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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8일(종교개혁 기념 주일)
에베소서 2:8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초안: 2021년 10월 31일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수정: 2024년 10월 28일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김규태 목사
♧ 이 설교문은 한국웨슬리학회편, 「웨슬리 설교전집1」(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년), 15~31쪽에 수록된 존 웨슬리의 설교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Salvation by Faith)”의 전반부에 기초해서 작성되었습니다. 이 설교는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에서의 복음적 회심을 체험한 이후, 1738년 6월 11일 옥스퍼드에서 행한 첫 번째 공식적인 설교였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 세계를 돌며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성공해야 하는지 세미나를 연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에 간 첫날, 그는 천국에서는 뭘 해야 하는지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그가 가장 큰 강당에서 수많은 사람을 앞에 두고 열심히 강연을 하는데, 맨 앞자리에 예수님이 앉아 강연 내용을 열심히 적고 계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상히 여긴 남자는 쉬는 시간에 예수님께 곧장 달려갔습니다. 그는 다른 분도 아닌 예수님이 왜 그토록 열심히 강연 내용을 필기하시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도 처음 듣는 소리라서 그런다.”
-출처: 마이클 웰즈, 「하늘의 제자도」(서울: 두란노, 2018); 「생명의 삶」(서울: 두란노, 2021년 2월호), p. 37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웃픈’(‘웃기면서 슬픈’의 줄임말)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드셨습니까?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올바른 진리 위에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 주일입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루터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해서 비텐베르크 성의교회 정문에 95개 조의 반박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반박문은 라틴어로 쓰였고, 인간의 죄는 금전을 통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쓰였습니다.
또 루터는 라이프찌히 공개토론을 통해 교황과 중세교회에 대항했습니다. 이에 교황과 황제가 루터를 탄압하자, 루터는 제후의 보호를 받고 성서를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후 루터를 지지했던 제후들의 모임인 슈말칼텐 동맹과 황제 간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이 전쟁에서 루터를 지지했던 제후들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제후와 도시 단위의 신앙의 자유가 인정받게 됩니다. 이후 수많은 개신교회가 탄생하였고, 우리교회도 루터의 종교개혁 유산을 물려받고 있습니다.
저는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맞아서, 과연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의 원천이고, 믿음은 구원의 조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을 말합니까?”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여도, 천국 문을 열 수 있는 ‘참된 믿음’이 있고, 천국 문을 열 수 없는 ‘유사 믿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는 ‘참된 믿음’은 천국 문을 열 수 없는 ‘유사 믿음’과 어떻게 다를까요?
첫째로, 우리로 구원받게 하는 참된 믿음은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과는 다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데, 이 믿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에 대한 믿음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또한, 자기들에게 상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불교나 유교 등 타 종교에는 신에 대한 개념이 매우 약합니다. 오히려 윤회 사상과 인과응보 사상이 강합니다. 이러한 사상들은 그릇된 하나님 개념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 초점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수양과 극기에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분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정확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있고, 그 참된 지식이 우리를 믿음의 세계로 이끌어 줍니다. 정리하자면, 타 종교에는 자기 수행이 요구되고 있지만, 기독교에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요구됩니다.
둘째로, 우리로 구원받게 하는 참된 믿음은 마귀의 믿음과도 다릅니다.
마귀의 신앙은 타 종교인들의 신앙보다는 훨씬 앞서갑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의 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한 귀신 들린 사람이 다음과 같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눅 4:34).”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성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귀신은 바울 일행을 보고 다음과 같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행 16:17)”
귀신은 바울 일행이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믿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었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훗날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것’(히 10:13)도 믿었습니다. 또한, 마귀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도 믿고 있었기에 그로 인해 떨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믿음입니다.
