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년의 고창 전투를 기점으로 후백제의 견훤황제는 고려에 서서히 밀리기 시작한다. 그 구체적인 이유는 전편에서도 어느정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오늘 이 시간에는 신검이 부친인 견훤에게 반란을 일으킨 배경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경쟁자인 왕건보다 10년이나 연장자인 견훤 자신의 시간적 한계가 후백제로서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일찌감치 태자 무를 정윤, 즉 황태자로 책봉하여 견훤에 비해 훨씬 많은 자식들을 보유했으면서도 후사 문제를 일찍 매듭지은 왕건에 비해 기록에 9-10명의 아들들을 두었다는 견훤은 그 숫자는 왕건에 비해 적었지만 아들들의 나이가 왕건의 그들보다는 훨씬 많았기 때문에 성장한 아들들을 두고 훨씬 어려운 선택을 할 처지에 놓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견훤은 그토록 후계자 선택을 늦도록 결정하지 못했을까?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겠지만 소생들의 자질이 엇비슷하겠거나 아니면 황자들의 세력들이 서로 막상막하하여 견훤으로 하여금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했을 가능성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장남인 신검을 일찍 황태자로 책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견훤 자신은 후계자를 출생순이 아닌 철저한 능력순으로 뽑을 결심을 하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어쨌든 견훤이 이토록 주춤하는 사이에 왕건은 그와는 반대로 나이가 다른 소생들에 비해 월등히 많았던 장화황후 소생 무를 일찌감치 정윤으로 책봉해 대조를 이룬다. 반면 견훤의 아들들은 이미 930년대를 기준으로 장년의 나이에 돌입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곧 장차의 후계문제, 나아가서 후백제의 장래에 암운을 드리운 문제였음에 틀림없다. 물론 고려도 삼한통일 이후 견훤의 아들들과 비슷한 골육상쟁을 겪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견훤의 이러한 문제 이외에도 당시 신라를 놓고 고창에서 자웅을 겨룬 끝에 견훤이 패한 것도 국운에 지대한 타격을 입힌 결과를 초래했다. 일찌기 공산 전투에서 고려의 8장군을 전사시키고 웅장한 국서를 보내는 등 (왕건 또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최치원으로 하여금 이에 대한답서를 작성하게 했다 한다) 위세를 떨치던 견훤은 이 전투로 말미암아 경상도 일대에서 총퇴각해 전라도 일대로 국축된 수세의 입장으로 돌변해 국력의 급격한 축소를 가져왔다는 사실도 이미 필자가 전편에 어느정도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후백제와 고려는 충청남도 일대를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필자가 올린 고려사 공직전에도 나왔듯이 견훤의 심복으로 자처하던 공직이 시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개 호족의 본성을 드러내 왕건에게 붙는 사건이 932년에 터진 것이다. 충청남도 일대를 관장하던 공직의 배신은 민감한 국경지대의 변란을 자초하던 것으로써 견훤에게는 심대한 타격을 준 것은 불문가지였다. 후삼국의 판도를 결정짓는 경상북도 일대를 고려에 빼앗기고 이어 다음 요충지인 충청남도 일대까지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이미 고령이던 견훤은 이같은 일련의 극도의 위축감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직의 배신이 과연 고려사 기록대로 자의였는지 아니면 억지로 끌려간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가솔들의 일부를 남겨두어 견훤의 잔인한 응징대상으로 하게 된 것을 볼때 공직의 배신은 타의에 의한 반강제적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고려의 귀순공작을 들 수가 있다.
이같은 후백제의 전반적인 수세입장에도 불구하고 견훤은 아직도 고려에 대한 반격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실 견훤의 몰락징후에도 불구하고 이 늙은 호랑이는 아직도 건재함을 다소나마 과시하고 있었다. 그의 몰락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고창 전투때도 기록에 따르면 고창 전투의 패배 그 이틀날에 패잔병을 모아 오늘날 경상북도 안동 풍산군에 있는 순주성을 습격하여 고려의 장군 원봉을 야반도주하게 만들고 그곳의 백성들을 완산주로 옮겼을 정도로 견훤은 여전히 무서운 저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공직의 배신으로 극도의 심적 공황상태에 빠진 견훤은 위기의식으로 고려에 복수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는데 이러한 움직임이 구체화된 것이 바로 932년 9월에서 10월에 걸친 이른바 '송악습격사건'이었다.
