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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묵상글 들 ( 연중 12주 수요일 - 누가 진정한 예언자일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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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12주 수요일 - 누가 진정한 예언자일까?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살아온 만큼 실망을 하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뽑은 정치인들에게 실망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정치인만은, 또 이 정치인만은, 또 이 정치인만은
우리를 잘살게 해 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지요.
그러나 실망을 준 정치인은 그래도 괜찮은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실망 정도가 아니라 배신감을 안겨주는 정치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 사람만은 깨끗한 사람일 거라고, 능력은 없어도
진정 국민을 위할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지요.
그런데 배신감이란 믿음이 배반당했을 때 느끼는 것이니
실은 그의 탓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믿은 우리의 탓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번 말한 적이 있는데
사람을 믿지 말라고, 정치인은 더더욱 믿지 말라 한 거지요.
그렇다고 이 말을 불신을 조장하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믿어야 하고 정치인도 믿어야지요.
그러니 이 말은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 말고,
정치인을 우리의 구세주처럼 믿지 말라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더 배신감을 주는 사람은
정치가가 아니라 종교인들이고 성직자들입니다.
정치가는 원래 야망이나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종교인들이나 성직자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여느 인간과는
달라야 하고 다를 거라고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종교인이나 성직자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달라야 하고
많은 종교인과 성직자가 비록 완전하지 않을지라도 그러하며,
소수가 오늘 주님 말씀처럼 양의 탈을 쓴 늑대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수는 하느님의 사람이고자 하나 불완전한 성직자입니다.
이런 경우 아무리 하느님의 사람일지라도
그를 하느님처럼 믿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정말로 믿지 말고 따라가지 말아야 할 작자가 있는데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짓 예언자가 그들입니다.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인데
거짓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솔깃한 얘기를 하는 사람,
우리의 욕망에 짝짜쿵하는 사람입니다.
성직자가 아니더라도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사람은 사기꾼일 가능성이
많고, 비록 사기꾼이 아닐지라도 하느님의 사람이 아닐 가능성 많은데
성직자는 더더욱 듣기 좋은 소리만 해서는 하느님의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면 진정한 예언자인 성직자는 하느님께서 듣기 좋은 소리하라고,
우리 욕망에 짝짜쿵 하라고 보내신 사람이 아니라 당신 뜻을 전하고
당신 뜻에 어긋날 때는 아니라고 얘기하라고 보내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프지만 듣기 싫은 얘기를 하는 사람을
예언자로서 받아들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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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어느 형제님의 고민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 인원 감축을 해야 하는데 누구를 정리해야 할지가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두 명 중 한 명을 정리할 생각인데, 한 명은 일을 잘하기는 하지만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아서 불편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일은 그렇게 잘하지 못하지만 사장인 자신에게 잘 맞추면서 일을 하기에 편하다고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누구와 함께하겠습니까? 가게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전자의 일 잘하는 사람이 좋겠지만, 사장인 자신이 편하기 위해서라면 후자의 사장에게 잘하는 사람이 좋을 것입니다. 즉,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선택이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사장에게 잘 맞추면서도 일을 잘한다면 어떨까요? 평생 같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듯 좋은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다른 이로부터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자신의 자리에서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고, 이것이 곧 나를 위한 활동이 됩니다. 나의 행복을 가져오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기를 원하실까요? 건강한 삶일까요? 건강하지 못한 삶일까요? 기쁘게 사는 삶일까요? 힘들게 사는 삶일까요? 우리에게 늘 사랑을 주시는 분이기에 이분께서 우리의 어떤 모습을 원하시는지는 분명합니다. 건강한 삶이고 기쁘게 사는 삶입니다. 이 긍정적인 모습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적당한 물과 햇빛, 그리고 가지치기를 비롯한 관리를 제대로 할 때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몸을 관리하는 데에도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몸을 통해 좋은 열매가 생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쁜 열매만을 맺는 그 나무를 계속해서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모두 잘라 불에 던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삶만이 바로 구원의 길,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으며 또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함께하길 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발전이 곧 하느님을 위한 진정한 봉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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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사실은 그것을 하기 싫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행되지 않는 것이다(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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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그때가 정말로 좋았어!
“신부님! 제가 그래도 젊었을 때는 한 인기 했습니다.”
이렇게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현재 젊은이보다 중장년 이상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과거는 다 멋집니다. 사람들은 정이 넘쳐서 나눌 줄 알았고, 세상도 덜 각박해서 끔찍한 범죄도 없었던 것처럼 과거를 말합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지금이 과거보다 훨씬 못한 것 같지만 사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이 없었습니다. 똑같이 끔찍한 범죄도 있었고, 부정·비리도 있었습니다. 감염병도 똑같이 앓고 있습니다.
앞으로 50년 뒤를 사는 사람도 이렇게 지금을 회상하며 말하지 않을까요?
“2021년, 그때가 정말로 좋았어!”
‘정말 좋았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사는 우리입니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여기에 덧붙인다면 최고의 지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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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어제 <복음>인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과 넓은 문‘’ ‘비좁은 길과 널찍한 길’을 대조시키면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
이스라엘 공동체의 분란을 일으키는 이들 중에는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신명기>에서는 거짓 예언자들이 초래할 위험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예언자나 환몽가가 나타나 너희에게 표징이나 기적을 예고하고 그가 말하는 표징이나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너희는 그 예언자나 환몽가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따르고 그분을 경외해야한다.”(신명 13,2-6)
사실, 예언자들은 하느님 백성들이 세상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을 배반했을 때, 그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하느님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회개하여 하느님 앞에 바로 서도록 자극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예보나 윤리 생활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렸고, 진리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선포하였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를 ‘양’과 ‘이리’의 표상으로 대비시키십니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니 겉의 옷차림을 보지 말고, 속마음을 보라 하시면서, 거짓 예언자를 알아보는 기준을 ‘행실로 맺는 열매’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
사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리는 ‘양과 이리’, ‘나쁜 열매와 좋은 열매’의 표상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줍니다. 당신이 ‘참된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고, 또한 ‘구원의 열매’라는 좋은 열매를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서 “참 예언자”로 제시하고 있는 맥락에서 보면,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라는 말씀은 곧 “참 예언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라는 반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저희의 삶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나는 참 예언자인지, 나는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혹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기보다 풍성한 잎이나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헛열매를 맺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저는 거짓 예언자이고 싶지는 않지만, 거짓 예언자처럼 겉모양을 꾸미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저는 참된 예언자는 아니지만, 참된 예언자 행세는 곧잘 합니다. 제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들여다보며,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여 살아갑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자신의 화려함을 버릴 때 열매는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마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맺는 열매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열매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자신이 따 먹으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은 바로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데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삶이 당신 진리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때깔만 그럴싸한 열매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으로 속이 꽉 찬, 좋은 열매 되게 하소서!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 볼 수 있다.”(마태 7,17)
주님!
