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구조화, 수필의 본격화
-성덕대왕신종을 찾아서-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 사실 소재를 가지고 플롯작업을 하면 그 결과는 더 이상 역사, 사실과 1:1의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개연성의 세계가 된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플롯, 즉 구성법은 모든 문예창작의 기본작법이 되었다. 본격수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작법과 문학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시창작법의 핵심요소인 메타포의 원리를 대표적 작법으로 삼아 발전하게 되었다.
시작법의 문제는 시 창작발상에 대한 시어 찾기에서부터 시작되고, 소설작법은 소재에서 얻은 허구적 인물 이야기 창작발상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시, 소설 작법과 달리 본격수필 작법은 <사실의 소재>에 대한 <문학적 사실의 소재 형식> 만들기에 있다고 하겠다. 본격수필의 작법이 <사실의 소재>에 대한 <문학적 사실의 소재 형식>창작에 있는 이유는 시나 소설과 달리 수필은 태생부터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양식의 문학으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태생적 특징은 에세이가 본격수필로 진화된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다만 몽테뉴 본래의 에세이는 <사실의 소재>에 대한 <사실적 토의>를 하는 데 그치지만 본격수필은 <사실의 소재>에 대한 창조적 구성작업, 즉 <문학적 사실의 소재 형식>으로 변용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나는 ‘수필’이라는 말 앞에 ‘본격’이라는 어사를 붙여왔다. 이런 이유는 수필을 잡문시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냥 수필이 아니라 왜 수필다운 수필을 말해야 하는가. 이것은 자신의 본질과 순결성을 재호명하는 방식이면서 , 동시에 ‘수필 아닌 것들’에 대한 ‘구별짓기’의 욕구와 자의식을 그러내는 일이다. 그러나 ‘본격수필’은 엄밀히 말해, 실체를 가진 수필장르의 명칭이 아니며, 특정한 수필적 조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아직까지 담론화 과정을 끝내지 못했다. 그 고유한 미학적 형식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개념의 실체적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만들어낸 차별화의 욕구는 ‘작본격수필유법불가 무법역불가’라는 ‘본격수필을 쓰는 데 있어서 그 법이 있다고 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없다고도 볼 수 없다.’에서, 또는 ‘본격수필의 실체는 없다. 그러나 본격수필이 아닌 것은 있다.’라고 말하게 한다. ‘배제의 원리’ 혹은 ‘부정의 전략’에 의해 개념의 자기 정체성이 주어진 것이다. 타자와 적들을 호출함으로써 본격수필은 자기 이름의 내용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 구별과 배제의 논리화의 관련된 궤적을 더듬어 보겠다.
II. 본격수필과 적들의 이름
문학이란 <한 편의 의미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본질적 대답이며 또한 문학의 존재 이유가 된다. 문예작법의 핵심은 하나의 창조적 의미를 형상화하기 위한 모든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본격수필을 일러,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화”라고 한다. 과학은 하나의 사물에 대한 한 가지의 개념적 이해만이 가능하다. 만약 한 마리의 ‘개구리’를 보고 사람마다 이해나 인식이 다르다면, 이 세상에 ‘개구리’라는 객관적 동물은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과학적 차원에서 보면, 토끼는 토끼일 뿐이고, 사자는 사자일 뿐이다. 그러나 예술은 그 같은 과학적 사물존재가 아니다. 예술은 그 존재하는 양상 자체가 창조적이다. 그래서 도올은 ‘작가’에서 ‘작’의 의미는 ‘creative'라 하였고, 김지하는 문학을 ’어불성설‘이라 하였다. 따라서 본격수필은 동양시학의 ’언불진의, 입상진의‘, 즉, 개념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형상적으로 체험하는 편이 보다 우수한 창조성을 가진 작품이 될 것이다.
한국문학의 공간 안에서 이 ‘본격’의 개념을 명료하게 사용한 사례로는 안회남의 <본격소설론>(1937)을 들 수 있다. 안회남은 ‘신변소설’과 ‘본격소설’의 관계를 논하면서, 신변에서 구한 소재라 하더라도 인간의 내부적 심이묘사에 주력하고 행동원리를 심리적으로 추구한 것이라면 본격소설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본격소설이라는 개념은, 사소하고 신변적이며 통속적인 수준을 넘어서 깊이 있게 인간의 내부를 그린 작품을 의미한다. 해방 이후 이 개념을 보다 전략적으로 사용한 것은 김동리이다. 김동리는 “자본주의적 기구의 결함과 유물 변증적 세계관의 획일주의적 공식성을 함께 지양하여 새로운, 보다 더 고차원적 제3세계관을 지향하는 것이 가장 정계적으로 실천하려는 것이 시방 필자가 말하는 소위 순수문학 혹은 본격문학이라 일컫는 것이다. <순수문학과 제3세계관>라고 규정한다. 김동리에게 있어 본격문학은 순수문학과 동의어였고, 그것은 경향파의 계급문학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제출된 것이다. 김동리에게 있어 본격문학은 계급문학이 아니라는 조건에 한해서 ‘본격문학’이 될 수 있었다.
