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68)
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書皆焚之
편지는 모두 태워버려라.
국회는 개원식도 하지 못한 채, 여야(與野)가 사생결단(死生決斷)하겠다는 모습으로 대치하고 있다. 겉으로 민생(民生)을 말하고 있지만 당리당략(黨利黨略) 앞에는 민생은 그저 구두선(口頭禪)이다. 여당은 행정권을 쥐고 야당은 입법권을 쥐고서 상대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 여야는 각기 단결은 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계파가 다르면 말이 서로 안 통하는 것은 여야 대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국가를 통합하고 국제무대에서 국가를 대표하여 경쟁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나와 다른 의견을 정성껏 청취하는 군자(君子)의 태도를 보이는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요컨대 대인(大人) 없다. 그래서 이를 보는 사람은 때로는 절망(絶望)에 빠진다.
이러한 것을 볼 땐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익숙한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인물들을 생각하게 한다. 삼국지는 세 나라의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는 후한(後漢) 말 헌제(獻帝) 시대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내용이 사실(史實)과 같고 다름을 보려면 자치통감에서 후한 헌제시기를 들쳐 봐야 한다.
후한 말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진 사람은 동탁(董卓)과 원소(袁紹)였다. 동탁은 서부 세력의 중심인물이고, 무력으로 가장 강하여 일시적으로는 누구도 그에 대항할 세력이 없었지만, 도읍인 낙양에서황제를 끌고 스스로 자기 근거지인 장안으로 가서 가족 중심으로 나라를 운영하려는 퇴영(退嬰)적 태도가 스스로 세력을 약화(弱化)시켜 역사에서 사라진다.
또 하나의 세력은 후한 말 모든 사람의 원한의 대상이었던 십상시를 목 벰으로 동부지역의 강자가 된 원소이다. 그는 서부 동탁의 발호에 대항하자는 동부 세력들이 모여서 맹주(盟主)로 추대하였으니 이쯤 되면 역사의 주인공이 될 만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조조(曹操)와 관도(官渡)의 전투(戰鬪)에서 패하고 뒤이어 창정(倉亭) 전투에서 연속 패배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였으니 그 또한 실패자다.
사실 원소가 조조와 대결할 때 원소의 세력은 조조에 비하여 월등하였다. 원소는 이미 당시 또 다른 강한 세력인 공손찬(公孫瓚)을 패배시키고 중원의 중요한 기주(冀州), 병주(幷州), 유주(幽州), 청주(靑州) 네 개 지역을 점거하여 거대한 세력을 일구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조가 헌제를 끼고 허현(許縣)을 점거하고 있었으니 원소는 반드시 이를 제거해야 했다.
그런데 원소는 공손찬을 꺾고 나자 기고만장(氣高萬丈)하여 허현에 있는 조조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때 원소의 밑에 있던 저수(沮授)가‘우리 군대는 공손찬을 이기고 나자 교만한 군대가 되었으니 허현으로 조조를 공격하러 가면 실패합니다.’라고 하였다. 병법(兵法)에 교군(驕軍)이 실패한다는 이론을 가지고 반대한 것이지만, 원소는 자기 말을 거역한 저수를 미워하여 그의 군대 3분의 2를 빼앗아 버리었다. 뺄셈정치였다.
이러한 원소가 또 다른 세력인 장수(張繡)와 연합하려고 하였을 때 장수 밑에 있던 가후(賈詡)가 ‘원소는 형제도 받아들일 수 없는데, 천하의 인재를 수용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대하였다. 원소는 장수와 연합하는 것이 유리할 것을 알고 그와 연합하려 했지만, 원소의 뺄셈정치를 본 가후는 원소에게 희망이 없음을 발견하고 그가 모시는 장수에게 원소를 택하지 말도록 권고한 것이다.
이러한 원소의 뺄셈정치는 기회가 찾아와도 이를 활용하지 못하였다. 원소에게 그가 제거하려는 조조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조조에게 의탁하였던 유비(劉備)가 조조로부터 위협을 느껴서 도망하자 조조는 직접 유비를 치려고 허현을 나섰기 때문이다. 이때 원소의 측근인 전풍(田豐)이 ‘조조와 유비가 맞부딪쳐서 허현이 비게 되니 이때 허현을 공격하자.’라고 하였지만, 원소는 아들이 아프니 할 수 없다는 말로 거절하였다. 그에게 다가온 좋은 정책을 수용하지 못하였다. 이를 본 전풍은 ‘기회를 잃으니 애석하다.’라고 했다.