잘려 불태워지기 전에, 가지를 자를 줄을 알게 하소서!
위선의 껍데기 옷을 벗고, 기만의 숨겨둔 살을 도려내게 하소서!
치장하여 꽃을 피우기보다, 행실로 열매 맺게 하소서!
그럴싸하게 때깔을 꾸미기보다,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당신께 붙어 양분을 얻고,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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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부르심은 가르침을 통해 계약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과 아브람의 관계에서도 그러했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이 모두가 다 하느님의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수메르 문명권에서 아브람을 불러 내신 하느님께서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하느님을 섬기려는 믿음이 있음을 보시고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집트 강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이르는 땅을 축복으로 주셨습니다.
이미 그 당시에 남쪽에서는 이집트 문명이 일어나 있었고, 북쪽에서는 수메르 문명에
이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 지역에서 일어서고 있었는데,
이제 아브라함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 두 문명 사이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새로운 문명을
이룩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셨을 때,
거짓 예언자들과 그들의 꾐에 빠져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을 보셨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와서는 게걸든 이리들처럼 사람들을 타락시켰습니다.
그들이 워낙 많았고, 남은 자들은 적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식별 기준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는 것입니다.
종자만으로는 잘 식별되지 않지만, 열매가 맺힐 때가 되면 열매를 보아서
원래의 종자를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남은 자들 가운데에서 열두 제자를 뽑아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그들과 사도가 되는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사도가 된 제자들이 맺어야 할 열매는 복음을 실현하는 교회를 이룩하는 일이었고,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축복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현존하시는 새로운 땅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세례를 받은 우리가 미사 때에 영성체를 하는
의미는 거듭거듭 계약을 새롭게 갱신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계약은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축성된 성혈을 받아 마실 때마다 그 의미는 더욱
살아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은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하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까닭은 당신의 뜻과 삶과 희생을 기억하여 우리로 하여금 같은 뜻과 같은 삶과 같은
희생으로 계승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어떤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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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과일이나 채소에 이르기까지 잘 익어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햇빛과 비, 그리고 밑거름이 충분하게 있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보면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그 사람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이 큰 사람이었는지는 입술로 하는 말에서가 아니라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도 그 끝을 보면 놀라워할 사람도 있습니다. 또 그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기다리며 햇빛과 비를 감당하고, 거름을 주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외견상으로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겉만 보아서는 그 사람이 사심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선적으로 사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속이 훤히 드러나게 됩니다. 거짓 예언자가 맺는 열매는 시기, 질투, 미움, 증오, 적개심, 다툼, 분열과 같은 것입니다. 더군다나“사람은 속여도 하늘은 못 속입니다.”
그러므로 눈속임으로 하지 않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수와 양으로 따져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고, 예수님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를 나누어지는 참되고 선한 삶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함께야).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고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멋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없어지면 힘이 듭니다. 따라서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어야겠지만 기왕이면 갈수록 깊어지는 멋을 담아야겠습니다. 속빈강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 그레고리오 주교는“우리의 전체 생활은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이 세 가지 각각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지 또는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 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할 때 좋은 열매는 당연합니다. 그러나‘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집니다.’결국 신앙과 사랑으로 무르익은 삶만이 심판의 불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익은 좋은 열매가 되십시오! 혹 시들한 열매가 보이거든 햇빛을 보게 하고 비를 맞을 수 있게 하며 그리고 거름을 주십시오. “열매를 보면 나무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녀를 보면 부모를 짐작하여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부끄럽게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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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들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사제복장을 하고 갔습니다. 예전에는 일반복장도 하였지만, 지금은 사제복장이 자연스럽고 편합니다. 식사를 마칠 무렵입니다. 옆 좌석에 있던 형제님이 제게로 와서 강복을 청하였습니다. 저는 기꺼이 형제님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주고 갔습니다. 저는 형제님을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함께 식사하였던 형제님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도 사제복장을 하면 예물을 받을 수 있겠네요?” 저도 웃으면서 형제님에게 말하였습니다. “사제복장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련이 있어야 합니다. 사제복장 뒤에는 해야 할 많은 것들이 있답니다.” 사제복장 때문에 모임에서는 좋은 자리를 앉곤 했습니다. 사제복장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기도 했습니다. 사제복장 때문에 비싼 차를 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제복장의 진정한 의미는 어두운 밤을 밝히는 등대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새벽이 오기까지 망루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독서에서 아브람의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두 가지 축복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땅’입니다. 모세오경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땅을 얻기까지 이집트에서 힘든 노동을 했습니다. 광야에서 40년간 보내야 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땅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았던 ‘십계명’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자손의 축복을 약속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축복하리니, 너의 후손은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은 100세에 아들 이사악을 얻었습니다. 모세오경은 하느님이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12지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계명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예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고난의 순간에는 하느님의 위로를 전하였습니다. 교만의 순간에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충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가지의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느님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는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란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나라에 가기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섬기는 사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하느님나라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주님께서 주신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었고, 병자를 고쳐주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하느님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은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처럼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우리들에게 ‘나무와 열매’를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열리고,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열린다고 하십니다. 좋았던 나무도 거름을 주지 않고, 관리를 소홀히 하면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빴던 나무도 정성을 다하고, 거름도 주고, 잡초를 뽑아주면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밀은 계속 밀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는 늘 가라지가 아닙니다. 밀처럼 자란 사람이 가라지와 같이 변할 수도 있고, 가라지같이 자란 사람이 밀처럼 변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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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中心)의 삶
-신망애(信望愛), 진선미(眞善美)-
“내 영혼아 주님 찬양하라, 당신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죽음에서 네 생명 구하여 내시고, 은총과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
한평생을 복으로 채워 주시니, 네 청춘 독수리마냥 새로워지도다.”(시편103,2.4-5).
