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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482 이준우 삼강행실도 열녀편 서평.docx
『삼강행실도』 열녀편,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지켜야 했던 유교적 윤리에 대한 고찰
20111482
역사학과
이준우
들어가면서
세종 10년에 진주의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죽인 일어 벌어졌다. 이에 세종은”아내가 남편을 죽이거나 종이주인을 죽이는 일은 그래도 간혹 있지만 이제 아비를 죽이는 자가 생겨났으니 이것은 반드시 내가 부덕한 소치다”[1] 라고 말할 정도로 세종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세종은 그 해 10월의 경연에서 군신에게 효제의 마음을 돋우고 풍속을 두텁게 하는 방법을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는데, 여기서 변계량은 효에 관한 서적들을 백성이 널리 읽게 할 것을 제안했고, 이에 세종은 집현전의 설순에게 명하여 새로운 교과서를 편집할 것을 명하였으며 이를 세종 14년(1432) 6월 9일에 완성한 것이 바로 『삼강행실도』이다.[2] 세종은 편집 한 직후 16년 4월 27일에 『삼강행실도』를 간포해 서울과 외방에 보급하고 학식있는 이들에게 가르치게 했으며[3] 그해 11월 24일에는 종친과, 신하 그리고 여러 도에 책을 보냈다.[4]
세종이 단 한 사건 때문에 국고를 소비하면서 까지 편찬을 명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의 시대는 아직 3-4대 밖에 지나지 않아 아직 왕권이 견고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고려 말에 입사한 인물들이라 국가 보다는 혈통, 지연 등에 얽혀있어 새 왕조에 아직 완전하게 녹아들지는 못한 상황이었다.[5] 거기에다 아직 불교가 백성들 사이에 만연해서 백성들의 내면이 완전히 유교적 윤리에 교화된 상태가 아니었다.[6] 또한, 당시 조선 초 사회는 세종과 유학자들이 바라던 유교사회와는 거리가 있는 상태였다. 전 계층의 여성들의 이혼과 재혼이 허락되었고 따라서 유교를 철저히 신봉하던 세종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풍조는 철저히 금지해야 하는 것이었다. 특히 당시 명의 주원창은 이러한 결혼풍습을 몽골의 것으로 판단하여 매우 혐오했으며, 세종 또한 명나라의 정책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7] 다시 말하자면 세종은 이 교과서를 편찬, 간행 함으로서 사대부는 물론 일반 백성들의 풍속도 크게 변화하고 정치의 도리가 더욱 높아져서, 가정에 있을 때에는 모두 효순한 아들이 될 것이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결과적으로 왕업이 튼튼해져서 이를 만세까지 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8] 이는 조선의 통치시스템을 보완하려 한 것이며 즉 『삼강행실도』는 개인의 행동만이 아닌 유가정치의 의식화, 내면화를 위해 제작 된 책이라는 의미가 된다.[9] ‘즉, 가정과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혼란해진 기강을 바로잡고, 유교적인 전통을 시급히 확립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효를바탕으로 어른을 공경하도록 유도해야 하며, 열을 바탕으로 개가를 금지하여 이혼과 재혼을 원천적으로 막는조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또 국가차원에서는 새로운 왕실을 건립한 후 신하들의 충성과 절의를 기반으로 한 관료질서의 확립이 시급한 당면과제였다. 그래야만 가정과 사회, 국가가 모두 빠른 시일 내에 안정될 수 있었다. 따라서 세종은 이러한 당시의 여러문제들을 『삼강행실도』 편찬과 보급을 통하여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10]
『삼강행실도』는 세종 즉위 후에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성종 대에 한글이 추가된 선정『삼강행실도』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도 19세기까지 출판되어 조선백성들의 유교윤리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 떄 양계사회에서 친계중심의 사회로 변화하고 양자를 세우는 것에서 동성으로 고집하는 풍속으로 바뀌고, 혈통보다는 종법이 강조되고, 사회가 불교에서 벗어나 유교로 변한 이유로 바로 『삼강행실도』 같은 국가편찬 교과서들의 역할이 컸다.[11] 실제로 중종이 열녀등과 효자들을 기리기 위해 국가적으로 조사한 사례 중 방권의 아내 유씨가 남편이 죽어 개가를 권하자 수절했다는 기록 또한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삼강행실도』에 자주 나타나는 열녀의 행동이다.[12] 이는 적어도 중종의 시기에는 『삼강행실도』가 강조한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마침내 서민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삼강행실도』 열녀편에 대한 고찰, 국가의 성적종속성 강요를 중심으로
