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수상] 대꽃 질 무렵 / 조영진
비대 생장이 불가한 운명이었다
꽃 대신 무덤을 함부로 피우던
도처의 피 마신 땅에서 대나무들은 차이
자신의 자세 중 하나임을 깨닫는다
이슬 서린 댓잎을 끊어내고
끝을 예각으로 버려 창이 되는 건
저며진 넋의 뼈를 발골하는 일
발목에 묶인 그림자마저 피에 젖어 붉던 날
몸에 피 도는 속도로 일어나 녹두를 따랐다
죽창들의 불면으로 핏발 선 동이 텄고
대나무 빈속에서 들끓던 슬픔이
늑골의 상처로 터져 흘림체로 피던 시
꽃 피우면 말라죽는다는 혈죽들이
파죽의 기세로 대꽃 피웠다
창이 되어야만 쓸 수 있던 대나무의 시를
하늘은 끝내 오독하였으므로
우금치에 꽃비 내리던 날 있었다
아, 갈 데까지 간 곳에서 툭 대꽃 쓰러졌다
어긔야 어강됴리 창이 필요 없는 세상에서
아으 다롱디리 그대 다시 피어나길
꽃 지는 자세마저 첨예하여 낙화는 눈 뜨고 누웠다
어떤 꽃은 피는 일보다
지는 자세에 전력을 다한다
지는 꽃의 향기가 가장 진하니까
[우수상] 쇄빙선 / 김완수
나는 극지 끝에 있었다
꽁꽁 언 바다는 어둠의 영토
한가로이 노니는 열대어는 되기 싫어
유비처럼 떠도는 이름도 되기 싫어
동향 같은 얼음장을 깨뜨려 왔다
나는 실존으로 가는 쇄빙선
새들의 젖은 소리는 암초로 여기며
혁명가의 목소리같이 한밤을 헤쳐 왔다
어제의 바다는 어둠의 유허
부표도 등대도 없는 항해지만
바람따라 돛을 올리지 않았다
볕 드는 데 닻을 내리지도 않았다
어둠이 한구석으로 쓸리는 백야에
쉬어가는 뭍머리를 찾지 않았고
기척처럼 불이 켜지는 오로라에도
집으로 뱃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나는 얼음보다 단단한 결정이기에
스스로 녹아내리는 살얼음이 마뜩지 않다
해빙을 꿈꾸는 것이 머리의 일이라면
숫눈길 같은 얼음판에 길을 내는 것은 가슴의 일
눈보라가 흰곰들의 울음같이 쏟아질 땐
너머의 바다를 푸른 신대륙이라 하자
나는 지금 고독의 알을 깨고 있다
불면의 파도가 껍데기를 쪼아 주는 북극해에서
제13회 정읍사문학상 심사평
제13회 정읍사문학상에 응모한 작품은 모두 1,338편이었습니다. 이 중에 시는 1,081편, 수필은 257편이었습니다. 이 가운데서 대상과 최우수상, 우수상 등 3편을 가려 뽑는 일은 마치 수많은 파도 속에서 빛나는 진주 한 알을 찾는 과정과도 같았습니다. 응모작들은 저마다 고유한 목소리와 깊이를 지니고 있어 우열을 가리는 일은 결코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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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제13회 정읍사문학상에 응모한 작품은 모두 1,338편이었습니다. 이 중에 시는 1,081편, 수필은 257편이었습니다. 이 가운데서 대상과 최우수상, 우수상 등 3편을 가려 뽑는 일은 마치 수많은 파도 속에서 빛나는 진주 한 알을 찾는 과정과도 같았습니다. 응모작들은 저마다 고유한 목소리와 깊이를 지니고 있어 우열을 가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심사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살핀 것은 작품의 진정성과 창의성이었습니다. 최근 문학 현장에서 표절이나 인공지능(AI) 활용 사례가 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이번 심사에서는 무엇보다 작가의 혼과 성실한 창작의 흔적이 담겨 있는가에 주목했습니다.
1·2차 심사에서는 작품의 완성도와 더불어 정읍사 및 그 역사·문화적 맥락과의 향토적 관련성을 주요 기준으로 삼아 최종적으로 6편을 압축하였습니다. 이후 4명의 심사위원은 오랜 논의와 숙고를 거듭한 끝에, 수필 〈파종〉을 대상작으로 선정하였고, 시 〈대꽃 질 무렵〉을 최우수상, 시 〈쇄빙선〉을 우수상으로 선정하였습니다.
대상을 받은 〈파종〉은 제목에서부터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울림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정읍이 고향인 두 사촌 자매가 다시 찾은 마을에서 부모와 이웃, 그리고 공동체와 함께했던 삶을 따뜻하게 회고하는 과정은, 읽는 이로 하여금 저마다의 고향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곳곳에 살아 숨 쉬는 토속어의 사용은 수필의 친근함과 정감을 더해 주고, 작품 속에서 피어난 고향의 향수와 공동체적 기억은 오늘의 독자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최우수상을 받은 〈대꽃 질 무렵〉은 언어를 반죽하는 솜씨가 뛰어나고, 시적 상상력을 통해 동학의 정신을 대나무 이미지와 연결해냈습니다. 대나무가 자라나 마침내 ‘대꽃의 만개’로 치환되는 과정은 우금치의 역사와 겹쳐지며, 정읍의 정신적 뿌리를 되새기게 했습니다. ‘〈쇄빙선〉’과 ‘〈그림자 건축〉’ 또한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고심을 이끌었던 작품들입니다. 특히 〈쇄빙선〉은 극지의 얼음을 깨고 전진하는 쇄빙선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 현실을 성찰하게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아쉽게 순위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오래 붙든 작품으로 수필 〈쇠죽 냄새, 아버지의 삶〉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흔치 않은 어휘 선택과 독창적인 문체, 그리고 삶의 무게를 담아낸 서사의 깊이에서 작가의 연륜과 성숙한 문학 의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다음을 기약할 만큼 큰 잠재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일부 응모작 가운데는 표현의 적절성이 다소 부족해 거칠어 보이거나, 정읍의 지명이나 소재를 단순히 나열하는 방식에 의존해 주제가 혼탁해진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한 시에서 25행이 넘는 긴 구성이 많아 시적 긴장과 함축미가 다소 희석된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끝으로, 이번 공모에 정성을 다해 작품을 보내주신 모든 응모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비록 수상의 영예를 안지 못했더라도 창작의 여정 자체가 곧 문학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꾸준한 글쓰기가 우리 문학의 뿌리를 더욱 단단히 하고, 내일의 결실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 심사위원 전북문인협회장 수필가 백봉기, 익산 문인협회장 시인 이승훈
[출처] 제13회 정읍사문학상 / 조영진, 김완수|작성자 ksujin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