'송악습격사건'은 세계사에 비추어보아도 유례가 드문 기발한 군사작전이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백제측에서 적의 심장부가 바닷가에 있는 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순식간에 고려의 기능을 마비시킨 절묘한 전략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후백제의 황도 완산주는 내륙에 위치해 있어 고려쪽에서 이를 도모하자면 육로로밖에 접근이 어려운 상황을 이용한 것으로 견훤측의 천재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일대 사건이었다. 설령 견훤 자신의 계책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백제측에서 이같은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백제의 저력과 인재층이 아직도 고려에 대적할 만하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송악습격사건'은 과연 드라마의 묘사처럼 멍청한 고려측 해안경비대의 직무유기로 손쉽게 이루어진 일대 해프닝이었을까? 필자는 후백제의 이 전격적인 해상공략이 가능했던 몇 가지 가능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931년 고려측의 최대명장이었던 유금필의 귀양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유금필은 특히 왕건의 고려건국 이후 사서에 화려하게 등장해 눈부신 활약을 보이는데 고창 전투에서도 그의 활약은 절대적이었다. 그런 유금필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확실치 않아도 931년 쫓겨나 곡도로 유배길에 오르자 복수에 여념이 없던 견훤측으로서는 일단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후백제는 그가 귀양에 처해있는 동안 송악습격사건을 전격적으로 실행에 옮길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고 고려측으로서는 뛰어난 장군의 부재라는 국가적인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929년 고창 전투 직전 후백제의 힘이 절정에 도달해 있었을때 이루어낸 나주 탈환을 들 수가 있었을 것이다. 나주를 다시 탈환함으로써 견훤은 바야흐로 서남해의 요충지를 확보해 외부로의 길이 다시 트이게 되었고 다시 해군력을 재건할 수 있는 바탕이 재생되었다. 반면 고려는 왕건이 궁예시대에 일찌감치 확보해놓은 나주 일대를 30여년만에 빼앗김으로써 수군력의 일대 타격을 입어 다시 제해권을 상실한 듯이 보인다. 이것은 송악습격사건때 기록만으로는 고려가 무기력하게 당한 듯이 보이나 사실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고 수도권 방위에만 여념이 없던 고려측의 전력상태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려측은 나주를 빼앗김으로써 여기에 집중시켰던 해군력이 거의 전멸상태에 이르렀으며 후백제는 내친김에 고려의 수군기지들을 하나하나 뿌리뽑기 위해 고려의 송악까지 밀고 들어감으로써 수군력의 초토화를 기도했던 것이다.
백제측이 농번기인 9월과 10월을 기해 기습작전을 단행한 것도 절묘했다. 이때는 추수철이기 때문에 고려는 대부분의 군사력을 생산력에 돌렸을 것이고 이에 비해 고려보다 훨씬 중앙집권화가 되어 있던 후백제는 이같은 고려의 방심을 이용해 적국의 심장부를 초토화시키는 데에 더 수월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 고려는 이후 3년 동안 전혀 바다에서 힘을 못썼던 것이다. 이는 마치 임진왜란때 조선이 육지에선 연전연패하고 바다에선 연전연승을 했듯이 바로 후백제가 이같은 조선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었다.
송악습격사건의 대성공과 이어 고려의 중요 인물이던 최응의 죽음으로 견훤은 다시한번 고려에 대한 반격의 호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응이 얼마나 고려측의 중요한 인물이었는가는 유금필에 못지 않은 고려사 최응전의 자세하고 방대한 기록으로도 충분히 입증이 된다. 고려가 고창 전투 이후 신라경영에만 몰두한 나머지 후백제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 처럼 그만큼 신라는 고려나 후백제나 다같이 삼한통일을 위해서 먼저 선점해야 할 존재였는데 이미 927년 한번 경주를 습격했던 견훤은 다시한번 송악습격작전 성공의 여세를 몰아 933년에 신라를 도모하려고 군사를 일으킨다.