그렇다면 내용상으로는 어떨까? 우선 총 110편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그 중 95편이 중국의 사례, 마지막 15편이 백제, 고려, 조선의 사례들로 편성되어있다. 이는 다른 충신편, 효자편에도 비슷한데, 중국의 예를 따르려던 당시의 사대주의를 반영해주기도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유교서적들이 중국에서 제작되었다는 한계와도 무관하지 않다. 또 다른 공통적인 특징은 마지막에 한반도의 사례들을 언급한 것이다. 이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세종의 입장에서는 본토의 사례를 추가 함으로서 더욱 친근감을 주고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이라는 판단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림과 시를 같이 실었는데, 이는 글을 잘 못 읽는 일반 백성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함에 있다.[13] 다만 이륜행실에 나오는 그림을 벽이 붙이고 잊지 않으려 한 율곡이이의 사례를 보아 실제 이유는 글을 못읽는 백성을 위한 배려보다는 그림들이 백성들의 머리에 선명하게 각인되게 하는 일종의 장치의 역할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14] 이는 기존의 유교 교과서인 소학과는 사뭇 다른 점인데, 이는 소학이 한자를 읽을 수 있었던 선비와 사대부, 즉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어떤 여성관을 가져야 하는 지 가르치는 텍스트였던 반면 『삼강행실도』는 여성들의 유교윤리 내면화를 위해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15] 실제로 28편 신씨취사에서 에서 신씨는 자기 남편을 죽인 유요가 자신을 아내로 삼으려 하자 “여자는 두 번 초례(결혼)하지 않는다”라며 자결하는데, 이 두번 결혼 하지 않는 다는 대목은 소학에 인용된 교특생에서 유래한 것이며, 56편 이씨액옥(이씨가 옥중에서 목매다)에서도 “내가 어찌 두 지아비를 섬기랴?” 라고 하며 자살하는 대목에서도 나타난다.[16]
앞서 말한 중국의 사례들은 소학이나, 후한서 같은 여러 중국의 고서들에서 출처해온 것들이며 이들 중 다수가 당나라 시기에 출판된 『고금열녀전』에서 인용한 것이다.[17]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고금열녀전』의 편집성격이다. 『고금열녀전』은 유향의 『고열녀전』 총 124편 중 66편을 차용했는데, 이중에서도 1권 모의전(14편중 12편)과 4권 정순전 (15편중 13편)의 인용비율이 높다.[18] 이는 모의전이 어머니의 아들의 관계, 훈육이 중심이고 제 2권 현명전은(15편중 9편) 아내와 남편의 관계 중 현명한 여성상이 많이 포함된 작품인 반면, 4권 정순전도 같은 아내/남편의 내용이지만 관계에서 예와 윤리에 비정상일 정도로 집착하는 부인들이 등장한다.[19] 또한 3권 인지전(15편중 8편), 6권 변통전(15편중 8편) 같은 경우 비교적 덜 인용했는데, 이는 이 두 권이 여성이 빼어난 추리력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합리적인 모습들이 많이 나온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20]
『삼강행실도』 열녀편의 경우 특히 전한의 사례인 1-20편 중, 8,9,10,11편을 제외하고 모두 『고금열녀전』에서 인용했다. 그런데 이 16편 중 7편이 『고열녀전』 4권에 해당되는 부분에서 출처했다.[21] 그리고 인지전, 변통전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현명전도 단 한편만 출처 되었는데, 현명전에서 대부분 여성이 남성보다 나은 사고를 보인 사례들이 있기 떄문이다.[22] 심지어 1권 모의전에서도 단 두 편만이 출처되었으며 추맹가모(맹모삼천지교 11편) 이후는 다 사라졌는데 이는 여성이 남성아들을 훈육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편(노칠실녀)은 조선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많이 인용한 후한서에서도 여성-아내만의 관계를 선택했다.[23]
이러한 편집과정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사실 유향이 저술한 『고열녀전』은 여성들 또한 남성처럼 뛰어난 능력을 지님을 증명하는 사례들이 상당히 많이 포함된 책이다. 그 예시 중 3권 인지전의 노칠실녀는 평범한 여성 또한 뛰어난 국제정치능력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는 유향의 의도치 않게 포함시킨 것이다.[24] 본래 성리학의 남성중심주의를 관철시키기 위해 책을 집필했지만 그가 살고 있던 한나라 시기는 유가적 논리가 완전하게 성립한 때가 아니어서 의도치 않게 우수한 여성의 사례들을 포함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유교사상이 더욱 견고히 성립된 후대에서 다시 한번 재정립한 것이 『고금열녀전』이고, 이를 조선의 『삼강행실도』 열녀편은 추가 선별작업과 사례 강조 등을 통하여 가부장적 사회관을 견고하게 성립시킨 것이다.
