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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소수민족 탐방 답사를 다녀왔다.
힘들고 또 짜증나는 여행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좋았던 것 같다.
인간의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다시는 여행 안갈거라 맹세했는데 벌써 흔들리고 있다.
이렇게 여행기를 쓴다는 것 자체가 또 집나갈 때를 계획하는 시초다.
어쨌거나 심심할 때 읽어봐라. 자주 가는 여행지는 아니니 신기한 점은 있을 것이다.
2008. 01. 11(목) 해님 조금
어제 돌아온 중국 땅 다시 밟으러 간다.
내가 외교 통상에 능한 사람도 아니고 동시통역사처럼 이 땅 저 땅 찾아다니며 살아야 할 이유도 없는데 방학만 다가오면 나도 한비야처럼 ‘바람의 딸 박영희’가 되고 싶다. 아닌 말로 한비야는 화려한 싱글이고 프리랜서며 ‘여행가’라는 직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지만, 40 넘은 아줌마에 애가 둘이나 되고 남편에 친정엄마까지 모시고(?) 사는 내가 방학마다 철딱서니 없이 여행 다닌다고 설쳐대는 꼴을 대부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 놈의 방랑벽은 여행 한번 못가고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눈이 퀭하니 풀리고 밥맛도 없고 삶의 열정도 줄어들고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이상한 비감에 사로잡힌다. 마징가(남편)는 바로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한다.
“미리 말하는데 내가 가지 말라고 해서 안간 것 아니다. 괜시리 눈에 힘빼고 쳐다보지 마래이. 간 떨린다. 글고 다음 방학에는 꼭 가라 알았제?”
나이 마흔 셋에 장래희망을 논하는 건 우끼지만 나의 장래 희망은 ‘문화전도사 역사가이드’다. 타이틀은 거창해도 뭐 특별한 건 아니고 내가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느낀 것들은 새로운 여행자들에게 안내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보수는 없어도 되지만 뱅기표와 숙식은 제공받는 조건으로 기쁘게 또 열정적으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언제 시작할 수 있을 지, 누가 고용해 줄 지 알 수 없지만 세월이 좀 지나 사람들이 쇼핑하고 소비하는 여행 패턴에 질릴 때쯤이면 나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기회는 원래 준비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법. 그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며 내 노년의 꿈을 준비하는데 요번 여행도 아주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된다.
2007년은 어느 해보다 후딱 지나갔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속 바쁜 일이 생기고 그 일이 해결될 즈음 또 다른 사건이 나타났다. 출국도장 한번 못 찍고 한해를 보낸 결과인지 수업대회에서 1등급을 받았고, 유공교사 연수로 바로 나흘전(2008.01.07)부터 어제(2008.01.10)까지 상해 항주 소주 등지로 연수를 다녀왔다. 유공교사 연수는 12월 17일에 결정된 일이라 귀주성 여행과 날짜가 겹치면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연수는 확 포기해 버리기에 아까운 매력이 몇 개 있었는데 첫째, 몽땅 공짜에다 둘째, 공식적으로 소학교를 두 군데 방문하고 수업을 참관할 수 있고 셋째, 동학년 친한 후배랑 한방을 쓰며 3박 4일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두 여행이 겹친다면 어느 것으로 가야할까 하고 날짜가 통보되는 보름동안 즐거운 고민을 했다. 하지만 가을부터 내내 귀주성 여행을 준비해 온 나의 정성을 하늘이 알아주셨는지 두 여행이 하루 상관으로 겹치지 않아 다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출발!
내가 괜찮다고 몇 번이나 사양하는데도 마징가는 시간을 내어 공항까지 태워주었다. A형 남자를 남편으로 두면 좋은 점은 이런 자상함이다. 경상도 남자치고 무뚝뚝하지 않은 남자 별로 없어 마징가 역시 하루 3마디(아는? 밥도. 자자.) 정도 밖에 안하지만, 마징가만큼 소리 없이 자상한 남편도 드물다는 거 잘 안다. 또 마누라가 방학만 되면 10일에서 20일은 기본으로 집을 비우는 걸 좋아하는 남편 드물고, 별로 티 안내고 참아주는 남편 역시 거의 없다는 거 잘 안다. 그래서 나는 마징가를 진짜 사랑한다. 내 영혼의 자유를 인정해 주는 딱 한사람이라서.......하지만 다른 남선생님들은 이런 말로 내게 농담을 한다. 내가 집 비우는 사이 남편이 더 좋은 일(?) 하는지 어떻게 아느냐고.......글쎄다. 내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그런 일들까지 상상하며 불안해하면서 내 하고 싶은 거 포기하는 건 나답지 않다고 생각된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다. 부부란 자고로 믿고 또 믿어야지 우짜리요. 마징가가 나를 믿고 보내는 것처럼 나도 마징가 믿고 집을 떠난다.
