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의 농토 일천만평~ 현 고려대학교의 창립자 김성수는 요즘도 ‘항일 투사’들에게 친일파로 매도되고 있다. 친일 인명사전에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넣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자들은 매일 그런 궁리 만 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대한민국 헌법 기초위원 중에 한 사 람이던 고려대학교의 유진오가 ‘농지 개혁법 86조’를 들고 애국 애족 운동의 선봉장이나 다름없던 인촌 김성수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선생님, 농지 개혁법의 제정은 대한민 국 토지의 8할을 점유하는 지주와 소작농 농민들과의 대립을 줄이게 되니 민심을 달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김성수는 조상이 물려준 넓은 농토를 갖고 있는 대지주의 후손이었다. 개혁법이 시행되면 그는 앉은자리에서 조상이 물려준 그 넓은 농토를 다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될 것이 었다. 그 농토가 얼마나 방대했는가 하면, 면적이 무려 3,247정보, 평으로 환산하면 대략 일 천만 평에 가까운 넓은 땅이었다. 김성수는 눈 하나 끔쩍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 셔야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진실한 애국자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농토는 농민에게”라는 대원칙을 내걸고 신생 대한민국은 안간힘을 다 쓰던 때였다. 김성수가 “No” 했으면 아마 당시 좌익들이 온갖 시비를 걸어 신생 공화국은 또 다른 시련을 면치 못하였 을 것이다. 그런 애국자를 ‘친일파, 민족 반역자’로 내몬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 아닌가. 이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 된다... -김동길-
"김성수"
한국 근현대 사업가·언론인·교육자·정치가.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 산업진흥에 의한 민족자본의 육성, 언론활동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해 노력했으나 일제 강점기 말에 친일 단체에 참여하고 시국 강연과 기고를 하는 등 친일의 행보를 보였다. 중앙학교와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를 인수 운영했고, 경성방직회사를 창립했으며,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해방 후에는 송진우와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당했으며, 1951년에는 제2대 부통령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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