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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2월 2일 오후 예배)
성 경 : 사도행전 13:42-52(신약 210)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은 지난주의 말씀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를 시작했는데 바울이 회당이 들어가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은 시대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사람들을 세우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다양한 사람들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위해서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때 두 종류의 선택이 있습니다.
첫 번째 선택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선한 목적으로 쓰임 받는 사람들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다윗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 쓰임 받은 분들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악한 목적으로 쓰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헤롯,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선한 목적으로 쓰는 사람이 있고 악한 목적으로 쓰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꾼들이 되되 선한 목적을 위해서 쓰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부르시지만 그 쓰임에 합당한 응답과 순종과 헌신이 없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포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유대인들이 하만에 의해서 학살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에스더에게 이 민족을 위해 왕에게 구해서 우리의 생명을 지키게 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에스더는 왕에게 부름을 받지 못한 상황이라 나갈 수 없다고 답하자 이렇게 에스더에게 말합니다.
에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서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쓰임 받는 성도가 됩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쓰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말씀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의 전도를 듣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바울의 선교를 반대하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 어디에서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성령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게 하시지만 사탄은 사람들이 복음에 마음을 닫게 만들고, 거부하고, 반대하고, 박해하게 만들어서 복음이 증거되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기뻐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1. 기뻐하는 사람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더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고 요청했습니다. 42절을 보면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바울의 첫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 중에 처음에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안식일에도 회당에 와서 이 말씀은 즉 복음을 전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가 유대인들로부터 매우 고무적인 반응을 얻었고 유대교인들 중에서 기독교로의 개종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설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 한 것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복음을 전한 것이기에 상당히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더 듣고 싶어 했고, 다음 안식일에 회당에서 다시 전해달라고 요청한 것이고, 바울의 첫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에 이미 성령님의 감동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많은 말씀을 들어야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의 감동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한 번의 전도로도 복음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첫 설교에 감동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습니다. 43절을 보면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바울의 설교를 듣고 다음 안식일에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함과 동시에 예배가 끝난 다음에 많은 사람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는 사람에 대해서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유대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바울의 설교를 듣고 바울을 따랐으며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 즉 이방인이지만 유대인들의 신앙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되어서 회당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보다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더 많은 감동을 받았을 것이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따랐을 것입니다. 유대인 중에는 처음에는 호감을 가졌지만 나중에는 다른 유대인들 편에 가담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기뻐한 사람들은 찬송하고 믿었습니다. 48절을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 처음에는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바울을 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반대하는 편에 가담하게 되었고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 즉 이방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기뻐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이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인 것은 바울이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는 말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선민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아마도 회당에서 입교한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우월감을 드러내려고 했을 것이고 은근히 이방인들을 무시한다고 느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우리도 사랑하시고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은 다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영생을 주시기로 작성된 자란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성도로 예정하신 사람들이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예정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들이 다 믿었다는 것은 예정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인지 버림을 받을 것인지를 다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 받을 성도가 되는 것은 예정대로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선택할 자유를 주셨다고 봅니다.
2. 반대하는 사람들
주로 이방인으로 개종했던 경건한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인 반면 많은 유대인들은 바울을 반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을 반대하고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영적 배경에는 사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시기가 가득했습니다. 44-45절을 보면
13: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13: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두 번째 안식일에 회당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두 번째 설교가 있던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표현은 정말 모든 시민들이 거의 다 모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그 만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모였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면서 유대인들의 마음에 시기심이 가득했습니다. 바울의 설교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 일어남으로 인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반대하는 상황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에 시기하는 마음을 짚어 넣어 줍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보면서 마음으로 부러워하는 것을 넘어서 시기하는 마음이 강해지면 그것은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면 상대방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고 무조건 반대하게 됩니다.
바울의 첫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받았지만 시기심이 생기자 바울의 모든 것이 못마땅하고 무조건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하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을 당한 것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심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시기심이 들어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시기심이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인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축하해 주어야 합니다.
시기심이 가득하여 바울을 반박하고 비방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너희가 복음을 버렸다고 지적했습니다. 46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바울과 바나바는 우리가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너희 유대인들이 복음을 걷어차고 스스로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했다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너희에게 영생의 복음을 주셨지만 너희가 자유의지로 스스로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십니다. 누구에게나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의지로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면 영생의 길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복음을 마음으로 믿고 받아 드리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이 보혜사 되심을 믿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개인적으로 주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종종 가족을 강제로라도 믿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믿음은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들이고 개인적으로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구원과 영생의 복음을 스스로 거부한 것입니다.
바울은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다고 말했습니다. 47절을 보면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먼저 구원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하고 하셨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이방지역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 만을 위해서 복음을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길 원하셨고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방의 빛이란 삼으셨다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3. 두 반응에 대한 결과
복음을 기뻐한 사람들과 반대한 사람들의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두 선택에 대한 결과를 이야기 하면서 당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주님의 말씀이 두루 퍼졌습니다. 49절을 보면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여기서 ‘퍼지니라’ 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페레토’는 미완료 과거로 ‘계속 퍼지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이 점점 널리 퍼져가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누가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믿게 된 자들의 부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 부류에는 많은 이방인들이 주의 말씀을 믿게 되었고 그 중에는 상당수의 유대인들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두루 퍼지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성도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반대자들은 박해하고 쫓아냈습니다. 50-51절을 보면
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13: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뻐하고 복음이 두루 퍼지게 되자 시기심이 가득한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시내의 유력한 자들을 선동했습니다.
시기심이 가득한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 일행의 설교가 유대교 회당 중심의 공동체에 위협을 주고 있다고 판단하고 그들을 추방하기 위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귀부인들은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 여인들로서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내의 유력한 자들은 ‘경건한 귀부인들’ 의 남편일 수 있으며 아니면 단순히 그 성읍에서 지도적인 인물로서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인들과 친분이 있고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유대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반대하고 박해하고 그곳에서 쫓아내게 만들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나는 박해를 받고 쫓겨나서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나서 다음 선교지인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반대하는 자들은 선도하고 박해하고 쫓아냈지만 기뻐한 사람들 즉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52절을 보면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제자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 비시디아 안디옥의 거주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들에게 ‘기쁨과 성령이 충만’ 했다는 말로서 그 지역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과 동일한 성령을 받았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바울 선교팀이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비시디아 안디옥의 기독교 공동체가 부흥하고 있다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쫓겨 갔음에도 불구하고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는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더욱 성장하고 부흥하는 교회로 세워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므로 성령 충만하고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전도해서 부흥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복음을 기뻐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마음에 시기심이 들어오려고 할 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시기심을 물리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축복하는 마음 즉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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