그런데 뒤늦게 조조가 이미 유비를 치고 허현으로 돌아왔을 때 가서야 허현의 조조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를 본 전풍은 이미 조조가 돌아왔으니 직접 공격하여도 성공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하면서 다른 방법을 제시하였다. 즉, 기습병(奇襲兵)을 동원하여 조조를 3년만 괴롭히면 조조를 이길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정책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전풍을 형틀에 묶었다. 이를 본 원소 주위에 있던 인물들은 더 이상 원소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떠났다.
어쨌든 결국 원소와 조조는 부딪쳤다. 군사의 수나 군량이라는 조건에서는 아직도 원소가 조조보다 매우 우세하였다. 그리하여 전장(戰場)에서 조조는 힘들게 버티다가 너무 힘들어 물러나고 싶은 생각을 하였다. 이때 원소 진영에 있던 허유(許攸)가 조조 진영으로 도망해 왔다. 허유 집안사람이 법을 어기자 원소의 참모 심배(審配)가 그를 붙잡아 가두었고 이에 화가 난 허유는 마침내 조조에게로 도망해 온 것이다. 조조는 맨발로 나가 허유를 맞았으니 원소의 뺄셈과 조조의 덧셈이 극명하게 보여 주는 예이다.
허유가 조조에게 말하였다. ‘공(公)의 고립된 군대는 홀로 지킬 뿐, 밖으로는 구원군이 없고 양곡도 이미 다하였으니 위급한 때입니다. 원씨는 치중(輜重)이 1만여 승이나 되지만, 고시(故市)·오소(烏巢)에 있는데 주둔군의 대비가 삼엄하지 않으니, 만일 경무장한 병사들로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게 기습하여 그곳에 쌓아놓은 치중(輜重)을 불태우면 3일이 안에 원소는 저절로 패할 것입니다.’
조조의 덧셈 정치가 상대인 원소의 약점을 파악하게 하고 이를 공격하는 방법까지 제시하게 한 것이다. 결국 관도의 전투에서 원소는 패배하였고 조조는 전세(戰勢)를 역전시켰다. 그리고 조조가 원소의 근거지가 되는 진영을 점령하여 원소가 남기고 간 편지 뭉텅이를 발견하였다.
그 편지를 거두어 보니 그 속에는 허현에서 조조의 휘하에 있던 사람 가운데 후에 원소가 승리하였을 때를 생각했는지 원소에게 보낸 편지가 상당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조조는 자기 휘하에는 자기를 배반할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몹시 화도 났을 것이다. 하나하나 찾아서 처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일반적인 사람의 태도와 달랐다. 그는 펼쳐 보지도 않고‘모두 불태워라. 당시에 원소가 강하였으니 나 스스로 보존하기 어려웠는데 보통 사람이야 살려고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승패를 알 수 없는 상황에 있던 나약한 자기 부하를 이해하고 나약하지만 계속 쓰려고 한 것이다. 뺄셈을 덧셈으로 바꾼 조치였다.
후에 조조의 아들 조비는 헌제의 선양(禪讓)을 받아 위(魏)왕조를 열 수 있었던 기초는 조조가 쌓은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태산은 티끌을 작다고 마다하지 않고, 바다는 시냇물이 하찮다고 보지 않고 받아들여서 태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었다는 말을 곧잘 한다.
다시 사생결단하고 싸우는 여야와 그 내부의 갈등을 보면 이들에게 원소의 뺄셈정치는 있을지언정 조조의 덧셈 정치를 실천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이른바 민주당의 친명, 비명, 찐명이 모두 그렇다. 국민의 힘도 친윤, 비윤, 비한, 친한 같이 경쟁상대의 흠집 찾아내기에 혈안이다. 조그만 흠집이 있어도 내쳐버리는 전형적인 뺄셈정치다. 그래서 상대를 이긴들 그 이미 빠져버린 힘으로 더 큰 싸움에서 상대를 이길 수 있을까?
첫댓글 조조의 덧셈과 원소의 뺄셈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우리는 이런 가감의 셈법이 아니라 나눗셈과 곱셈의 철학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가관입니다. 우리가 삼국지연의를 화제로 할 때 트럼프는 김정은을 친구라고 한답니다. 가감승제의 셈법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의 차원을 어떻게 보아야할 가가 중요한 것은 아닌지요?
좋은 교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