이러한 가부장적 여성관은 특히 16편 여종지례(여종이 예를 알다)에서 여종이 하는 말로서 소학에서 나타난 여성관이 여과 없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여종은 남편에게 새 첩이 생겨 동서가 떠나기를 권함에도 “부인은 한번 초례(결혼)을 치르면 고치지 않으며, 지아비가 죽어도 시집가지 않는다”라고 발언하여 첩에게 선물도 보낸다. 이것이 『삼강행실도』에 출처된 이유기도 한데 여종은 여성이지만 남성중심적 사회관의 여성관을 완전히 내면화한 모습을 보여 준다. 이를 열녀의 탄생의 저자인 강명관은 성적 종속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았다.[25] 41편 숙영단발(숙영이 머리털을 자르다)에서 남편이 귀양을 가면서 해어지자고 하자 “남편은 하늘인데 어떻게 배반합니까?” 라고 발언하는 등 여성의 성적 귀속성은 『삼강행실도 열녀편』에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공통주제이다. 이 성적 종속성은 즉 남성은 자신들이 반려자를 무시하고 첩을 삼거나 다른 여성을 강제적인 방식으로 취하는 것에 대한 제제가 없지만 굳이 여성에게만은 소위 정절이라 불리는 유교적 예를 지킬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 사례로 52편 이씨유해(이씨가 유해를 지고 오다)에서는 남성이 덮 치려고 팔을 잡자 이씨는 그 팔을 몸을 더럽힐 수 없다는 이유로 잘라내 버린다. 남성의 성폭행의 폐해를 여성이 그래도 감당하는 사례가 열녀의 사례로서 버젓이 올라와 있는 것이다.
성적 종속성은 『삼강행실도』의 설명에 따르면 죽음을 무릅쓰면서 까지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110편 중 무려 83편이 여성들의 죽음으로 귀결되었고 그 죽음의 방법들마저도 역겨운 사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의 팔을 자른다던가, 도둑에게 욕을 하면서 저항하다 창자가 잘리거나(81편 모씨가 창자를 찢기다), 남편대신 인육이 되어 먹힌다던가 (86편 취가가 삶아지길 원하다)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편들의 전개는 비상상황이 발생하고 남성은 여성을 범하려 하면 여성은 자학적인 방법으로 저항하고 살해 당하거나, 혹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교육적인 대사를 말한 후 자살한다. 그 중, 이 책이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여성의 저항과정이다. 그리고 이 죽음을 택해야만 열녀가 되었고 이는 마치 죽음이 열녀의 필수 조건인 것으로 보였다. 즉, 강간을 당한 뒤 살아남거나 강간 당한 뒤 살해될 경우 열녀가 될 수 없다는 뜻이며 격렬히 저항하지 않는다면 열녀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26] 다시 말하자면 극한 상황을 묘사 함으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정조를 지킬 것을 강요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비상상황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크게 보면 남편이 죽은 상황이 배경인 편이 총 27편이고 전쟁을 배경으로 삼은 편은 무려 53편이나 된다. 더 상세하게 보면 남편이 죽어 부모나 친지가 개가(재혼)을 권유하거나 (총 9편), 권력자가 개가를 강요하는 경우(총 14편), 남편이 첩을 얻는 경우(총 1편)가 있지만 이중 절대적으로 많은 종류는 바로 반란, 전쟁이 일어나 강간의 위기에 빠지는 경우이며 총 47편을 차지 한다.[27] 그리고 이들 중 절대다수가 저항하다가 결국 자살 혹은 타살로 목숨을 잃게 된다. 이렇듯 극단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삼은 편들을 중심으로 『삼강행실도』 열녀편을 편집한 것은 조선 왕조가 위기상황에서도 남성 중심의 성적 종속성이 나타나기를 희망한 것에 있다.[28] 특히 주인공이 왕비인 편이 대부분인 첫 10편에서 첫 편(아황, 여영이 강상에서 죽다)외에는 안 죽는다는 사실은 사회의 어느 층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인지는 뻔하다.[29]