아침시편 성무일도중 마음에 와닿은 주옥같은 성구들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박정자 배우를 알것입니다. 참 놀라운 분입니다. 1942년 생으로 현재 우리 나이로 80세이고 1962년 연극 배우로 첫 데뷔하였으며 강렬하고 열정적이며 지적인 배우라는 평가도 있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자격도 얻은 분입니다. 올해로 무대 인생 50년이니 말그대로 은퇴가 없이 영원한 현역으로 금경축을 맞이한 것입니다. 다음 인터뷰 내용도 가톨릭 수도사제인 저에게도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내용에 참 매력적인 분이었습니다.
-1.그런데 박정자는 언제나 무대에서 죽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큰 복을 신(神)이 나한테 주실까? 물론 무대 위에서 이러다 쓰러지겠다, 싶었던 적은 몇 번 있어요. 그때 든 생각은 아, 그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고 전사(戰死)해야 비로소 ‘주님의 전사(戰士)’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제 간절한 소망입니다.
-2.그가 네 살 때 세상을 뜬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이름 가운데 ‘바를 정(正)’으로 지었을까. ‘고요할 정(靜)’이나 ‘빼어날 정’도 있건만.
“여자 이름에 ‘바를 정(正)’자를 넣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그러나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평생 그 ‘바를 정(正)’자가 나를 붙들어 주었다고 생각해요.”
-3.박정자는 29년전,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누가 나의 인터뷰를 쓴다면 ‘그녀는 평범하다’는 문장으로 시작했으면 좋겠어’”라고.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그렇게 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미인이 되려고 노력한 것도 없고. 그러나 나는 무대에서 평범을 거부해요. 관객들은 평범한 사람을 보러 극장까지 갈 이유가 없죠. 그러나 평상시에 무대 밖에선 하염없이 평범한 사람, 내 말이 틀렸나요.”
참으로 하느님만을 찾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서 수도승의 기본 자질인 열정과 순수, 그리고 겸손의 덕목까지 지닌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새삼 이름이 얼마나 상징성이 뛰어나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런 면에서 가톨릭 신자들에게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했던 성인들의 세례명을 지닐 수 있음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삶이 좋아야 글도 말도 행위도 좋습니다. 좋은, 진실한, 아름다운 진선미(眞善美)의 삶에서 진선미의 글과 말도 행위도 나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여자에 진씨라면 진선미 이름을 갖고 싶습니다. 역시 믿음이 좋고 희망과 사랑이 넘치는 신망애(信望愛)의 삶이라면 그런 삶은 그대로 글과 말과 행위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시(詩)도 똑같습니다. 빛과 생명, 희망의 사람은 시도 그렇습니다. 글이나 말, 행위는 그대로 그 사람의 표현입니다. 평생 빛과 생명, 희망이 넘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 빠져 살다 보니 세상 시(詩)들에 대한 맛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세상의 어느 시가 다음 성서의 시편과 같겠습니까?
“인생은 풀과 같고, 들꽃같은 그 영화, 스치는 바람결에도 남아나지 못하고,
다시는 그 자취도 찾아볼 길 없도다.
주님 자비만은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을 섬기는 자에게 계시도다.
그 후손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정의는 계시도다.”(시편103,15-17)
진선미(眞善美)의 삶은 그대로 신망애(信望愛)의 삶에 직결됨을 봅니다. 참으로 믿을(信)때 참된(眞) 진실한 삶이요, 하느님을 생생히 바랄 때(望) 참 좋은(善) 삶이요, 경천애인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愛)할 때 바로 아름다운(美) 삶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자에 신씨라면 진선미(眞善美)에 이어 이번엔 신망애(信望愛) 이름을 지니고 싶습니다. 사실 희망이 좋아 이메일 주소는 “spes@1004” 발음하면 ‘희망(spes) 천사(1004)’입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는 복음의 소제목입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을, 진실치 못한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주님은 우리 모두 진실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십니다. 예수님은 악인들보다도 위선자들을 극도로 혐오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 들이겠느냐? 이와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 볼 수 있다.”
새삼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 모두를 살펴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과연 나는 좋은 나무같은 사람일까 혹은 나쁜 나무같은 사람일까.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처럼 사람도 선인과 악인, 의인과 죄인이 되는 것이 확정적이고 고정적일까?’ 여러 생각도 듭니다.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 동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야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과연 자주 감자, 하얀 감자처럼 사람도 운명적으로 고정 확정되어 있을까요?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든지 ‘변질이 아닌 본질이 드러난 것’이다란 부정적 인간 정의에 대한 말도 있지만 저는 단연코 거부하고 싶습니다. 고정불변의 선인도 악인도 성인도 죄인도 없습니다. 이 모두는 우리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그러니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잠정적 분별로서 그칠 것이지 판단까지 이르진 말아야 합니다. 나무와 달리 사람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 나쁜 사람이, 악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진선미의 사람, 신망애의 사람이 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답은 단 하나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는 분투의 노력에 하느님께서 감동하심으로 주시는 신망애와 진선미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주님을 닮아갈 때 신망애의 사람, 진선미의 사람으로 변모됩니다. 이래서 우리 믿는 이들 삶의 여정을 예닮의 여정, 하닮의 여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여정에 항구하라고 우리를 격려하는 성인의 세례명입니다. 바로 오늘 창세기의 아브람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이어 전개되는 하느님과 아브람간의 대화 내용을 보면 둘 사이가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지 깨닫게 됩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시고 모세에게처럼 자신을 환히 계시해줍니다.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
이어 친히 아브람과 계약을 맺게되니 평생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오르게 된 복된 아브람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신뢰와 사랑을 받는 것 보다 큰 축복은 없고 우리 모두 이런 축복받은 존재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 진선미의 삶에 항구하는 분투의 노력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신망애의 사람, 진선미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하늘 닿도록 당신 사랑 크옵시기에, 구름에까지 당신 진리가 미치시기에.
하늘들 위에 위에 하느님 나타나소서, 온 땅에 빛나소서, 당신의 영광.”(시편108,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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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브라함에서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거대하고 풍성한 "좋은 나무"를 관상하게 해 줍니다.
