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
a. 한민당의 창당 배경과 창당 이후.
ⅰ. 한민당은 우익 인사들이 결성한 대표적인 보수 정당이며, 설립 목적은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다. 한민당 창당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활동에 크게 자극 받았다.
ⅱ. 1945.9.4. 우익진영 대표 82명은 한민당 준비위원회 발기총회를 개최하고, 945.9.8. 발기인 명의로 ‘조선인민공화국의 타도’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그것은 “기미(己未) 이래의 독립운동의 결정체이며 국제적으로 승인된 재외 임시정부를 부인하는 도배가 있다면 3,000만 민중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한민당은 창당 초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옹호했으며, 임정을 중심으로 정통성 있는 정부 수립과 건국(建國)을 목표로 삼았다.
ⅲ. 1945.9.16. 한민당은 창당을 선언하면서 영수에 이승만·김구·이시영·서재필·권동진·오세창, 수석총무에 송진우, 총무에 원세훈·백남훈·배관수, 사무국장에 나용균 등을 발표하였다. 이외에 한민당의 주요구성 세력은 지주·자본가적 기반을 가지고 있거나 그 후예들인 언론인과 지식인층이었다.
ⅳ. 한민당은 미(美)군정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남한의 실질적인 여당 위치를 확보했다. 한민당은 충칭 임시정부를 남한의 유일 정부로 내세웠으며, 미군정청의 정치노선에 적극 참여하여 정치적·경제적 실권은 물론 경찰력까지 장악함으로써 ‘조선인민공화국’ 타도에 주력해 결국 그것을 불법화시켰다.
ⅴ. 한민당은 정부 수립 방안을 놓고 남한에서만이라도 우선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단독정부론을 주장한 이승만의 편에 서면서 임시정부와 등을 지게 됐다. 임시정부 측은 ‘단정 반대’를 외치며 남북한을 아우르는 단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한민당은 이승만의 단정 추진을 지지하면서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을 주도했다.
ⅵ. 한민당은 이승만을 영도자로 하는 독립촉성국민회의의 중심세력으로서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계획에 반대했다. 이 과정에서 한민당은 이승만과 협력해 일부 용공적인 충칭 임시정부세력을 공산주의자와 협력하는 정치세력으로 규정하고, 1946.2.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 민주의원에서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한민당은 5만 명의 당원으로 출발해 1947년 말 미군정청에 신고된 한민당 당원수는 약 86만 명이었다.
ⅶ. 1948.5.10.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제 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민당은 198석 중 29석을 확보했다. 한편 이승만이 이끈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55석으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ⅷ. 한민당은 법학자 유진오를 중심으로 내각책임제 헌법 제정을 추진했지만 이승만의 반대로 대통령중심제 헌법으로 바뀌면서 이승만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특히 정부 수립을 위한 초대 조각 인선에서 한민당이 소외되면서 이승만에 대한 본격적인 반감과 대립이 심화됐다.
ⅸ. 1949.2.10. 한민당은 신익희 중심의 대한국민회와 통합, 민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3년 4개월 만에 해체되었다. 한민당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도와 1948.8.15.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기여했지만, 이승만 노선에 반발함으로 야당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한민당은 숱한 이합집산과 곡절 끝에 야당인 민주당(民主黨)의 모태가 돼 한국 정당사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보수적인 이들은 민족주의적 자유민주주의를 근본으로 삼았다.
b. 임시정부와 한민당의 갈등
ⅰ. 한민당의 송진우 측은 정치적 헤게모니와 친일파 문제 등으로 중경임시정부 측과 갈등이 적지 않았다.
ⅱ. 1945.12. 송진우는 한민당 수석총무로서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환국 환영준비회를 열었다. 김구, 김규식,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조완구, 엄항섭을 비롯한 임정 요인 전원이 초대된 자리에서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친일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겠느냐”라고 비판하자, 송진우가 “여보 해공,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시정부를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 소리가 나오는 거요? 해방된 우리 국민들에게 임시정부를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의 법통 때문이지 노형들 개인을 위해서인 줄 알고 있소? 국외에서는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국내 사람들보다 오히려 적었을 거 아니야? 가만히들 있기나 해요.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든 힘을 합쳐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 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 이러한 말들은 삼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ⅲ. 송진우는 1945.12.27.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발표된 조선의 미ㆍ소 양측의 5개년 신탁통치의 문제에 대해 김구의 임시정부와 견해 차이를 나타냄으로써 마찰을 빚었다. 이로 인해 송진우는 1945.12.30. 새벽 6시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송진우가 신탁통치를 지지한다고 생각한 한현우(34)와 유근배(21) 두 사람에 의해 피격 암살당했다. ‘하지’는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장택상도 김구를, 조병옥도 김구를 지목하였다.
ⅳ. 1947.12.2. 장덕수(한민당 수석총무)가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한독당 당원인 박광옥과 배희범 외 5명의 권총 저격을 받고 암살되었다. 장덕수는 평소 한민당 한독당과의 연대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한민당은 장덕수 암살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ⅴ. 한독당(한국독립당)은 1930년 상해임시정부 요인인 이동녕, 이시영, 김구, 조소앙, 안창호 등이 중심이 되어 만주에서 결성한 독립운동 정당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 격이며, 김구의 영도 아래 복국(復國), 구족(救族), 구세(救世)의 삼균주의를 내세워 강력한 항일 투쟁을 폈다.
첫댓글 해 아래 새것이 없군요.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 갈등은 여전하군요.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그러나 지금은 당시 보다 상황이 안 좋아요. 당시 권력을 잡지 못하고 눌려 있던 좌파 민족주의 세력이 지금은 권력을 잡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