이러한 ‘숭고한’ 죽음들 중, 특이한 사례를 발견 할 수 있었는데, 50편 열부중도(열부가 칼에 맞다)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지키려 칼을 맞음에도 끝까지 도둑의 소매를 놓지 않고, 51편 주처견매(주적의 아내가 팔려나가다)에서 여성이 남편의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을 팔아서 기꺼이 인육이 된 사례, 86편 취가가 삶겨지길 원하다 에서 남성대신 인육이 된 사례 그리고 107편 김씨박호(김씨가 호랑이를 때리다)에서 아내가 남편을 지키기 위하여 호랑이를 때린 사례 등에서 남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마치 남편이 죽으면 자신은 의미 없는 존재가 되는 것처럼. 이를 강명관은 『삼강행실도』에서 이 여성들은 성적종속성이 관철된, 주체를 박탈 당한 이들이며 오로지 성적대상자인 남성이 있기에 존재하는 이들이며, 남편이 죽는 것은 곧 자신이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고 해석했고 열녀의 행위, 즉 열행은 남성의 성적 지배욕에서 시작하여 이렇듯 심지어 여성들의 목숨마저 요구한 것으로 해석했다.[30]
이에 이혜순 이화여대 교수는 그들의 죽음에 다소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많은 경우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죽음을 택한 것에 주목하며 이를 무의식적인 방어행위로 해석함과 동시에 순결에 대한 강한 집념으로 비록 아까운 목숨을 보리더라도 그들의 죽음이 후대에 찬양을 받을 것을 기대한 소망 또한 나타난다 보았다.[31] 이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죽음, 부부의 질서를 위한 죽음, 가족의 질서를 위한 죽음, 그리고 사회적 질서를 위한 죽음으로 나누면서 그들의 죽음을 국가의 폭력을 정당화 하기 위한 이야기 보다는 개인들의 가치관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까지 던진 개인적인 사례들로 해석했다. 특히 부부의 질서를 위한 죽음에서 여성이 시집 온 가문의 일원이기보다 남편과 아내의 개별적 관계로 남으려는 강한 욕망이 있다고 판단하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삼종지의라는 전통윤리의 순응 이라기보다 변동으로 간주했다.[32] 다소 상반되는 두 입장을 보면서 개인의 정체성을 위하여 서술된 사례들을 조선이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판단을 해보았다.
이렇듯 『삼강행실도』는 상술한 열녀의 가이드라인을 형성했다. 그 후에 열녀로 등록된 이들에게 열녀라는 명예훈장과 열녀의 집안의 가족들과 그 공동체 일원들에게 수훈을 약속 했다. 열녀가 나온 마을에는 호역을 면제해 주고, 아들과 손자들의 부역이 면제되었다.[33] 이러한 보상정책을 통해 조선 조정은 유교적 사회관을 권장한 동시에 여성들에게 비상상황 시 죽을 것을 강요 하고, 그 주위 공동체 일원들 또한 여성들의 ‘열녀화’에 동참하도록 하는 국가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정약용은 남편이 편안히 천수를 누리고 안방아랫목에서 조용히 죽었는데도 제 목숨을 끊는 것을 국가차원에서 보상하는 것을 지적함과 동시에, 죽음을 빌미로 집안의 명예와 부역의 감면이라는 혜택을 줌으로서 여성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것을 비판했다.[34]
상술한 바와 같이 『삼강행실도』 열녀편은 여성을 남성의 성적대상으로만 국한 하며 여성들이 성적 종속성에 목숨을 걸도록 강요 함으로서 조선의 여성차별적 사회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바가 분명한 사실이지만 긍정적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삼강행실도』 열녀편에서 열녀로 기록된 주인공들은 황후로부터 천민에게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나타났다. 다시 말하자면 『삼강행실도』는 여성을 지배하는 논리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성 차별적인 당시 유교이상관념의 문제점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어느 신분에 있든 유교사회에서 바라는 행실을 하면 충분히 ‘명예’와 수훈을 받을 수 있다는 평등주의를 보여주기도 하는 책이다. 특히 중종 23년에 열녀를 지정한 목록에 따르면 열녀에서 관리의 부인에서부터 양녀까지 다양했다.[35] 이는 조선 유교의 열녀라는 개념이 특정 계층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만인이 받을 수 있다는 일종의 평등적인 부분은 당시 유교중심의 조선사회의 긍정적인 면모로 평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삼강행실도』는 조선 유교사회의 강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여준 작품이다.
