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 하늘을 깨물었더니
하늘을 깨물었더니 비가 내리더라
비를 깨물었더니 내가 젖더라 *
* 바쁜듯이
정말 바쁘지는 말고
바쁜 듯이
그것도 스스로에게만
바쁜 듯이
한가한 시간이 드디어
노다지가 될 때까지 느긋하게
느긋하게 바쁜 듯이
* 행복
산에서 내려와서 아파트촌 벤치에 앉아
한 조각 남아 있는 육포 안주로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아 행복하다!
나도 모르겠다 불행 중 다행일지
행복감은 늘 기습적으로 밑도 끝도 없이 와서
그 순간은
우주를 온통 한 깃털로 피어나게 하면서
그 순간은
시간의 궁핍을 치유하는 것이다.
시간의 기나긴 고통을
잡다한 욕망이 낳은 괴로움들을
완화하는 건 어떤 순간인데
그 순간 속에는 요컨대 시간이 없다 *
* 비스듬히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
*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 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
* 아침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는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 나무에 깃들여
나무들은
난 대로가 그냥 집 한 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깃들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
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지를! *
* 갈증이며 샘물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갈증이며 샘물인
샘물이며 갈증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
갈증이며
샘물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 글쓰기
뭘 하느냐구요?
빛을 만들고 있어요
어두워서
자칫하면
어두워지니까
나의 안팎
자칫하면
어두워지니까
* 어떤 적막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一家를 이룬다ㅡ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
* 세상의 나무들
세상의 나무들은
무슨 일을 하지?
그걸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
허구한 날 봐도 나날이 좋아
가슴이 고만 푸르게 푸르게 두근거리는
그런 사람 땅에 뿌리내려 마지않게 하고
몸에 온몸에 수액 오르게 하고
하늘로 높은 데로 오르게 하고
둥글고 둥글어 탄력의 샘!
하늘에도 땅에도 우리들 가슴에도
들리지 나무들아 날이면 날마다
첫사랑 두근두근 팽창하는 기운을! *
* 꽃피는 애인들을 위한 노래
겨드랑이와 제 허리에서 떠오르며
킬킬대는 滿月을 보세요
나와 있는 손가락 하나인들
욕망의 흐름이 아닌 것이 없구요
어둠과 熱이 서로 스며서
깊어지려면 밤은 한없이 깊어질 수 있는
고맙고 고맙고 고마운 밤
그러나 아니라구요? 아냐?
그렇지만 들어보세요
제 허리를 돌며 흐르는
滿月의 킬킬대는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