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교수신문 기자가 전화하더군요.올해도 하냐고 따졌는데... 한참을 설명했는데, 한 마디도 언급 없이 하던 짓을 또 하네요.
아래 글은 몇 년 전에 쓴 글인데 , 아직도 유효합니다. 교수신문도 반론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문과 방송은 따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든, 단체든 줏대가 있어야지....
2001년부터 '교수신문'에서는 우리 사회를 각각 “五里霧中, 離合集散, 右往左往, 黨同伐異 上火下澤”이란 사자성어로 요약하였다.
“오리무중”은 교수 신분의 불안정성을 주로 말하였고 선거가 있던 2002년을 “이합집산”으로 표현하였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오직 몸보신과 양지만을 선호해 이당 저당 옮겨 다니는 철새 정치인과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유리한 방향으로 분별없이 헤치고 모이는 모습이 그 여느 때보다도 두드러졌기 때문이었다.
2003년 한국을 우왕좌왕했던 해로 기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자 정치, 외교, 경제 정책에 있어 혼선을 빚고, 대구지하철 참사에서 본 것처럼 사회 각 분야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갈 곳을 잃는 모습을 보인 것이 가장 큰 선정 이유였다.
2004년의 “당동벌이” 같은 파끼리는 한 패가 되고 다른 파는 배척한다는 뜻을 가진 고사성어다. 글자대로 옮기면 “같은 무리와는 당을 만들고 다른 자는 공격한다”는 뜻이다. <<후한서>>의 <黨錮列傳>서문에서 나온 말이다. 대통령 탄핵, 수도 이전 문제를 두고 논란을 벌였던 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생각에 고개가 끄떡일 수도 있다.
지난해에 선정된 “상화하택”이라는 표현은 주역에서 온 말인데 ‘위에는 불 아래에는 못’이라는 뜻이다. 2005년 내내 정치·경제· 사회 영역에서 서로 상생하지 못한 채 비생산적인 논쟁과 대립, 분열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강 정구 교수사건, 사립학교법, 행정 도시법 등에서 대립이 선명하게 보인 게 그 이유이다.
먼저 이 사자성어는 많은 경우에 우리말이 아니다. 당동벌이도 상화하택이 그렇다. 한 해를 대표하는 사자성어는 아니었지만 혀는 칼보다 날카롭다는 “舌芒於劍”, 살갗의 털을 뒤져서 흠집을 찾아낸다는 “吹毛覓疵”도 우리말이 아니다. 또 이런 표현들은 무척 어렵다. 어렵다는 것은 나날의 삶에서 쓰이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리무중” 같은 표현은 중국의 옛일을 바탕으로 생긴 것이다. 중국의 옛날 일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오리무중 상화하택, 우왕좌왕‘ 등의 표현은 중국인 특유의 이미지에 바탕을 둔 생각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각각 불확실성, 대립, 방향 상실을 뜻한다. 올해 교수 사회의 바람을 담았다는 "若烹小鮮”도 우리말이 아니다. 자유방임주의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내용으로 보면, 이 사자성어로 대변되는 현실이 너무나 부정적으로 개념화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지난해의 갈등과 대립을 “상화하택”으로 표현하여 물과 불의 대립 관계로 표현하였다. 이런 언어의 틀 자체가 대립이란 피해야 할 것이란 생각을 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립과 갈등은 어느 사회나 있는 것이고 이를 금기시하는 것이야말로 어느 한쪽 편을 드는 것이 될 수 있다. 그 대립의 역사적 뿌리를 생각하면 이 대립이 소모적인 것만은 아니다. 해방 공간에서 좌우 대립은 결국 국가 폭력의 개입으로 ‘적’을 소탕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고 여기에는 외세마저 끼어들었다. 최근 몇 년 사이의 변화가 좌우 이념의 대립이라기보다는 극단적으로 치우친 이념의 시대가 가고, 좌파라는 딱지가 무서워 묻혀야만 했던 상식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뿐이다. 갈등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없다.