안회남, 김동리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본격문학이라는 이름의 정체성을 역사적으로 구성하게 해주었던 적들의 이름은 ‘신변소설’과 ‘계급문학’ 같은 것이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문학의 표피성, 통속성, 당파성, 목적성 등의 항목들이 본격문학이 자기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부정어사전’의 목록들이다. 안회남의 경우 본격문학은 미학적 수준과 관련된 문제였다. 본격문학이 아닌 것들은 그 문학성의 전면적인 미학적 승리에 이르지 못한 것들이며, 그 부분적인 문학적 성취만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미달하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김동리에 있 어서 그것은 문학이념과 관련된 문제로써 부각된다. 김동리는 계급혁명과 ‘유물론적 과학주의’에 의해 도구화된 문학이 아니라 인간성옹호를 내세우는 휴머니즘의 문학이 본격문학이라고 주창한다. 휴머니즘이라는 가치 역시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된 이데올로기의 일부라고 한다면, 김동리의 경우는 보다 정치적인 의도에서 본격문학을 개념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III. 본격수필작법과 그 원리의 구조화
이런 본격문학의 역사적인 토대 위에 나는 ‘본격수필’이란 용어를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수필을 잡문이라고 폄하하고 비하하는 데 대한 방어이면서, 오도되고 있는 수필문학의 개념과 본질을 되찾아야겠다는 신념에서 출발한다. 본격수필작법이 있다고 전제하고, 안성수가 말한 대로 크게 세 가지 문제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수필창작에 절대적인 공식이나 왕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명수필들은 어떤 보편적인 창작원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저를 포함하여, 오창익, 이관희 등은 그런 원리와 기법들에 논리성과 체계성을 부여해 왔으며, 이런 기법과 원리가 새로운 수필을 잉태하고, 장르의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소재의 철학적 통찰과 글감의 미적 구조화, 그리고 호소력 있는 수사법 탐구는 수필의 미학성과 철학성을 결정짓는 창작의 핵심과제라 하겠다. 그럼에도 많은 수필가들이 이러한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창작의 조건과 메커니즘을 경시하거나 탐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요즘은 수필이 질적으로 많이 좋아졌지만, 수필가의 머리 속 수필시학의 부재 결과는 고스란히 작품에 반영되어 철학적 깊이와 미학적 울림이 약하다는 평가와 함께 고질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모든 예술작품의 평가에서 최종적인 문제는 예술성과 그 울림의 유무에 쏠리게 된다. 아무리 이야기 구조가 견고해도 미적 울림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작품의 예술성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특히 이야기를 미적구조로 전환하는 핵심원리인 플롯에 대해 무관심할 경우, 텍스트는 작가의 미적 창작 의도가 배제된 단순한 줄거리의 순차적 배열에 불과하게 된다. 플롯은 예술성이 약한 스트리를 감동이 큰 미적 이야기로 전환시키는 배열원리라는 점에서 작가들에겐 중요한 탐구대상이다. 수필은 짧은 분량으로 독자를 설득하는 산문 장르라는 점에서 더욱 정교한 플롯과 구조미학이 필요한 것이다. 작품의 미적구조와 그 예술적 울림으로 경쟁하고, 삶의 철학을 창의적 형식미학으로 형상화하는 전략의 축척 없이 수필 장르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헨리 제임스가 소설에는 백만 개의 창이 있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수필에도 백만 개 이상의 창이 잇다. 이야기의 다양한 구성미학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 중층구조론과 수필의 구조시학
모든 문학작품의 의미는 그 구조에서 나온다. 독자를 감정이입의 세계로 인도하는 미적 울림도 기본적으로는 작품구조가 만들어내는 예술적인 공감의 힘이다. 이러한 구조의 힘은 평면층에서는 단어와 문장들의 결합방식에서 창조되지만, 입체적으로는 이야기 요소들의 예술적 결합에 의해 생성된다. 따라서 작가가 작품의 미적 구조에 대하여 무관심할 경우, 수필작품은 허약한 울림구조 속에 갇히게 된다.
구조시학자들이 제기한 이야기의 중층구조론은 수필창작의 원리를 설명하는 기본틀로 삼을 만하다. 츠베탕 토도로프는 『구조시학 (Introduction to Poetics)』에서 시학(Poetics) 이란 “한 개별적인 문학 작품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문학 작품 전체에 스며있는 어떤 내재적이고 추상적인 법칙들에 대한 연구”라고 정의한다. 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로만 야콥슨적 용어이다. 토도로프의 『구조시학』의 경우에는 “서사학” 만을 다루고 있는 문학이론이다. 명제인 문장들이 모여서 연쇄의 문단을 이루고, 이것이 확대되면 한편의 완성된 작품이 되는 것이다.
구조시학을 수필작법에 응용시킨 안성수의 이론에 따르면, 수필텍스트는 심층과 표층, 담론층이 유기적으로 생성하는 입체구조로 설명된다. 여기서 각 층위의 기본적인 기능과 창작기법을 연결시켜 정리하면 어떤 보편적인 법칙을 얻을 수 있다. 이를테면, 심층구조에서는 제재의 철학적 통찰과 주제의식의 선정문제를, 표층구조에서는 이야기의 미적 구조화를, 그리고 담론층에서는 서술과 수사의 방법들을 활용하는 단계로 규정된다. 이제 심층 -표층 -담론층으로 이행되며 유기적으로 생성되는 수필텍스트의 창조과정을 살펴보겠다.
수필은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제재와 주제 중심의 문학이다. 몽테뉴 본래의 에세이 작법과 본격수필의 작법은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서 갈라지게 된다. 송명화의 <탱자꽃>을 예로 든다면, 몽테뉴의 에세이라면 인도의 폭죽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이라는 소재에서 어떤 주제를 끌어내든 그 주제에 대한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사유 또는 토의를 하게 될 것이다. 그 주제가 아동의 문제이든, 가족붕괴의 문제이든, 꿋꿋한 삶의 의지에 관한 문제이든, 혹은 사회적 약자에 관한 문제이든 에세이는 개념적 사고와 논리적 문장을 통하여 주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얻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찰스 램을 정점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본격수필작법은 <탱자꽃>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로 주제를 개념적,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형상화한다. 이것이 몽테뉴 본래의 에세이와 본격수필의 다른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