제1독서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시는 대목입니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5-6)
아브람을 칼데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신 주님께서 늙은 나이에도 아직 자손이 없는 아브람에게 무수한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얼핏 들으면 허무맹랑한 이야기같지요.실제로 주님의 아들 약속에 아브람이 웃었고(창세 17,17 참조), 18장에서는 사라가 웃었다고(창세 18,12) 성경 저자는 가감없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주님을 믿었습니다. 당신 백성에게 땅을 베풀어 주시고 그 땅을 돌볼 무수한 후손까지 마련해 주시려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었던 것이지요. 아브람의 믿음이 그 자신을 의롭게 합니다. 어떤 행위나 지향 이전에 믿음으로 의로움을 획득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이 세상에 믿음을 뿌리로 한 튼실하고 풍성한, 좋은 나무를 심으십니다. 아브람에서 시작된 이 나무는 처음에는 혈연과 민족을 통해 무성히 가지를 내고 잎을 드리우며 열매를 맺다가, "때가 차자" 온 세상 모든 민족이 접목된(로마 11,17-24 참조) 거대한 나무로 성장할 것입니다.
복음은 나무와 열매 이야기입니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태 7,17)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민중을 현혹하고 착취하는 일이 횡행했기 때문이지요. 아버지 하느님의 믿음의 자녀라면 같은 나무의 가지인 형제와 이웃을 위험에 빠트릴 리 없으니, 열매를 잘 보라는 뜻입니다.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2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서 비롯된 나무는 좋은 나무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좋은 나무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지요. 충실히 믿음을 견지하며 하느님을 섬김으로써 의롭게 되어 좋은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면 좋은 열매를 맺을 겁니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복음 환호송)
좋은 열매를 맺는 또 다른 조건은 주님께 "머무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담화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라고 하시며 포도나무와 가지의 표상으로 당신과 우리의 관계를 설정해 주셨지요. 우리는 좋은 나무인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들입니다. 그분에게서 양분과 수분과 사랑의 DNA를 공급받아 우리 존재의 자취와 행위를 통해 열매를 맺는 가지들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저를 포함해 우리 모두 "믿음"과 "머무름"으로 좋은 나무이신 주님께 꼭 붙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거룩하고 선한 양분이 우리를 거쳐 좋은 열매로 맺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열매가 이 세상을 조금 더 밝게, 조금 더 선하게, 조금 더 진실되게,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그 좋은 열매가,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소박하고 사려깊은 걸음걸음마다 좋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주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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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7,15)
'참 예언자가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마태7,15)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예언직의 사명을 수행하는 우리에게 뜨끔한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성경 안에서 말하는 '예언자'(prophet)는 미래의 어떠한 일을 말하거나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 안으로 파견된 사람'으로서, 지금 여기에 있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참 예언자'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생각을 하고, 하느님의 말을 하고, 하느님의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 예언자의 모습'이며,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는 방법'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하느님을 전해야 하는 '예언직의 사명을 받은 예언자들'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직자나 수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보다 더 참 예언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7,16)
나의 착한 행실과 나의 거룩한 행실로써 좋은 열매를 맺는 참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창세15,1-12.17-18)는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한 아브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큰 축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예언직의 소중한 사명을 기억합시다!
오늘도,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생각을 하고,
하느님의 말을 하고,
하느님의 행동을 하는,
참 예언자가 됩시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큰 축복을 받고,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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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15-20: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15절)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았던 조상들에게 일어난 일을 떠올리게 하신다. 우리의 신앙의 길이 좁고 비좁아 힘든 일이 많다는 것에 절망하지 않도록 조상들이 겪은 일을 떠올리게 하셨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기가 쉽고 편한 길이 아닌데 그렇게 하여 하느님께 잘못하였던 조상들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우리 신앙인은 일반 대중의 유행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닌, 그 반대로 세상을 거슬러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신앙인은 돼지와 개로부터 만이 아니라, 이리로부터도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이 이리는 개나 돼지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개와 돼지는 잘 보인다. 그러나 이리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낸다. 이리는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고 하신다. 이리의 공격은 그것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시나무에서는 포도를 거두지 못한다. ‘거짓 예언자들’은 덕의 가면을 쓰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사기꾼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20절)고 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힘들고 고생스러운 길이다. 위선자는 수고하려 하지 않고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려고 한다. 그러므로 가면을 보지 말고 좁은 길을 따라가는 이들의 행실이 맺는 열매를 보아야 한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17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악인은 변화할 수 없다거나 선인은 결코 나쁜 길로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사람이 타락한 생활을 하는 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악하게 살았더라도 선으로 돌아설 수 있지만, 악하게 사는 동안에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는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19절)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거둘 수 없고, 가시를 맺는 나무에서 포도나 무화과를 거둘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악한 사람은 좋은 말씀을 듣지 못한다. 그리고 신심 깊은 교사가 나쁜 것을 가르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나쁜 것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을 막기도 하시는 것이다. 자신의 입으로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분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면서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여야 하겠다.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모든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하느님 안에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삶도 참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는 생활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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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 15)
거짓과
진실 사이에
우리가 있다.
거짓은
정말 나쁘다.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이
참된
복음의 삶이다.
거짓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불행한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의 삶이란
우리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 은총의
삶이다.
그 누구도
하느님을
속일 수 없다.
하느님께서 주신
십자가는 참으로
정직하다.
모든 예언자들이
지고 간 십자가를
만나게 된다.
십자가는
거짓 신앙과
거짓 위선을
정화한다.
십자가는
진실의 열매를
맺는다.
거짓 복음은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자신을 위한
열매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진실된 열매이다.
신앙의 열쇠는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참된 자아를
만나는 것이다.
예언자는
먼저 자신을
하느님 안에서
정직하게
만나는 것에서
첫발걸음
내딛었다.
먼저
죄인임을
깨닫는
거기에서
하느님 말씀은
서로를 살리는
은총이 된다.
진실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이다.
십자가의 여정은
진실의 여정이다.
진실한 삶이
복음의 삶이다.
조심하고
조심해야 할
우리의 거짓과
우리의 위선이다.
그래서
십자가가
우리를
거짓에서
해방시키는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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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거짓 예언자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마태 7,15).”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부르셔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맡기신 사람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는데도 받은 척 하고,
하느님께서 사명을 맡기시지 않았는데도 사명을 맡은 척 하면서
사람들을 속이는 ‘가짜 예언자들’입니다.
