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과 밤의 길이가 온전히 반으로 갈마드는 계절의 문턱, 완연한 가을을 알리는 추분(秋分)이다. 뜨거웠던 여름날의 열기를 걷어내고 맑고 청명한 바람이 대지를 스치는 이때, 들녘의 곡식들은 속을 꽉 채우며 결실의 무게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음양의 조화가 균형을 이루고 만물이 내면의 성숙을 다지는 이 길한 절기에, 지역민과 문화예술을 아끼는 모든 분께 가을 하늘처럼 맑고 풍요로운 안녕을 기원한다.
가을의 문턱에서 우리는 종종 삶의 속도를 늦추고 지나온 시간의 무늬를 돌아보게 된다. 그 사색과 성찰의 시간에 가장 어울리는 공간을 소개하고자 한다. 의령군 의령읍 소재 의병박물관(義兵博物館)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의령군 시설관리사무소 소속 의병박물관에서는 다음 달 10월 2일부터 내년 3월까지 열리는‘퇴계 이황 특별전’ 행사가 모든 국민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전시가 되길 소망하며, 2026년 열여덟 꼭지째 칼럼으로 박물관(博物館: 고고학적 자료, 역사적 유물, 예술품, 그 밖의 학술자료를 수집·보존·진열하고 일반에게 전시하여 학술연구와 사회교육에 기여할 목적으로 만든 시설) 세 글자를 가만히 반추해 본다.
한자의 가장 오랜 경전이라 불리는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를 펼쳐 글자의 뿌리를 가만히 파헤쳐 보면(破字), 그곳이 단순한 옛 유물의 보관소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설문해자》에서 넓을 박(博)은 열 십(十)변에 펼 부(尃)자가 결합 된 형상이다. 열 십(十)은 동서남북, 사방팔방 온 누리를 두루 아우르는 완전함을 뜻하고, 펼 부(尃)는 한 분야를 널리 파고들어 정성을 다하는 일념을 뜻한다. 즉, 넓을 박(博)자는 수많은 시간과 사연을 넓게 품되,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보지 않고 오롯이 정성을 다해 살피는 혜안과 포용을 의미한다. 만물·물건 물(物)자는 소 우(牛)와 깃발 물(勿)이 어우러져 있다. 고대부터 묵묵히 밭을 갈며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소(牛)처럼, 인류가 땀 흘려 남긴 모든 삶의 흔적과 만물의 실체를 가리킨다. 여기에 깃발 물(勿)은 펄럭이는 깃발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형상과 존재의 결을 나타낸다. 물질적인 유물 그 자체를 넘어 인간의 땀과 눈물, 시대의 혼이 깃든 대상 전체를 뜻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집 관(館)자는 밥 식(𩙿=食)변에 기관·벼슬 관(官)자가 더해진 글자이다. 관(官)은 공공의 영역이자 뭇사람이 머무는 관청이나 높은 집을 뜻하며, 여기에 밥 식(食)이 더해져 길손에게 따뜻한 밥과 쉼자리를 내어주는 곳, 곧 나그네가 찾아와 머물며 양식을 얻는 거처를 뜻한다. 오늘날 박물관의 관(館)은 단지 유물을 모아둔 건물이 아니라, 시대를 건너온 지혜로 사람들의 영혼과 정신을 살찌우는 정신적 양식의 집인 셈이다.
결국 박물관(博物館)이란, 지나간 세월 속 만물의 온갖 흔적과 정신(物)을 넓고 깊게 품어(博), 배움과 성찰을 찾는 이들에게 풍성한 정신적 양식을 나누어 주는 거룩한 배움터(館)인 것이다. 이러한 박물관의 본령을 가장 잘 보여주는 뜻깊은 자리가 바로 의령군 의병박물관에서 마련된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유물 특별전이 오백여 년을 초월하여 열리는 것이다.
경북 안동(安東)에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연구한 대학자로 널리 알려진 퇴계 선생에게 경남 의령(宜寧)은 실로 남다른 인연의 땅이다. 퇴계 선생의 처가(妻家)가 자리했던 의령군 가례면 가례(嘉禮)마을은 선생의 손길과 자취, 그리고 선비로서의 따뜻한 삶의 향념(鄕念)이 서려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의령은 임진왜란 당시 천강 곽재우 장군을 위시한 의병들이 일어난 의(義)의 고장인 동시에, 퇴계 선생의 깊은 성찰과 경(敬)의 철학이 면면히 스며 있는 예(禮)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번 의병박물관 제2관의 특별전은 제5회 의령 리치리치 페스티벌 시작, 때에 맞추어 퇴계 선생의 깊은 학문적 성취는 물론, 인간 이황이 보여준 겸양과 배려, 그리고 삶의 실천적 가치를 생생한 유물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귀한 기회가 될 것이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균형을 잃고 흔들리는 우리 현대인에게 절제와 공경을 바탕으로 한 퇴계의 정신은 가을바람처럼 시원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낮과 밤의 평형을 이루는 추분의 절기처럼, 옛 선현의 유물에서 지혜를 길어 올려 오늘날 우리의 삶을 바르게 정돈할 때이다. 의병박물관 문턱을 넘는 모든 발걸음이 시대를 뛰어넘는 스승의 온기를 느끼고, 마음에 풍성한 정신의 곡식을 가득 채워가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의령의 역사와 품격을 다시금 드높일 이번 ‘처가향념(妻家向念) , 퇴계 선생이 사랑한 의령’ 특별전이 의령군민과 경남의 관람객들의 뜨거운 성원 속에서 성황리에 결실, 맺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 博 | = | 十 | + | 尃 |
| 넓을 박 |
| 열 십 |
| 펼 부 |
| 物 | = | 牛 | + | 勿 |
| 만물(물건) 물 |
| 소 우 |
| 깃발 물 |
| 館 | = | 𩙿= 食 | + | 官 |
| 집 관 |
| 밥식 식 |
| 기관(벼슬) 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