전편에서 필자는 신검이 견훤의 장남이었지만 뛰어남은 들째인 양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과연 왜 견훤이 검증되지 않은 신검을 이때 총사령관으로 삼아 신라를 치게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같은 견훤의 결정은 대실수에 불과해 신검은 이 전쟁에서 유금필에게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참패를 당하게 된다. 이 933년 전투는 기록상에 남은 신검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투기록인데, 여기서 그는 유금필의 80명 용사들에게 한번 패하고 또다시 경주에서 되돌아오는 유금필군에게 매복을 걸었다가 패하는 최악의 전투를 치룬 것이었다. 이에 대한 견훤의 분노와 땅에 떨어진 후백제의 위신을 우리는 이로써 어느정도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당시 고려는 중국에 대한 저자세 외교로 또다시 수세로 몰린 정국을 타개하려고 할 정도로 국세가 위축되어 있었는데 유금필의 승승장구가 오직 고려를 재생시킨 원동력이 되었으니 과연 유금필은 고려의 영웅이라 할 만 했다.
신검의 실패로 후백제의 사기는 또다시 떨어졌고 이어 934년 운주 전투에서의 후백제의 대참패로 후백제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고려측에 사로잡히게 되자 견훤은 이제 대세가 고려측에 기울었음을 절감한 듯 하다. 운주 전투에서는 고려측에서 이미 몇달전에 귀순한 대광현의 발해인들이 참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수만명이 투항한 이들로 인해 고려측은 전투력이 급격히 강해져 이 전투의 승리에 상당한 변수가 된 듯 하다. 운주전투와 관련된 기록에서 기병들의 맹활약이 돋보이는데 아마도 이들은 발해인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반면 백제측은 사방으로 고립된 지형으로 인해 이러한 지리적인 혜택마저 누리지 못하고 그만 무너지고 말았으니 기록에는 운주 전투로 인해 웅진 이북 30여성이 고려에 들어갔다 했는데 이는 곧 고려의 남하를 뜻하는 것이었다.
운주전투는 또한 후백제의 입장에서는 막대한 인재손실을 의미했다. 기록에 '용장'이라는 표현으로 남아있는 상달과 최필, 그리고 유일하게 후백제의 '술사'로 기록된 종훈등이 모두 이 전투에서 고려군에게 사로잡힌 몸이 되었다. '용장'이란 결국 적국인 고려가 인정한 후백제 최고의 장군들을 의미하며, '술사'란 다름아닌 군사로 종훈은 후백제의 최고 권위의 전략가였던 것이다. 고려측 기록에의 이러한 표현은 오직 이 운주전투에서만 집중적으로 발견되는데 이는 결국 후백제는 최고의 인재들을 모두 이 운주전투에서 잃음으로써 이제 거대한 세력으로 압박해오는 고려에 대해 방어적인 입장만을 고수하는 처지로 굴러떨어진 것을 의미했다.
이때에 이르러 확실히 견훤은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불교에 심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여러 자료들로도 충분히 입증이 되는 것이고, 당시의 정황과 고령이라는 그의 나이 또한 이를 조성하는 여건이 되었다. 다시 말한다면 견훤은 이제 후백제의 팽창정책이 한계에 다달았다고 여겨 현상유지쪽으로 가닥을 잡게 되어 온건노선을 외부적으로 천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외부정세의 안정을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견훤은 내부적으로 여전히 후사문제를 매듭짓지 못한 것이 곧 크나큰 파국을 자초하게 되는데, 이의 막후에는 신검과 금강으로 대표되는 후백제 조정의 힘겨루기 양상을 우리는 상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견훤이 신검을 후사로 결정짓지 않은 것은 933년 전투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을 것이나, 금강 역시 전편에서 필자가 강조했듯이 그다지 대단한 인물이 못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신검을 악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고려측의 상대적인 과장이 깃들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금강은 곧 고려에 대한 온건파, 신검은 강경파를 각각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당시 견훤의 심정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없고 삼국유사에만 있는 희한한 기록이 하나 있다. 거기에 말하기를 :