여기서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라는 뜻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을 말하는데,
그 말은 듣기에는 좋은 말 같지만,
사람들을 구원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데리고 가는 말입니다.
(구원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은 멸망의 길입니다.)
그들이 ‘양의 옷차림’을 하고 온다는 말씀은,
겉모습만으로는 거짓 예언자라는 것을 알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거짓 예언자들도 말할 때 성경을 인용해서 말하고,
기적처럼 보이는 일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 말과 일만 보면 그들이 거짓 예언자라는 것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라는 말씀은, 거짓 예언자들은 하느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일한다는 뜻입니다.
<예언자든지 사도든지 누구든지 간에
탐욕은 ‘진짜’를 ‘가짜’로 전락시키는 올가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배반자 유다입니다.
유다는 분명히 처음에는 진짜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탐욕에 사로잡혔고(요한 12,6),
결국에는 ‘배반의 길’로 갔습니다.
그가 탐욕에 사로잡힌 때부터 예수님을 배반할 때까지의 기간은,
겉으로만 사도였고 실제로는 사도가 아닌 기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라 1,6-8).”
(자기는 하늘에서 온 천사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것을 전한다면, 그것은 천사가 아니라 사탄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신자들을 꾸짖은 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거짓 예언자들이 많았고,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신자들이 많았음을 나타냅니다.
(오늘날에는 거짓 예언자들이 인터넷 등을 사용해서 더 교묘하고 악랄하게
활동하고 있고, 신앙인들에게 많은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마태 7,16)”
여기서 ‘열매’는 예언자들의 활동 결과를 뜻합니다.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라는 말씀은,
어떤 사람의 활동 때문에 사람들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되었다면,
그 결과를 보고 그가 거짓 예언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진짜 예언자는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열매’를 맺기 전에 미리 알 수는 없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 때문에 피해를 보기 전에 미리 예방하는 방법은 없을까?)
바로 그런 이유로 교회의 ‘교도권’이 필요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전부 다 예외 없이 자기들은 ‘진짜’ 라고 주장합니다.
또 겉으로 보기에는 진짜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개인이 진짜 예언자와 가짜 예언자를 구분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사도단에게) 주신 ‘하늘나라의 열쇠’와
‘매고 푸는 권한’에는 그런 것을 식별하는 권한과 능력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그런 것을 식별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교구장의 권한이고,
최종적으로는 교황의 권한입니다.)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성경, 또는 교리와 일치하는가? 위선자인가, 아닌가?
교만한가, 겸손한가? 교회의 교도권에 순종하는가, 불순종하는가?
탐욕이 있는가, 없는가?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 등입니다.
1) 성경, 또는 교리와 다른 말을 한다면, 그리고 성경과 교리에 없는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 예언자입니다.
어떤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그 계시 내용이 성경이나 교리와
맞지 않다면, 또는 성경이나 교리에 없는 말이라면, 그것은 거짓 계시입니다.
2) 거짓 예언자들의 공통점은 ‘위선’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기도하는 척 할 때가 많습니다(마태 6,5).
3) 거짓 예언자는 자기가 진짜 예언자의 권위와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를 쓰는데, 그 과정에서 그의 ‘교만’한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4) 그들의 교만은 ‘불순종’으로 이어집니다.
5) 예언자가 아니면서 예언자 행세를 하는 거짓 예언자들은
‘탐욕’을 채우려고 그런 짓을 합니다.
(돈을 밝히는 것도 거짓 예언자들의 공통점입니다.)
6) 탐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거짓 예언자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차갑고 인정이 없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는 일을 예방하려면, 확고한 신앙을 가져야 하고,
평소에 꾸준히 성경 말씀과 교리 공부를 하면서
성경과 교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실체를 몰라서 그들에게 속는 일도 많지만,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성경 말씀과 교리를 몰라서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인정한 적 없는,
낯선 공부 모임과 기도 모임에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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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언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 현재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의 다가올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맡겨 주신 말씀입니다. 이 의미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 전해지는 하느님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서는 미래의 이야기를 예고하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 다룬 것은 현재가 강조된 예언입니다. 문제는 하느님께 위탁받은 말씀을 전하는 하느님의 예언자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탄압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참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반면에 거짓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이야기만 합니다. 그들은 임금의 귀에, 통치자의 눈에, 권력자의 마음에 드는 이야기만 전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에게는 하느님이 아닌 권력자들이 중심에 서 있습니다. 예언의 의미가 왜곡됩니다.
신약 시대에도 거짓 예언자들의 영향력은 여전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거룩한 사람이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 말씀을 전한다고 하였지만, 구약의 거짓 예언자들처럼 그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거짓 예언자들의 위험성을 아시고, 참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는 기준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선포가 맺는 열매를 통해서입니다.
그러기에 생각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이야기는 참예언입니까? 거짓 예언입니까? 우리가 이웃들 앞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우리 자신이 한 행동은 어떠한 열매를 맺을까요? 우리 가운데 누구도 거짓 예언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참예언자가 되고 싶습니까? 우리의 말과 행동이 우리 이웃의 눈만이 아니라, 예수님께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며 행동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라는 좋은 나무에서 ‘주님’이라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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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을 사막으로 불러내신 하느님께서 환시 중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의인으로 또 신앙의 아버지라고 하는 그도 하느님의 침묵에 질려 자식없이 늙어가는
신세타령을 합니다.
“저는 자식 없이 살아가는 몸,
제 집안의 상속자는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제르가 될 것입니다.”(창세 15,2)
여기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응답하십니다. 아브람의 충직한 집사인 엘리에제르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너를 상속하지 못할 것이다. 네 몸에서 나온 아이가 너를 상속할 것이다.”(창세 15,4)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를 밖으로 나가십니다.
실망에 빠져 있는 아브람을 위로하시듯 하늘의 별들을 가르치시며 별들의 숫자보다도
더 많은 후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다시 이르십니다.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
그리고 산비둘기 한 마리와 어린 집비둘기 한 마리를 나에게 가져오너라.”(창세 15,9)
아브람은 그것들을 잘라 반쪽들을 마주 보게 차려 놓습니다. 날짐승은 너무 작으니까 자르지는
않습니다.
아브람은 맹금들이 그것들을 가로챌까봐 그것들을 쫒아냅니다.