결론
과연 세종대왕은 여성차별주의자였을까? 사대부들은 모든 여성들을 성 노예로 삼아 폭력을 가하고 싶을 때 언제든 가할 수 있는 존재들로 만들기 위해 이 책을 완성한 것일까? 그건 절대 아닐 것이다. 여성들을 열녀라는 프레임에 가두는 것이 세종에게는 가장 안정적인 사회, 즉 유가에 충실한 이상실현을 위해 필수적으로 행해져야 했던 국가산업이었던 것이다. 14세기에 설립된 한국의 국립대학인 성균관에서 강조하고 있는 여러 윤리적 가르침들은 상고시대 성왕들도 똑같이 강조한 내용이었다. 사서오경의 내용이 다름 아닌 『삼강행실도』의 일상 속에서 성스러움으로 보여 지고 그러한 가르침이 문화와 사회 모든 영역에 내재화되기를 소망한 것이다.[36] 그리고 실제로 이는 이루어졌다. 이는 조선이 편찬을 독점하는 정부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유교화 되어가던 조선의 모습을 보면서 뿌듯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여성들도 뿌듯해 했을까? 이렇듯 국가의 강요된 관념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행위는 그 관념이 옳고 그른지 확인할 기회를 박탈해 버리고 의도치 않은 폐해와 피해자를 만들어낸다. 이 책이 오늘날이 아닌 조선시대에 발간된 책이었음에 안도하면서도 이번 국정화 역사 교과서를 보면 다시 불안해 지는 것은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참고문헌
강명관, 『열녀의 탄생-가부장제와 조선여성의 잔혹한 역사』, 돌배게, 2009
윤미옥, 「삼강행실도에 대한 비판적 입장 고찰」, 『철학논총』82, 새한철학회, 2015,
이혜순, 「열녀상의 전통과 변모, 삼강행실도에서
조선후기 열녀전 까지」, 『진단학보』(85), 진단학회, 1998
전경목, 「삼강행실도의 편찬배경과 조선 초, 중기 사회의 변화」, 『조선시대의 책 문화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1] 강명관, 『열녀의 탄생-가부장제와 조선여성의 잔혹한 역사』, 돌배게, 2009, 120쪽
[2] 삼강행실도 열녀편, 2쪽
[3] 위의 책, 123쪽
[4] 위의 책, 126쪽
[5] 전경목, 「삼강행실도의 편찬배경과 조선 초, 중기 사회의 변화」, 『조선시대의 책 문화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69쪽
[6] 위의 글, 96쪽
[7] 위의 글, 70쪽
[8] 위의 책, 67쪽
[9] 강명관, 앞의 책, 2009, 124쪽
[10] 전경목, 「삼강행실도의 편찬배경과 조선 초.중기 사회의 변화」, 『조선시대의 책 문화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74-75쪽
[11] 위의 글, 99쪽
[12] 위의 글, 89쪽
[13] 강명관, 『열녀의 탄생-가부장제와 조선여성의 잔혹한 역사』, 돌배게, 2009, 122쪽
[14] 전경목, 「삼강행실도의 편찬배경과 조선 초, 중기 사회의 변화」, 『조선시대의 책 문화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74쪽
[15] 강명관, 앞의 책, 2009, 119쪽
[16] 위의 책, 171쪽
[17] 위의 책, 129쪽
[18] 위의 책, 135쪽
[19] 위의 책, 136-137쪽
[20] 위의 책, 138쪽
[21] 위의 책, 139쪽
[22] 위의 책, 140쪽
[23] 위의 책, 145쪽
[24] 위의 책, 140쪽
[25] 위의 책, 157쪽
[26] 위의 책, 169쪽
[27] 위의 책 165쪽
[28] 강명관, 『열녀의 탄생-가부장제와 조선여성의 잔혹한 역사』, 돌배게, 2009, 163쪽
[29] 위의 책 167쪽
[30] 위의 책 175쪽
[31] 이혜순, 「열녀상의 전통과 변모, 삼강행실도에서 조선후기 열녀전 까지」, 『진단학보』(85), 진단학회, 1998, 168쪽
[32] 위의 글, 172쪽
[33] 윤미옥, 「삼강행실도에 대한 비판적 입장 고찰」, 『철학논총』82, 새한철학회, 2015, 358쪽
[34] 위의 글, 359쪽
[35] 전경목, 「삼강행실도의 편찬배경과 조선 초, 중기 사회의 변화」, 『조선시대의 책 문화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88쪽
[36] 윤미옥, 「삼강행실도에 대한 비판적 입장 고찰」, 『철학논총』82, 새한철학회, 2015, 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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