오전 11시에 김해공항 국제선 출발 2층 안내데스크 앞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10시 20분도 안되어 도착해 버렸다. 아직 일행들이 모이려면 한참이나 남았고 어제도 상해 공항의 안개 때문에 비행기 이착륙이 지연되어 서너 시간 늦게 돌아온 기억에 오늘은 별일 없이 출발하려나 하고 비행기 시간 안내 전광판을 살펴보다 사방을 둘러보니 어라! 나보다 빨리 공항을 접수하신 문한광님 부부가 계셨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무척이나 재미있는 큰 언니 박민옥 여사님 부부는 지난번 장강삽협 갈 때 함께 여행을 했었다. 두 분이 여행 중에 너무도 자연스럽고 다정하게 서로를 아껴 주시는 모습에서 나도 나이 들면 마징가랑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또, 같은 아파트 옆동에 살던 주민이기도 했었던 인연으로 오래도록 기억되어 만나 뵙고 싶은 분들이었는데 여행을 함께 하게 되어 신이 났다. 이교수님 모임에 지각하면 면박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들이라 그런지 일찌감치 자리잡고 앉아 계시니 우리는 참으로 한 팀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행들이 속속 도착하여 11시에 이르자 2팀 빼고는 모두 모였다. 제일 늦게 도착한 사람도 겨우 6분을 지각하는 것으로 여행의 서막이 올랐다.
비행기표를 받아 짐을 부치고 배웅 나온 사람들과 간단한 인사를 하는 여느 때의 이별 행사가 이어지고 출국 수속을 밟았다. 면세 존을 지나 게이트 앞에서 비행기가 정시에 출발한다고 안내 방송이 나왔는데 한 켠에서는 도시락을 나누어준다. 뭔 일인고 보니 일본가는 비행기가 지연되어 기다리는 승객들에게 도시락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요새 항공사와 여행사는 승객들의 불만 사항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객의 입은 바로 인터넷이다. 인터넷이란 무서운 체제 앞에선 그 누구도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계약상 ‘갑’이 아닌 ‘을’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탄 비행기는 에어차이나 CA130편으로 북경까지 1시간 50분이 소요된다고 한다. 가로로3-3형으로 6명이 앉는 이 비행기는 좁은 좌석 공간 때문에 종종 옆사람과 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는데 오늘은 석교감 선생님이 바로 운명적 옆 사람이다. 석교감 선생님은 실크로드 여행 때 20일이나 되는 긴 기간동안 한 솥밥을 먹었고 여행을 다녀와서 학회 발표 때에도 가끔 뵈었다. 본인 스스로 별칭을 ‘연산동 왕제비’라고 하시는 카리스마 넘치고 소탈한 매력남. 부하 직원들의 마음을 미리 알고 두 서너 수 앞에서 대책을 세우시는 교감 선생님의 혜안에 여러 번 놀랐던 터라 농담 삼아 하시는 말씀에도 무슨 내력이 있을 것 같이 기대가 된다. 요번 여행도 석교감선생님 옆에만 있으면 마구 즐겁고 재미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비행 중 파트너가 석교감 선생님이라면 한방 쓰는 침실 파트너는 정수정선생님으로 우리 학교 막내둥이 교사다. 평소에 별로 말은 없지만 항상 눈부터 웃고 있는 수정이는 모든 선배들이 귀여워하고 챙겨주고 싶어하는 ‘완소녀’이다. 직원 배구를 함께 하다 방학 때 중국으로 여행 간다고 자랑하며 같이 갈사람 없냐고 큰 소리로 말했더니 수정이가 살짝 묻는다. 저도 함 가볼까요? 하고...... 긴가민가하고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교수님께서 메일을 보내시고 여행비를 낼 날짜가 다가오자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갈끼가? 간다고 한다. 여행 파트너가 생겨 기분 좋았지만 약간은 의외였다. 수정이랑 사적으로 많은 만남을 가지지 못했고 함께 한 술자리가 몇 번 있었지만 특별히 잘해준 것도 없었는데.........또 이 여행에 대해 여정이나 참가하는 사람 등 한 가지도 제대로 묻지 않고 함께 가겠다니....... 나 말고 또 한 사람의 이해하기 애매한 여행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여정을 알아가는 과정처럼 후배 수정이를 알아가는 것으로도 이 여행은 흥미진진할 것이다.