해질 무렵 아브람은 깊은 잠에 빠집니다.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싸고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은 짙은 불꽃이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를 지나갑니다. 이로써 아브람과 하느님 사이에 계약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창세 15,18)
예수님께서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마태 17,15)
양의 옷차림을 한 ‘거짓 예언자’도 사실 당장 알아보기가 힘들겠지만 점차 밝혀지겠지요.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거두지 못하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악인은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신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의 비유 말씀에서 신학교 교육 중에 배웠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신학교 교육을 요약하자면 ‘참다운 인격자라야 신앙인이 될 수 있고, 참다운 신앙인이라야 성직자가
될 수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직자이기 전에 참다운 신앙인이어야 하고, 참다운 신앙이 되려면, 성숙한 인격자이어야
한다는 내용이지요.
‘수단이나 수도복이 성직자나 수도자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리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속은 세상의 욕심으로 가득한데 겉은 신앙인의 옷을 둘렀다고 해서 참다운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오늘 주님 말씀을 다시 새겨봅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태 7,17-18)
세상 사람들은 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 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조건은 인간적인 욕심에서 자유로울 때 비로소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될 수 있는데 그 조건을
채우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는 얼핏 보면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는 운명론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천이 기준이ㄷ 되어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며 실천하는 사람은 좋은 나무이고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나쁜 나무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느님께 일방적으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각자가 자기의 위치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 예가 하와와 아담에게 동산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셨지만 자유를 가지고 지키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몫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까지 통제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1)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아브람도 많은 시련과 실망을 거쳐 하느님의 계획에 참여하고 구원의 선조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뜻에 움직이는 자연로봇이 아니라 번민과 실망, 때로는 좌절 속에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단을 내려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좋은’ 아니면 ‘나쁜’ 결실로 이어지는 것은 우리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하느님의 초대에 감사하며 가난과 부유의 조건에서 최선과 성실을 다해 노력하며
대답하면 사는 것이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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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정론(豫定論; Calvin's Doctrine of Predestionation)과 연결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르틴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빈파도 (1)Sola Scriptura(성경만으로), (2) Solus Christus(그리스도만으로), (3)Sola Gratia(은총만으로),
(4) Sola Fide(믿음만으로), (5) Soli Deo Gloria(주님께 영광만으로)라는 그들의 원칙에서 구원은 교계제도의 권위나
선행에서가 아니라 성경본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 물론 후에 그들 사이에도 보충론이 나온다. 복음본문대로라면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는 구원의 주체이신 하느님의 의지에서 전적으로 달려 있어서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가톨릭은 성경자체가 인간의 손에 맡겨진 책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계시와 함께 인간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성경연구의 필요성이 나온다. 물론 구원은 성경을 바탕으로, 그리스도 중심으로, 은총과 믿음이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인간의 자발적인 대답, 노력, 선행되 중요하다는 주장이 가톨릭의 입장이다. 그리고 사람은 ‘좋은’. 또는 ‘나쁜’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존재 안에 이 둘의 요소를 갖고 있어서 자신의 성실한 노력과 함께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에 의해서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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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거짓 예언자: 양의 옷차림을 한 게걸든 이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란 어떤 말씀을 전하여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넓게는 우리가 모두 예언자들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과 행동으로 타인에게 분명히 영향을 주고 살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명한 야구선수가 은퇴한 후 강연을 다닐 때 교도소에서도 강연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강연 중 야구를 하다 남의 집 유리창을 깼을 때 힘이 좋아 훌륭한 메이저리거가 될 거라고 칭찬 받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한 수감자가 “저희 아버지도 언젠가는 제가 감옥에 갈 것이라고 하셨죠.”라고 말했습니다.
피카소는 어머니에 대해 “저희 어머니는 ‘네가 성직자가 되면 교황이 될 것이고, 군인이 되면 장군이 될 것이며, 정치인이 되면 대통령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저는 화가가 되었고 피카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각자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예언해 준 말을 믿고 그 예언을 성취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거짓 예언자가 아니라 좋은 예언자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주위에 강력한 좋은 예언자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 예언자들을 어느 정도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거짓 예언자들을 감당할 힘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이상한 예언을 하는 이들을 빨리 떠나야 합니다. 아니면 그 이리들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람을 굳이 선별해서 만나야 할 때 선별기준이 될 것입니다.
2015년 6월 14일 사람들의 관심 속에 애정과 후원을 받아 오던 한 모녀의 페이스북 계정에 이상한 게시물이 포스팅됩니다.
“그녀는 죽었다.”
딸이 엄마를 살해했다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의 내막은 이렇습니다.
지난 2005년 8월 미국 남동부에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상륙했습니다.
가장 큰 손해를 입은 지역은 뉴올리언스였습니다. 폭우로 제방이 붕괴하면서 도시 대부분이 물에 잠겨 1,8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정말 대참사였습니다. 이 모녀도 피해 이재민 중 하나였습니다. 이들은 뉴올리언스 정부 임대 주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허리케인으로 집이 파괴되면서 갈 곳을 잃게 된 것입니다.
엄마 디디 블렌챠드는 24살의 나이에 남편을 만나서 임신과 함께 결혼하였지만 딸 집시가 태어나기 한 달 전 이혼을 합니다. 결국, 엄마 혼자 양육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딸이 태어난 지 3~4개월쯤 됐을 때 엄마 디디가 보니 아이가 잠을 잘 때 이상 증상을 보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그때 이후 집시는 잘 때마다 산소마스크를 착용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집시가 7살이 되었을 때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근육위축증이라는 장애를 얻게 됩니다. 아이는 걷는 것을 포기하고 늘 휠체어를 타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시는 백혈병, 천식, 간질 같은 크고 작은 질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청력에 시력까지 좋지 않아서 항상 보청기와 안경을 착용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음식마저 삼키지 못해 소장에 연결된 호스를 통해서만 겨우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병약하게 아이가 성장하다 보니 엄마 디디는 딸이 10대가 되어서도 정신연령이 7살 수준이라면서 딸에게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위급상황이 생길 걸 대비해서 약 꾸러미를 들고 다니며 정말 헌신적으로 아이를 돌봤습니다. 그러다 보니 엄마는 당연히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에 이전 남편이 매달 보내는 양육비를 가지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허리케인으로 집마저 잃어버린 겁니다.
