하여 주셨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하나는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써 실추된 명예를 회복해 주는 의미가 있고, 다른 하나는 교회에서의 베드로의 지도권이 다시 위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특히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권위는 교회 바깥으로 향하는 전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의 지도권과 목회적 돌봄에 초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본서의 분뷰는, '우리 밖'의 잃어버린 양떼에게 관심을 갖는 공관복음의 선교 지향적 부분와 비교된다.
[요 21: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진실로 진실로...젊어서는...데려가리라 - '진실로 진실로'라는 도입 문구는 현재 분위기의 엄숙함을 시사한다. 그리고 도입 문구의 엄숙함에 걸맞게 베드로의 순교가 예고되고 있다. 혹자는 본절이 '어릴적에는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갈 수 있었으나 성인이 되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의미의 속담을 배경에 두고 있다고 보는데 분명한 근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본절이 베드로의 순교 외에 구체적인 그의 죽음 방식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불트만같은 학자는 본절이 '그가 전에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택했으나, 그의 마지막 길은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다음절(19절)과 관련시켜 볼 때 베드로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닌 방식 즉 순교의 형태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본다. 그러나 그 죽음이 곧 십자가의 죽음을 뜻한다는 암시를 발견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1)'팔을 벌리다'가 십자가 처형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손으로 잡으려고 또는 지도자를 향해 팔을 내미는 노인의 절망을 묘사하는 것이고, (2)'띠를 띠우다'는 '묶다'는 뜻이 아니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바렛같은 학자는 본절에서 베드로의 순교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실현되리라는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도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팔을 벌리리니'와 '띠 띠우고'라는 문구인데 바렛은 불트만과 반대의 논리를 전개시킨다. (1)먼저, '팔을 벌리다'는 사65:2의 '내가 종일 손을 펴서'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데, 사65:2는 바나바 서신12:4, 저스틴, 이레니우스 그리고 키푸리안 등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힘을 예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
2)'존뉘나이'가 묶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므로, 십자가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불트만의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동사는 사전적 의미보다 넓은 개념으로 확대되어 사용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위의 두 학자들의 견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옳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후대 교부들의 전승에 의하면 (2)의 견해가 지지를 받는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소명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그는 이제 더이상 자기의 삶을 자의적으로 살 수 없다. 그는 주님께 붙잡힌 바 되었는데 그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과 감화로 말미암아 자발적인 결단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양들을 위하여 예고된 죽음을 자취한 것처럼 베드로도 노쇠하여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하는 양들을 위하여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걸어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