간단한 기내식을 먹고 나니 바로 북경 공항 도착이란다. 이건 해외라고 할 수도 없다. 서울 가는 거랑 별반 다를 것도 없는데.......내려서 보니 북경 공항이 장난 아니게 크다. 짐 찾으러 가는 길도 이리꼬불 저리꼬불 긴 다리로 성큼성큼 가시는 교수님을 따라 잡으려면 내 다리가 좀 더 부지런해야 한다. 북경 도착 인원은 모두 25명으로 예비 모임보다는 2명이 늘어났는데 여기서 내가 가장 신경 써야 할 사람은 초등6학년 한예진과 황남경이다. 예진이 아버지께서는 출판업을 하시는데 교수님과 몇 번 만나신 적이 있었단다. 두 아이들이 방학을 이용해 일본으로 여행을 간다고 하니 교수님이 이 팀에 합류하라고 하신 모양이다. 문제는 내가 3조 조장이고 이 둘이 3조에 편성되었다는 것이다. 무릇 여행이란 혼자 가는 게 젤로 좋다고 여겨 내 딸도 두고 떠나왔는데 6학년 둘을 챙기라고 하시니 책임감과 동시에 야속한 마음이 생기려고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6학년인 우리 둘째도 데리고 올걸.......
하지만 나의 이런 얄팍한 마음이 바로 들켜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벌써 장사장과 교수님은 인사를 끝내고 있었다. 작년 희애 결혼 때 보고 오랜만에 만나는 터라 장사장과 서로 인사말 한두 마디 나누었는데 느닷없이 교수님이 고함을 지르셨다. “예진이랑 남경이 어딨노?” 그러고 보니 둘이 보이지 않는다. 바로 직전까지 보았고 입국장에서 10m도 나오지 않았는데 어디로 사라졌을까? 우와 미칠 노릇이다. 교수님은 빨리 입국장 안으로 들어가 보라고 난리난리를 하신다. 에이 정말 미치겠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북경 공항은 사람 잃어버리면 찾기 정말 힘들어 진다. 장사장이 통역하여 입국장으로 들어갔다. 짐 찾는 곳에도 화장실에도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고 덩달아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한 5분이나 지났을까? 밖을 내다보니 다들 손을 흔들며 나오라고 손짓한다. 아이들이 돌아왔나 보다. 하지만 이미 구겨진 내 체면은 무엇으로 보상하리요. 아니나 다를까 이교수님은 조장이 조원 제대로 못챙겼다고 그 큰 공항에 쩌렁쩌렁 호통을 하신다. 아이고 창피야. 이건 국제 망신이다. 13일 내내 머리수 세며 보낼 걸 생각하니 여행이고 뭐고 골이 아프려고 한다.
주차장으로 오니 40인승 큰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앞 뒤로 문 2개고 차는 깨끗하고 쓸만하게 보였다. 북경과 산해관을 도는 2박 3일 동안 장사장이 직접 가이드 하겠다고 한다. 생각보다 다양하고 많은 사업을 하고 있으며 내가 처음 만났던 때보다 훨씬 거물이 되어버린 장문천 사장이 직접 가이드를 한다고? 교수님을 생각하는 장사장의 마음을 아는지라 반대하지도 못했고 내색하지도 못했다. 내가 아는 장문천은 이미 여행객을 가이드하고 그 지방의 역사를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몸값이 비싼 사람이다. 그가 벌려 놓은 사업이며 그가 챙겨야 할 식구들이 이미 수백명대에 이르는데 3일이나 우리한테 붙잡혀 있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으려나? 아마도 3일 내내 핸드폰이 울릴 것이며, 큰 소리로 작은 소리로, 한국말로 중국말로, 지시하고 협상하고, 이리저리 바쁠 것이 뻔하다. 이교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가이드 한다고 나섰겠지만 과연 자기의 의도대로 가이드가 잘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차는 동쪽으로 머리를 돌려 산해관으로 향한다. 오늘은 이 버스로 4시간을 달려 하북성 진황도시에 이르고 내일부터 각산과 산해관, 노룡두 등의 본격적인 답사가 시작될 예정이다. 고속도로는 별달리 좋거나 잘 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차창 밖 쭉쭉 뻗은 묘목들이 자라고 있는 묘포지가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실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장사장은 계속 마이크를 잡고 분위기를 주도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한 때 잘나가던 가이드 생활로 지금 사업들의 기반을 닦았다고 하는 장사장의 현재 가이드 실력은 글쎄? 교수님 이하 답사오신 분들의 수준을 너무 고려한 나머지 자기 색깔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쩔쩔 매지만 그 어리숙함 속에 누구보다 뜨겁고 큰 야망이 숨어 있음을 나는 안다. 장사장의 가이드적 이야기, 자전거로 산해관까지 친구랑 여행 온 이야기, 자기가 처음 본 바다인 노룡두 이야기 등을 듣다보니 드디어 진황도시에 진입했다.