이 모녀의 안타까운 소식이 알려지면서 각종 구호단체의 러브콜이 쏟아졌습니다. 특히나 그중에 일명 사랑의 집짓기로 유명한 한 단체가 손을 내밀게 되면서 모녀를 위해 미주리에 작은 집을 하나 마련해 줍니다. 몸이 아픈 집시를 위해 휠체어가 갈 수 있게 경사로도 있고 또 따뜻한 목욕을 할 수 있는 욕조까지 집안에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모녀는 감사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뉴스 인터뷰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엄마 디디는 누구보다도 딸을 자랑스러워했고, 집시 역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는 엄마밖에 없다면서 인터뷰 내내 서로를 향한 애틋함이 넘쳐흘렀습니다. 이런 모습의 모녀를 향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여졌고 그들을 위한 선행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2015년 페이스북 계정에 난데없이 올라온 포스팅이 바로 “그녀는 죽었다!”였던 것입니다. 결국 경찰이 밤 10시쯤 모녀의 집안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경찰들이 침실로 들어선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엄마 디디가 잔인하게 칼에 찔린 채 침대에 엎어져 있었고 휠체어만 덩그러니 남은 채 딸 집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경찰이 들이닥친 곳은 집시의 남자친구 닉의 집이었습니다. 이때 집시는 놀랍게도 두 발로 걷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정밀진단 결과 집시는 어떤 건강상의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집시가 남자친구 닉에게 더는 못 견디겠다며 엄마를 죽여달라 사주한 것이었습니다. 닉은 종신형을 받고 집시는 10년 형을 받았습니다. 왜 그런 사실을 알리지 않았냐고 묻는 경찰들의 말에 집시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말했다면 누가 믿어줬을까요?”
무려 20년간 이어진 엄마의 폭력을 통한 사기극은 그렇게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출처: ‘14년간 장애인 딸과 엄마의 애틋한 '거짓사랑'’, 유튜브 채널, ‘디바제시카’]
집시의 엄마는 좋은 예언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딸을 이용해 돈을 벌었습니다. 돈에 미치면 딸까지 그렇게 이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짓 예언자를 알아보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면 그 사람은 100%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딸의 처지에서는 엄마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세속적인 사람인지 아닌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잘 모르겠다면 나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살피면 됩니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이 “넌 모든 것을 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참 예언자입니다. 하지만 나의 능력을 규정해버리고 “넌 나 없이는 안 돼!”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것을 통해 상대를 이용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 속아 그 사람에게 의지하게 되면 안 좋은 결말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할 때 그 ‘열매’를 보고 구별하라고 하십니다. 열매는 마지막에 맺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맺으려는 목표입니다. 지금 나에게 해 주는 것을 보지 말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보라는 말입니다.
그저 나를 사랑해주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인지 그것을 통해 어떤 다른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인지 보라는 말입니다.
거저 주며 행복한 순수한 사랑이 목적이 아닌 모든 말과 행위들은 늑대의 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에 속지 말고 거짓 예언자도 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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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활짝 열려 있습니다!
오늘은 돈보스코의 영적 지도자였던 성 요셉 카파소 신부님(1811~1860)의 축일입니다. 막 사제품을 받은 돈보스코는 자신의 미래를 4살 형인 그에게 맡겼습니다. 카파소 신부님은 조언을 구하러 온 돈보스코에게 지체 없이 말했습니다. “아무 것도 결정하지 말고 제가 운영하고 있는 사제학교로 들어 오십시오.”
카파소 신부님은 새사제 돈보스코가 3년간 사제학교를 다니는 기간 동안, 그의 팔을 이끌고 비참한 토리노 뒷골목으로, 소년 교도소로 안내했습니다. 비록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지만 카파소 신부님은 때로 자상한 아버지처럼, 때로 우애 깊은 형처럼 돈보스코를 동반했고 격려했습니다.
3년간의 사제학교를 수료한 돈보스코는 여기저기서 들어온 좋은 제안들을 단호하게 뿌리칩니다. 그가 착취당하는 토리노 뒷골목의 청소년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정하자, 카파소 신부님은 크게 기뻐하며 물심양면으로 돈보스코를 도와주기 시작합니다.
돈보스코가 넘쳐나는 아이들이 머물 집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때면, 어김없이 카파소 신부님이 찾아와 조용히 큰 돈뭉치를 건네주고 갔습니다. 돈보스코의 사업이 교구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받을 때 적극 변호해주었습니다. 찾아갈 때 마다 과분할 정도로 도와준 카파소 신부님이었기에, 나중에 돈보스코는 너무 미안해서 찾아뵙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카파소 신부님은 어린 시절부터 작은 성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고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그는 유난히 키가 작고 허약한 체질이었습니다. 열 세 살 때부터는 척추 기형으로 인해 오른 쪽 어깨가 위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그로 인한 꾸부정한 자세는 평생 그를 따라다닌 신체적 특징이 되었습니다.
카파소 신부님은 몸은 비록 허약했지만 탁월한 능력과 성덕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토리노 사제학교 학장에 취임합니다. 당시 신학교 교육이 꽤나 부실했기에,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3년 과정의 사제학교를 개설했는데, 카파소 신부님은 돈보스코를 비롯한 탁월한 제자들을 잘 양성시키기로 유명했습니다.
한번은 재미있지만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당대 저명인사가 된 카파소 신부님을 사람들은 그냥 놔두지 않았습니다. 카스텔누오보 선거구가 피에몬테 지역 국회의 하원의원으로 카파소 신부님을 지명한 것입니다.
깜짝 놀란 카파소 신부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국회의원으로서의 아니라 사제로서의 셈을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카파소 신부님은 당시 교회와 신자들을 괴롭히던 엄격주의자들의 공격 앞에서도 언제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활짝 열려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우리의 구원뿐입니다.”
카파소 신부님이 평생토록 간직했던 삶의 모토는 이렇습니다. “성덕은 특별한 일을 하는 데 있지 않고 평범한 일을 비범할 정도로 완벽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저는 사제로서 아무것도 요구하거나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카파소 신부님은 사목자로서의 자세는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그의 시선은 항상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을 향해 있었습니다. 돈보스코와 함께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을 위해 항상 헌신했습니다.