2004년의 대통령 탄핵은 당동벌이의 좋은 보기지만 이에 대한 성숙한 시민 사회의 대응도 기억될 것이다. “당동벌이”는 이 밝은 측면을 외면한 표현이다. 강 정구 교수를 둘러싼 논란도 이제는 이념 문제도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개적인 토론의 문제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보안법 폐지보다 더 성공적이다.
사립 학교법을 둘러싼 갈등도 단순히 물과 불의 대립처럼 피해갔었어야 했던 것만은 아니다. 남북의 화해도 좀더 탄탄한 길로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한글날이 국경일로 되살아 난 것은 미국말 숭배의 돌림병을 치료할 새로운 희망을 보여 주었다. 경제 분야의 양극화가 큰 문제로 되고 있지만 표면적 대립의 긍정적 측면을 볼 필요가 있다. 중국 사상은 유달리 조화와 중용을 강조한다.
사자성어 쓰기에서 올해 특이한 것은 이런 사자 성어로 현실 요약하기가 교수 사회의 울타리를 넘어 빠르게 번졌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올해 교수 사회의 바람을 담았다는 나라 다스리기를 작은 생선 굽듯이 하라는 “若烹小鮮”은 보수적인 구호라고 했고 기업의 임원들은 경제 양극화를 구름과 진흙의 다름 “雲泥之差”라 표현하였다. 국정원은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길을 개척한다는 “克世拓道”라는 말을 내세웠다. 이제 현학적인 말 쓰기 경쟁이 붙기라도 한 것일까. 본래 새해 휘호라며 전직 대통령들은 열심히 써 왔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름을 로마자로 쓰는 버릇도 노무현 님은 따르지 않았는데, 어쨌거나 말글 의식에서 한걸음 나아진 것이었다. 그런데 '교수신문' 사자성어로 한 해 요약하기가 이런 흐름을 갑자기 거꾸로 돌려놓았다. “DY”나 “GT”처럼 로마자로 이름 나타내기도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 고전 속의 어려운 말을 외우고 되뇌는 것이 고전 공부의 목적은 아닐 것이다. 중국 고전은 중화주의 이데올로기에 깊이 물들어 있다. 한자를 통한 언어 조작으로 지배/중화 이데올로기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유포되었다. 중화가 빛나기 위해서는 오랑캐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야만 했다.
유식함을 자랑하기에 안성맞춤인 사자성어를 쓰기에 앞서 오늘날의 우리에게 중국 고전은 아직도 상식이고 교양인가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 비실용적인 시문에 실용적인 중국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가졌는가. 말을 만들고 조작하는 것이 통치의 중요 방법이었음은 이제 상식이 아닌가.
사자성어에는 복잡한 정치학이 깃들어 있다. 권력이나 돈을 가진 사람들이 사자성어를 즐겨 만들고 퍼뜨리는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새로운 게 아니다. 사자성어라는 틀로 우리 역사를 보는 것은 중국인이 만든 틀 속에 우리의 앞날마저 가두는 일이다.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라고 할 수 있는 맥락이 분명히 있다.
현실을 낡은 중국 고전의 언어만으로 담으려는 시도는 문제를 일으킨다. 차라리 우리 속담으로 한 해를 요약해 보는 것은 어떤가. 이를테면 우리 역사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는 말처럼 적절한 게 없다. 비록 결실은 맺지 못했으나 국가 보안법 폐지가 의제로 떠올랐던 것은 탈냉전의 길이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15년 만에 한글날이 국경일로 되살아났다. 이런 것들을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음을 보여 준 것으로 보면 어떤가. / 부경대, 철학
첫댓글 정말 쓰레기 같은 교수신문입니다. 아직도 이런 말장난이나 하고 있으니... 언제 정신을 차릴런지 답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