진황도시는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자리하고 있는데 수도 베이징에 인접한 자원 수출항구도시이며, 유명한 피서휴양지인 북대하와 만리장성의 기점인 산해관을 관할하고 있는 중국의 대표적 관광도시이다. 해운조건이 매우 편리하여 대형 항구로 성장하였으며 화물 통과량이 거의 억톤에 달하는 중국에서 제2위를 차지하는 항구 도시다. 우리나라와 수출 수입활동도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진황도의 산해관공항은 15개의 항로가 개설되어 17개 도시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가 가려고 하는 곳들은 진황도시의 3 구역중 하나인 산해관 지역에 집중되어 있어 그곳을 방문할 예정이지만 사실 중국인들은 진황도시를 최고의 여름 피서지 북대하로 기억한다고 한다.
진황도 집입로에서 현지 가이드 오국화 양을 만났다. 얼마 전 연변 처녀가 주인공이었던 드라마에서 양국화가 솔직하고 당찬 연변 아가씨로 소개되었는데 오국화 역시 예쁘고 솔직하고 성실한 아가씨 같아 보인다. 연변 출신 유학생으로 자신이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함에 대해 퍽이나 미안해하였다. 석사 논문을 쓸 때 조선족 교과서를 비교 연구한 적이 있어 나는 국화 양의 말을 마음으로 이해했다. 중국 땅 동북 3성(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의 조선족들이 받는 한국어 학습 제재는 철저히 중국적이고 또 한국적 영향이 있다고 해도 북한쪽에 가까워 낱말의 표현방법이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한마디라도 열심히 배우려는 그녀의 노력이 어여뻤다.
중국에 내려 최초로 먹는 밥, 당연히 중국 음식이겠거니 했는데 한국음식점으로 간다. 한글 간판이 떡하니 걸려 있는 이곳의 이름은 ‘새미원갈비’다. 진황도가 한국 관광객들에게 별로 인기 있는 곳은 아닐 텐데 우째 한국 음식점이 있을까? 아무래도 우리나라와 경제적인 관계가 밀접한 항구도시의 영향인 듯 싶다.
오늘 우리가 묵어갈 곳은 진황도양성대주점으로 진황도 역 앞 큰 길가에 있었다. 각자 방을 배정받고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기도 전에 밤외출 콜을 받았다. 예전에 실크로드에서 밤마다 먹었던 양꼬치가 그립다고 노래를 불렀더니 장사장이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양꼬치 잘하는 곳이 있다고 데려간단다. 원래 여행을 즐기는 데는 밤문화를 얼마나 아름답게 누리느냐하는 데에도 관계가 깊다. 중국어가 서툴러 혼자 외출을 감행하지는 못하지만 누군가 간다면 두 팔 걷어부치고 낑겨야 한다고 굳게 믿는 편이다. 양꼬치 일행은 나, 수정, 우영, 석교감쌤, 장사장, 민교수님 등이었다. 수정이 빼고는 모두 예전에 장사장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라 편하게 웃으며 호텔을 나섰다. 택시 한 대를 부르고 호텔 차를 한 대 빌려 나섰는데 도착한 곳은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너무 열심히 양꼬치를 먹고 있는 대형 식당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 자그마한 방에 6명이 앉아 메뉴판을 보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메뉴판으로 그 나라의 음식 내용을 짚어 낼 수 있으면 훌륭한 여행가라 할 만한데 아직 나는 멀어도 한참 멀었다. 장사장이 알아서 꼬치와 옥수수, 고갈비 같은 명태조림을 시켰다. 숯불과 2층짜리 철사 선반이 오고 차가운 양꼬치가 나왔는데 2층에 올려놓은 꼬치를 1층으로 내려 숯불에 지져 먹는 것 같았다. 비록 그 크기는 작고 주인이 직접 즉석에서 구워주는 신장 전통의 양꼬치는 아니지만 냄새만큼은 그럴 듯했다. 모두가 체면을 차리고 술을 한순배 돌리는 사이 나는 열심히 너무 열심히 꼬치를 먹어 치웠다. 양고치만 맛있는 건 아니다. 구운 옥수수는 왜 그리도 감칠맛이 나든지........저녁도 배부르게 먹었는데 내 위장의 한계는 어디인지 나도 모르겠다. 실컷 먹고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신신노래방’ ‘무적불고기한국관’ 등의 간판을 보았다. 음......여기서도 우리 민족의 음주가무 실력은 널리 알려져 있나보다.
호텔로 돌아와 진황도의 첫 밤을 맞는다. 내일부터 힘겨운 여정이 시작되리니 잘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