특히 카파소 신부님은 당시 큰 고생을 하고 있던 굴뚝 청소부 청소년들을 위한 사도직을 기쁘게 수행했습니다. 중환자와 임종자들을 사목적으로 돌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사제들에게 강조하며 솔선수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카파소 신부님은 교도소 수감자들과 초조한 마음으로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사형수들을 방문해 위로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마차에 동승해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해준 사형수의 숫자는 총 68명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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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창세15,1-12.17-18)
"그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가져와서 반으로 갈라, 갈린 반쪽들을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들은 자르지 않았다. ~~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창세15,10.17)
'반으로'로 번역된 '빳타웨크'(bathawek)는 '~안에'(in)을 의미하는 전치사 '뻬'(be)와 정관사 '하'(ha) 및 '정 가운데'를 의미하는 '타웨크'(thawek)가 합쳐진 말로서 '바로 그 정가운데'(in the midst)라는 의미이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 정 가운데를 쪼개라는 것은 좌우로 조금의 치우침도 없이 하느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라는 뜻일 수도 있다.
그리고 '빠타르'(bathar; 자르다, 쪼개다)라는 표현은 창세기 15장 18절에 나오는 '뻬리트'(berith; 계약)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왜냐하면 '뻬리트'(계약)도 '자르다', '쪼개다' 란 의미를 갖는 '빠라'(bara)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계약'이란 용어의 어원이 암시하듯이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계약을 맺을 때 그 표적이 되는 쪼갠 희생 제물 가운데로 계약의 두 당사자가 지나가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은 만약 계약이 성실하게 지켜지지 않을 때, 그 위반자는 희생물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다(예레34,18-21).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처럼 희생 제물을 쪼개는 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실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지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하느님과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깨뜨린 이후로, 모든 인류는 계속 원죄가운데 태어나 본죄를 지음으로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리며 살아감으로, 모든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될 운명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스스로 죽으심으로 하느님의 공의를 채워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구약의 모든 희생 제사의 제물이 예표하고 암시하는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구속 공로로 말미암아 영적 죽음을 모면했기 때문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17)
여기서 '화덕'(풀무)으로 번역된 '탄누르'(thannur)는 진흙으로 만든 꼭대기에 통풍을 위한 구멍을 낸 화로를 가리킨다. 그런데 창세기 15장 17절의 연기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하나는, 화덕의 횃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당한 혹독한 고난을 상징하고(신명4,20; 이사48,10), 뿜는 연기는 고난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구원의 때를 알지 못해 방황하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는 견해다.
또 다른 하나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여행할 때 밤낮으로 지켜준 불기둥과 구름 기둥처럼(탈출13,22; 14,24; 33,10) 화덕과 연기도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의 상징으로(탈출3,2; 19,18; 이사31,9) 볼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 두 견해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지만, 뒤이어 나오는 횃불이 쪼갠 짐승들의 고기 사이로 지나감으로써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계약이 체결되는 것을 볼 때, 횃불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화덕과 연기도 하느님 현존과 임재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하느님께서 짙은 어두움 가운데 고뇌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횃불과 연기 가운데 임재하신 것처럼, 성도들이 죄악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홀연히 찾아 오셔서 위로해 주시며 마음에 확신과 더불어 죄악을 극복할 힘을 주신다(이사41,10).
'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이처럼 '바로 그'란 의미의 정관사 '하'(ha)와 '이것들'이란 의미의 지시 형용사 '엘레'(elle)가 사용된 것은 아브라함이 준비한 제물(창세15,9)을 상징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제물들은 모두 정결한 것으로서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하느님께서는 죄악으로 오염된 이방 사람들이 아니라 이들과 구분된 정결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제물 위에 임하시는 것처럼, 오늘날에도 마음이 깨끗한 이들에게 찾아오신다(마태5,8).
♣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
예수님 시대에도 많은 사람이 그들의 말로 백성을 현혹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경계하시며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에 관한 비유를 통해 거짓 예언자에 대한 경고와 자기 자신을 반성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 대목은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이들과 그리스도인 모두에 대한 경고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7,16-17) 거짓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대한 옳고 그름은 그 결과 곧, 그들의 행실로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한국사회에도 신자들을 현혹하는 이단과 무신론, 반그리스도적 사상들, 뉴에이지, 그릇된 신비주의, 혼합주의 등이 넘치고 있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또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가정을 파괴하거나 명예와 재물을 노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말이란 아름답고 호감을 주며, 재치 있고, 경건하며 슬기롭고 매혹적일 수 있으나 ‘거짓’일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진실인가는 행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이란 언제라도 바뀔 수 있고, 얼마든지 참된 견해와 실제 의도를 은폐하는 수단으로도 쓰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바로 이런 말로써 사람들을 현혹하고, 이간질로 분열을 조장하여 양들을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이런 이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7,19-20) 이 말씀은 특히 거짓 예언자들에게 해당되지만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신앙과 사랑으로 실천하는 행동만이 예수님의 참 제자임을 말해줌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좋은 열매’란 산상설교에서 요구하신 가르침, 곧 하느님 뜻에 일치하는 올바른 행실을 말합니다. 좋은 열매란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영의 열매 곧,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등을 가리킵니다(갈라 5,22).
반대로 나쁜 열매는 육의 열매들 곧, 음행, 추행,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당파심, 이기심, 싸움, 시기, 분열 등을 말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거짓 예언자들의 근본적인 잘못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기만을 찾는 잘못에 빠졌고 사랑의 일치를 이루기보다는 순진한 양들의 믿음을 악용하고, 파벌과 분열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해서보다는 자기 이익이나 명성을 얻기 위해 가르쳤습니다. 말뿐이었고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으며, 어떤 열매를 맺고자 하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혹 우리 사이에서 험담이나 중상모략으로 분열을 조장하는 경우는 없는지 살펴야겠지요. 또 사나운 이리처럼 자기 인기에 신경을 쓰고, 자기 공적처럼 자랑하고, 자존심을 앞세우며 누구에게든 인정받으려는 삶의 태도는 없는지도 살펴야 할 것입니다.
끼리끼리 모여 남을 헐뜯고, 상대방의 영혼의 괴로움은 헤아려보려고 하지 않고 제 3자의 말만으로 판단하며, 늘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처신을 그만 두어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말로 남을 현혹하고 말로만 사랑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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