셋째로, 우리로 구원받게 하는 참된 믿음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과도 다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배와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기적을 행했고, 마귀의 세력을 제압하는 능력을 행했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고 돌아온 후에는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우리의 믿음을 더 크게 해 주소서”라고 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보다도 크지 않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타 종교인들의 믿음과도 다르고, 마귀의 믿음과도 다르며, 예수님의 제자들의 믿음과도 다르다면 과연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어떤 합리적이고 철학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냉랭하고 생명력 없는 그런 지적 동의나 구호도 아닙니다. 물론 믿음은 지적 동의가 포함됩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믿음은 지적 동의를 넘어서 마음으로 믿는 신앙입니다. 또한,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이 믿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과도 구별되는 것입니다. 즉 이 믿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해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다(롬 4:25)”라는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에 대한 동의입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부활하심으로 지금도 내 안에서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죄가 용서받았고, 하나님과 화해되어 화평을 누리는 관계가 되었음을 믿는 신앙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행복한 결혼 관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혼하기 전에 상대방 배우자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고향은 어디이고, 직업은 무엇이며,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고, 앞으로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대화를 통해 장시간 알아갑니다. 서로를 알아가면서 서로에 대한 호감과 사랑하는 감정이 자라납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이 성립되기 위해서 지식과 감정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뒤따라야 합니다. 상대방을 내 남편과 아내로 맞이하여 생사고락을 함께하겠다는 신뢰와 확신이 서로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서로에 대한 지식적 동의만 있고, 감정이 없다면 불행한 만남이 될 것입니다. 또 서로에 대한 감정은 있는데 서로를 신뢰하고 자신의 인생을 맡기겠다는 결단이 없다면 이 또한 불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고,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분명히 알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에게 내 인생을 맡기겠다는 의지적 결단이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온전한 신뢰가 구원받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완전한 구원의 방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습니까?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구원받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구원은 확실한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자력 구원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믿음 이외의 그 어떤 조건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그것이 아닙니까?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몰래 침투했던 사람들은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완전해지려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구약의 율법을 첨가해야 하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 믿음 위에 무언가를 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도 많이 해야 하고, 전도도 많이 해야 하고, 봉사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신앙 생활하는 데는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사도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 선생에 불과하며,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기능을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있기에 우리가 죄인 된 것을 깨달으며, 율법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못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총으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러한 사도 바울의 십자가 사상을 물려받았던 사람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숨어계신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양면성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십자가가 모든 것을 시험하듯, 십자가가 모든 것을 보장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훗날 이러한 루터의 사상을 가리켜 사람들은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 그 한 가지만으로 저와 여러분은 구원받기에, 충분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일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천국 문 옆의 안내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잘 차려입은 멋있는 남자가 다가와 벨을 울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천국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1,000포인트를 획득해야만 합니다.”
그러자 그 남자가 말했습니다. “자신 있습니다. 저는 살아 있을 때 훌륭한 일을 많이 했거든요. 저는 지역 사회를 위해 시정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매년 많은 돈을 NGO 단체에 기부했고, 25년 동안 봉사 단체 회장을 지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굉장한 경력이군요. 1포인트 얻으셨습니다.”
그 남자는 깜짝 놀라 덧붙였습니다. “저는 아내와 결혼해서 45년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저는 항상 결혼 생활에 성실했고, 아이들을 사랑했고,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훌륭한 교육을 받게 했고, 명문대학에 보냈고, 그 결과 아이들이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아주 감동적입니다. 당신 같은 분은 여기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 1포인트를 얻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며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교회에 열심히 나갔습니다. 성가대에서 찬양도 했고, 20년 동안이나 주일학교 교사도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정말 대답합니다. 1포인트를 얻으셨네요. 자, 이제 997포인트만 얻으면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남자는 떨면서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밖에는 자랑할 게 없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지금 막 1,000포인트를 얻으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천국은 우리의 공로나 노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출처: 정대서, 「자기 중심성 벗어나기」(서울: 두란노, 2020);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21년 10월호), p. 149에서 재인용.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에 이끌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신뢰하십시오. 여러분을 의롭게 하시기 위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신뢰하십시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림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