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잘려도 후회하지 않을 교우(염파· 인상여)>
진(秦)나라는 조(趙)나라를 공격하여 석성을 빼앗고 군사 2만을 죽인 뒤, 서신을 보내 회합을 갖자고 하였다.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은 매우 걱정이 되었다.
공연히 회합 장소에 나갔다가는 진나라 소왕(昭王)에게 사로잡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때 장군 염파(廉頗)와 환관의 우두머리인 인상여(藺相如)가 상의를 마친 후, 인상여가 혜문왕에게 말하였다.
“회합 장소에 나가도록 하십시오. 만약 가지 않으면 조나라가 약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됩니다.
제가 따라 가겠으니 아무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염파는 국경까지 따라가서 혜문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회합을 마치고 30일이 지나도록 대왕께서 돌아오시지 않으면 태자(太子)를 왕으로 봉하여 진나라를 치겠습니다.”
혜문왕은 염파의 주청을 쾌히 허락하였다.
얼마 후 회합장소에 도착한 조나라 혜문왕은 진나라 소왕과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주연이 한창일 때 진나라 소왕이 말하였다.
“전부터 조나라 왕은 음악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어디 한번 슬(瑟)이라도 연주해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조나라 혜문왕이 슬(瑟)을 연주하였다.
그러자 진나라 기록관이 앞으로 나와 이렇게 말하며 기록을 하였다.
“모년 모월 모일 진나라 왕은 조나라 왕과 회담을 하고 슬(瑟)을 연주하게 하였다.”
이번에는 인상여가 앞으로 나가 말하였다.
“진나라 왕께서는 진나라 음악을 잘하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마침 좋은 기회이니 이 질그릇으로 장단을 맞추며 부디 옥성(玉聲)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인상여가 내민 질그릇은 ‘분부’라는 진나라 그릇으로,
당시 미개한 진나라에서는 그것을 악기로도 대용하였다. 그것을 ‘질장구’라 하였다.
진나라 소왕은 화를 내며 질장구 치는 일을 거절 하였다. 인상여는 지지 않고 계속 간청하였다.
소왕은 더더욱 화를 내었다. 그러자 인상여는 그런 진나라 소왕을 쏘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왕과 저 사이는 다섯 걸음밖에 안 됩니다. 제 목을 찌른 피가 대왕의 옷을 적실 수도 있지요.”
이것은 자신을 희생하여 소왕을 죽일 수도 있다는 일종의 엄포였다.
이때 진나라 장수들이 인상여를 베려 하였다.
“물러서라!” 인상여는 소리치며 질그릇을 진나라 소왕 가까이 내밀었다.
여차하면 그 질그릇으로 상대의 머리를 내리칠 수도 있는 자세였다.
진나라 소왕은 할 수 없이 질장구를 때렸다.
그러자 인상여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조나라 기록관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적어 놓으시오. 모년 모월 모일에 진나라 왕이 조나라 왕을 위하여 질장구를 쳤다고.”
진나라 신하들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거의 어거지와도 같은 제의를 하였다.
“조나라 15개 성시를 진나라 왕에게 바쳐 장수를 축복해 주시오.”
그 소리를 듣고 인상여가 또한 말하였다.
“청컨대 진나라는 함양을 바치어 조나라 왕의 장수를 축복해 주시오.”
결국 진나라 왕은 조나라 왕을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조나라 혜문왕은 회담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이 모두가 인상여의 재치 있는 말솜씨와 지혜 덕분이었다.
혜문왕은 인상여의 공로를 인정하여 상경의 벼슬을 내렸다.
그런데 같은 상경이라도 직위로 볼 때 염파보다 윗자리였다. 염파는 그것이 불만이었다.
“나는 조나라의 대장군으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인상여는 입만 놀려 일을 꾸몄는데,
지위는 그가 더 높아졌다. 더구나 인상여는 비천한 출신이니, 나는 그런 사람 밑에서 일을 할 수 없다.”
염파는 이처럼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며, 인상여를 만나면 그냥 놔두지 않겠다고 별렀다.
이 소문을 들은 인상여는 염파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하였다.
그런데 어느 땐가 인상여는 외출을 하다가 저 쪽에서 걸어오는 염파를 목격하였다.
그는 얼른 옆길로 숨어 버렸다. 그때 인상여의 가신들이 말했다.
“왜 자꾸 염파 장군을 피하려고만 하십니까? 두 분은 동등한 서열에 있습니다.
장군과 재상이라는 분들이 평범한 사람들처럼 행동하시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자 인상여가 가신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진나라 왕과 염파 장군 중 어느 쪽이 두렵다고 생각하나?”
“물론 진나라 왕입니다.”
“그런 진나라 왕에게 나는 당당하게 대했다. 그리고 진나라 왕의 신하들은 마치 어린애처럼 취급해 주었다.
그런 내가 염파 장군을 두려워하겠느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강대한 진나라가 우리 조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염파 장군과 내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두 사람이 다툰다면 어느 쪽인가가 상처를 입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처신 하는 것은 개인의 다툼보다 우선 나라의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상여의 말에 가신들은 모두 감동하였다. 그런데 마침 염파가 인상여의 말을 엿들었다.
염파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그날로 웃옷을 벗고 가시 회초리를 등에 진 채 인상여를 찾아가 사죄하였다.
“부디 어리석은 자를 용서해 주기 바라오.”
인상여는 염파를 용서하였다. 그 이후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아졌다.
두 사람은 ‘문경의 교우(刎頸之交)’를 맺게 되었다.
이것은 생사를 함께 하는, 다시 말하면 ‘목이 잘려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친한 교우관계’를 일컫는 말이다.
-《인물로 읽는 史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