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1월 24일,
YWCA 위장결혼 사건
10. 26사건 이후 대한민국은 급작스러운 변화로 혼란에 빠졌지만 한편으로는 독재정권의
몰락과 함께 민주사회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피어 오르고 있었다. 이렇듯 유신체제의 앞날은 비관론과
낙관론이 엇갈리면서 불확실해졌지만 11월 10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실시방침이 발표되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이 후보로 나설 것이 분명해지면서 군부독재에 협력했던
최규하의 대통령 임명에 따른 비관론이 자연스럽게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이런 생각에 비관적 입장이었던 윤보선, 함석헌, 김병걸, 백기완 등의 재야 인사들은 서울 명동
YWCA강당에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대통령
직선제,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결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는 계엄령 상황이었다. 이런 삼엄한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시위를 열겠다고 계획하면 군부와
경찰을 자극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재야 내에서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이번에는 독특한 형태를
가장하기로 결정한다.
『홍성엽 군과 윤정민 양이 여러 어른과 친지를 모시고 혼례를 올리게 됨을 알려 드립니다. 즐거운 자리에
함께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신랑역할을 했던 홍성엽,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2005년 53세의 나이에 지병인
백혈병으로 별세했다.
명함 크기의 이 작은 청첩장 500장이 계엄당국의 눈을 피해 재야 민주 인사와 학생들에게 은밀히
배포됐다. 신랑 홍성엽은 연세대학교 복학생으로 민주청년협의회 상임위원이었지만, 신부 윤정민은
가공의 인물이었다. ‘즐거운 자리’는 결혼식이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였다.
1979년 11월 24일 오후 5시30분 서울 명동 YWCA 강당으로 500여명의 결혼식 하객들이 빼곡히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회자인 기독청년협의회(EYC) 회장 김정택이 결혼식 시작을 알리자 신랑
홍성엽이 입장했고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유인물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참석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예상대로 신부의 입장은 없었고 준비위원장 박종태(전 공화당 국회의원)가 선언문을
낭독했다.
『신군부세력의 계엄체제 때문에 위장결혼식을 하게 됐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를 반대한다.”』
바로 그때, 이미 정보를 입수하고 대기하던 계엄군이 난입해 결혼식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엄청난
폭력을 휘두르며 연행하고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그 자리에서
98명이 연행되었고, 밖으로 빠져 나온 참석자들이 코스모스백화점 앞에 모여 “유신 철폐”,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통령 선거 반대” 등을 외치며 조흥은행 본점까지 거리시위를 벌이다 다시 44명이 체포됐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 윤보선, 백기완, 박종태, 양순직, 홍성엽 등 18명이 불구속 혹은 구속되었고,
67명이 즉결심판에 넘겨졌다. 이들에겐 포고령법 위반(불법 집회 및 시위)이 적용되었다가 바로
다음날 내란음모죄로 변경되었다. 수사과정에서는 참혹한 구타와 고문이 자행되었고 머리털이며
손톱이 다 뽑히는 등 대부분이 평생을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 당한 함석헌
당시 윤보선 전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