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산을 내려가지 않고, 신도들이 베푸는 공양에 가지 않을 것이며, 화주를 보내지도 않을 것이다. 오직 절에서 1년 동안 수확하여 거둔 것을 360등분하여 하루에 하루분만 사용할 것이며, 사람의 수에 따라 늘이거나 줄이지도 않을 것이다. 밥을 먹을 만하면 밥을 짓고, 밥 짓기가 부족하면 죽을 쑤고, 죽을 쑤기도 부족하면 미음을 끓일 것이다. 새로 오는 사람과 상견례를 할 때에도 차 끓이는 것으로 족하다. 다른 일은 애써 줄이고 오직 도(道)를 결판하는 데에만 마음을 기울일 것이다." <부용도해선사 어록>
송나라 때의 부용도해 스님(1042-1118)은 절의 주지를 맡은 뒤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도량에서 대중들과 더불어 수행에만 힘쓰고자 대중들을 독려했습니다.
신임 주지의 꼿꼿한 기상에 대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세속에 나가 어울리지 않고 세속의 시주와 공양도 받지 않으며 대중 운력을 통해 농사지어 자급자족한 생활을 하면서 오직 공부에만 힘썼습니다.
부용도해 스님은 귀양살이를 한 이력이 있습니다. 죄목은 항명죄이다. 그는 휘종 황제로부터 황실로 들어 와서 법문을 해 달라는 청을 받고 거절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거절했다. 그래서 황제의 노여움을 사 귀양살이를 했다. 황제에게 항명죄를 언도 받기 전 황제가 자색 가사 한 벌을 하사 했는데 부용도해 스님은 그것을 거절한 적도 있습니다.
말로만 철저히 공부하자고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산문을 나가지 않고 청정 도량을 유지하며 공부를 했던 것입니다. 황제의 부름을 받고도 거절할 정도로 수행 의지가 투철했습니다.
내 나이 일흔 여섯
세상 인연 다 했네.
살아서는 천당을 좋아하지 않았고
죽어서는 지옥도 겁내지 않네.
2년간의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부용도해 스님은 고향으로 돌아가 초암을 짓고 여생을 보내다가 임종했습니다. 그의 임종게는 아주 간명합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나 있습니다.
천당과 지옥을 초월한다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이 곧 천당과 지옥을 초월한 것이었기에 이렇게 임종게를 읊을 수 있었습니다.
"대사님을 황궁으로 모셔 가지 못하게 되면, 목이라도 베어다가 황제께 보여드려야 합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자, 목을 베어가시오."
이것은 중국 선불교의 4대 조사인 도신 대사와 당태종의 사자가 나눈 대화입니다. 당태종 이세민이 도신 대사를 궁으로 모셔 법문을 듣고자 모셔 오라 했던 것입니다. 이미 도신 대사는 세 번이나 태종의 부름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습니다. 태종이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한 지경에 도신 대사가 처방전을 보냈고 그대로 약을 쓴 태종은 쾌차 했습니다. 그러니 최고의 권력자인 왕으로서 얼마나 스님을 뵙고 싶었겠습니까?
태종은 도신 대사의 법력에 감동해 스님이 머물던 절에 건물 한 채를 건립해 시주했습니다.
도신 대사는 끝내 황실로 가지 않았고 그의 손자뻘인 6조 혜능 대사 역시 측천무후와 태종황제의 부름을 받았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수행자들은 세상과 좀 떨어진 곳에서 치열하게 수행하여 득도를 한 후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자비와 지혜의 실천으로써 그 깨달음을 펼쳐 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5조 홍인 대사와 한 스님의 대화가 <능가사자기>란 책에 전하고 있습니다.
"불법 공부는 왜 시정을 떠나 한적한 산 속에 머물며 해야 합니까?"
"큰 집의 대들보감은 본래 심산유곡에서 나온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1978년 구마고속도로 개통 때 해인사를 찾았지만, 성철 스님이 “세상에선 대통령이 어른이지만 절에 오면 방장이 어른이므로 3배를 안 할 바에야 만나지 않는 게 낫다”고 큰절로 내려오지 않아 만남이 무산됐다고 한다. 또 전두환 정권의 그 서슬 푸른 시절에도 청와대 초청에 응하지 않고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출처 : 허정 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