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 북쪽이어서 '성북'이라는 이름이 붙은 서울 성북동의 산기슭 222의 1.
좁고 가파른 골목 사이로 올라가자 萬海 韓龍雲이 노년에 머물렀던 심우장이 나온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만해가 지은 이집은 특이하게 남향이 아니라 동북향이다.
그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햇볕이 덜 드는 북향터를 택했다고 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59m2(17.8평) 규모의 소박한 단층집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서재 앞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 불교 수행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는 깨달음의 과정을 의미한다.
마당 한쪽에는 만해가 심은 향나무 한 그루와 수령 90년이 넘는 소나무가 서 있다.
만해 시 '님의 침묵' 중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이라는 구절이 두 나무의 그림자에 겹치는듯 하다.
북향 언덕의 '소를 찾는집'
만해는 이 집에서 11년 살았다.
방 안에 그의 원고와 글씨 등이 보관돼 있다.
3.1운동으로 투옥됐을 때의 옥중공판기록도 눈에 띈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 말소를 주동한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도 그중 한 명이었다.
신문사를 그만 둔 이씨가 이곳 동장을 지내며 심우장을 자주 찾았다.
만해는 그와 늦게까지 예기하며 오래 교류했다.
1937년에는 순국한 독립운동가 김동삼의 유해를 모셔와 이곳에서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김동삼과 관련 한일화로는 '굴라재 活佛 사건'이 유명하다.
만해가 젊은 시절 만주 굴라재 고개에서 독립군 후보샹들에게 일본 정탐꾼으로 오인받아 총격을 당하기도 했다.
총알이 머리에 박힌 상황에서도 그는 쏜 사람을 욕하지 않고 마취없이 수술을 받았다.
이때 치료를 맡았던 김동삼이 '활불(살이있는 부처)'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만해가 심우장에서 심혈을 기울인 것은 독립정신과 민족의식 고취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1934년 첫 장편소설 '黑風'을 비롯해 '후회''박명' 등을 이곳에서 썼다.
수많은 논설과 수필, 번역문도 집필도 집필했다.
그는 필명으로 '牧夫''失牛'등을 썼다.
목부는 '소를 키운다'는 뜻이고, 실우는 '소를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이는 곧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 구도 과정과 맞닿아 있다.
독립운동 외 남긴 것도 조명을
이런 수행을 통해 그는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데 매진했다.
이를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붓는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님의 침묵' 서문에서는 '기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라며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이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그는 엄혹한 시대에 가장 부드러운 시어를 통해 삶의 근본을 탐색했다.
그의 공부는 '그칠줄 모르고 타는 가슴'에 돼 수많은 이의 밤을 밝히는 심지가 됐다.
그는 총상 후유증으로 머리를 흔드는 '체머리'를 앓으면서도 인문학적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단재 신채호 유고집 간행을 추진하던 중,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생을 마감했다.
올해 100주년을 맞아 심우장이 사적으로 지정되고 관련 행사가 많이 열린다.
이와 함께 그의 고도자적 삶을 재조명하는 학문적 접근도 더 할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심우장 벽에 걸린 만해 시 '심우장 1'의 뜻이 새삼 의미심장하다.
'잃은 소 없건만/
찾을 소 우습도다.
만일 잃을 시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소나./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고두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