" 노부(견훤 자신)가 신라 말기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군사가 북군인 고려군보다 갑절이나 많으면서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 아마 하늘이 고려에게 손을 빌리는 것 같다. 어찌 고려왕에게 귀순하여 생명을 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고 견훤 자신이 스스로 말했다고 적혀있다. 이어 이 말을 들은 신검, 양검, 용검이 모두 이에 반대했다고 했는데 과연 견훤이 이때부터 고려에 투항할 마음이 있었을까? 마치 불교에 심취한 견훤이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순리로 고려에 항복하는 것이 옳다는 듯한 이 기록은 다분히 고려측의 윤색을 거쳤을 것이고 또하나 주목할 점은 신검 3형제가 견훤의 이같은 심경에 반대했는데 유독 유력한 황제 계승자인 금강이 반대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이다. 이에 미루어 추정해보면 금강으로 대표되는 세력 또한 친고려적인 색채를 띄고 있어 이때와서 지친 견훤에게 고려에 대한 유화책을 쓰도록 권고한 듯이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고려측의 기록에 금강이 호의적으로 기술된 것도 다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검이 자신의 부친인 견훤에게 반역의 칼을 들이대는 이유를 어느정도 정리할 수가 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보다도 견훤의 의중에는 신검 자신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기록상으로 보면 933년의 졸전이 신검에게 크나큰 상처가 되었겠지만 그것보다도 운주 전투 이후 견훤은 온건정책을 추구했는데 이 과정에서 신검이 장애물이었기 때문인 것이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반면 신검으로 대표되는 후백제의 강경파들은 견훤이 고려에 대해 점차 의욕을 잃어간다는 측면에서 상당한 불안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은 견훤의 현실안주정책은 곧 당시 여건으로 보아 후백제의 붕괴를 가져온다는 불안심리를 표출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제는 후백제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견훤의 대안으로 맏아들 신검을 추대해 뭉쳤을 개연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삼국유사의 위의 기록이 일말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면 견훤의 말을 따름은 최소한 후백제의 고려에 대한 굴욕적인 사대나 최악의 경우에는 후백제 사직의 멸망을 뜻하는 것이었다. 과연 이때에 와서 이미 70을 넘은 견훤이 노망이 났는지 아니면 이제 모든 것을 체념한 영웅의 몰락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사 문제를 둘러싼 이때에 와서는 후백제 지배층 내부에서도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음은 분명했던 것이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이찬 능환인데, 신라의 관직체계를 그대로 모방한 후백제의 제도상으로 비추어볼때 이찬은 황제 다음의 최고의 자리였다. 이 사실은 능환이 후백제를 책임지는 막중한 위치에 있었으며 그것은 곧 견훤의 심복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능환이 견훤을 버리고 신검쪽에 붙은 것은 곧 그 또한 견훤의 온건노선에 동의하지 않았고 오직 팽창주의나 대제국화만이 후백제의 돌파구라는 신념을 가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그는 바야흐로 오랫동안 모셨던 주인인 견훤에 대한 반정을 계획하고 후백제의 자존심을 위해 견훤의 아들들중 가장 뛰어났던 양검등과 접선해 견훤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반란에 돌입했다.
일명 '신검의 난'은 고려측 기록에 남아있듯이 단순히 황제 자리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보다도 당시 후백제의 장래에 대한 지배층의 진지한 고민끝에 일부 우국충정의 강경파들이 신검을 내세워 제국의 자주성을 견지하기 위한 '혁명'의 성격이 더 강했다. 신검의 반란이 후계자 문제 때문일 가능성이 적은 것은 견훤이 미처 후계자 문제를 완전히 일단락시키기도 전에 이 사건이 터진 것에서도 자명하게 드러난다. 다만 신검이 상징적인 인물이었음은 이 반란이 발생했을때 신검은 견훤 곁에 있었다는 데에서 드러나고 따라서 능환은 신검을 제쳐두고 견훤의 아들들중 가장 출중한 양검과 먼저 손잡았다. 능환이 지방에 있던 양검과 용검을 먼저 황도인 완산주로 불러들인 것은 지방군을 동원하여 황도를 역포위했음을 뜻한다. 이들 반란세력의 핵심은 곧 능환과 양검이었으며 황도로 입성하여 정국을 장악한 뒤에야 그들은 신검을 내세워 반란세력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제 견훤은 공직에 이어 또다른 심복이었던 능환과 더 나아가 자신의 혈육들의 배신에 직면하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신검시대'가 열리는 서기 935년 3월의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