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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에 대한 의혹과 정체 추가자료 | ||
이명박은 자신의 외혹과 정체성에 대해 해명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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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박사, j-m-y8282@hanmail.ne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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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는 이명박에 대한 의혹들이 몇 개 있다. 이를 정리해 보면 대략 이렇다. 의혹 있는 출생의 중요성 첫째, 출생에 관한 의혹이다. 김대중의 출생비밀은 아버지가 제갈씨냐, 윤씨냐에 대한 것이다. 1980.5.18일자 경향신문에 나타난 김대중의 출생비밀은 아래와 같다. “김대중의 생모는 장오도 여인(71년5월9일 사망), 1911년 제갈성조와 결혼했다가 사별했고, 1920년에 윤창언의 셋째 첩으로 입적했으나 역시 사별했다. 그 후 본 남편 제갈성조의 친형인 시숙 제갈성복의 도움으로 주점을 경영하다가 김대중을 임신한 상태에서,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 사는 김운식의 첩으로 들어가 1924년 11월 16일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김대중을 낳았다.” 한마디로 김대중은 근본 없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이 나라를 패망의 길로 안내한 반역이 되었다. 노무현 역시 근본이 없다. 조부는 일제 앞잡이, 아버지와 장인은 모두 빨치산이었으며 동네로부터 멸시를 받으면서 한국사회를 증오해온 사람이다. 이 사람 때문에 지금 국가는 패망 직전으로 달리고 있다. 근본 없는 이 두 사람 때문에 지금 국가는 비틀거리고 있어 또 다른 ‘근본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단 한방의 펀치로 국가운명을 마감시킬 수 있다. 그만큼 당했으면 ‘근본 없는 출생’들에 대한 노이로제가 있을 법 하지만 한국사회는 두뇌 없이 굴러가는 덩어리와 같다. 독서가 없고, 분석이 없고, 제 몸만 중하지 사회는 중하지 않은 사람들로 뭉쳐진 사회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뜬 이명박의 출생 의혹 인터넷에 제기된 이명박에 관한 출생의혹은 이렇다. 한나라당 국회의원 이상득과 이명박은 배다른 형제이고, 두 사람 다 일본에서 출생했다. 이상득은 1935년생이고, 이명박은 1941년생이며,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했다. 두 형제에는 6년의 연령차가 있다. 이상득은 한국식 이름이고, 이명박은 한국에는 거의 없는 일본식 이름이다. 이명박의 ‘박’자는 이등박문의 ‘박’자와 같고, 이 ‘박’자 이름은 한국의 영이, 철수 등과 같이 일본에서는 당시 아주 흔한 이름이라 한다. 배다른 형인 이상득의 이름이 한국식 이름이고, 이명박의 이름이 일본식 이름인데 대해 인터넷 의혹은 이렇게 제기되고 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무엇을 했는가? 일본에서 여인을 바꾸었거나, 두 여인을 동시에 두고 살았다면 아주 미천한 처지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아버지에 대해 소개 좀 해 달라는 것이다. 이명박을 낳은 어머니가 한국 여성이었다면 10중 8,9 한국식 이름을 지었을텐데 일본식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아 이명박을 낳은 여인은 일본 여성이 아닌가, 이에 대해 설명 좀 해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혹이 인터넷에 퍼지자 또 다른 정보가 인터넷에 떴다. 이명박은 1941년 12월 19일 경주 이씨 이충우 씨와 채태원 여인 사이에서 5째 아들로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이명박이 일본에서 태어나게 된 것은 그의 부친이 식민지 시절에 일본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이다. 이명박의 부친 이충우씨는 젊을 때부터 타향을 전전하였다. 그러다 그는 소 사육 목장에서 목축기술을 익혔고 이것을 계기로 1935년 고향 친구 몇 사람과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는 오사카 근교 목장의 목부로서 일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에 고향에 잠깐 돌아왔던 그의 부친은 반야월 채씨 집안의 딸과 결혼을 하고 결혼식을 한 지 며칠 만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때문에 이명박은 일본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그와 그의 가족들은 귀국 채비를 하고 1945년 11월 오사카에서 귀국길에 올랐다. 이 때 오사카를 출발한 가족은 8명이었다. 이귀선, 이상은, 이상득, 이귀애, 이명박, 이귀분 그리고 부모였다. 이름을 보면 3남3녀의 가정이었다. 이상이 인터넷에 뜬 자료다. 이 자료를 본다면 그의 부친 이충우씨는 1935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40년 정도에 한국으로 나와 채씨와 결혼하였고, 결혼한 지 며칠 만에 채씨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 이명박을 낳았다는 것이 된다. 이충우씨의 첫 부인은 4남매를 낳았고, 두 번째 부인인 채씨는 2남매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이상득의 생년월일은 1935.11.29일, 1935년에 이충우씨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면 전처와 3남매를 데리고 일본에 가서 이상득과 이귀애를 일본에서 낳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충우씨가 한국에 돌아와 채씨와 결혼을 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1940년은 이상득이 6살 나던 해다. 이상득이 오사카에서 6살이 됐을 때, 이충우씨가 새로운 여인 채씨와 결혼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충우씨는 일본에서 첫 부인과 혜어졌거나 아니면 사별했다는 말이 된다. 비록 인터넷에 뜬 자료이지만 6남매의 이름이 적혀 있고, 아버지인 이충우씨와 어머니인 채태원의 이름과 연도 그리고 오사카라는 지명이 두 개의 자료 사이에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전혀 근거 없이 가공해낸 말은 아닌 것 같다. 이상의 구체적인 인터넷 자료에 비하면 이명박 자서전에 기록된 내용은 사뭇 다르고 엉성하다. 이명박의 출생 역시 김대중의 출생만큼이나 복잡하다. 과연 그의 부친 이충우씨가 목장일을 하는 목부 였을까에 대해서도 의심이 간다. 그리고 상자 돌림에서 왜 유독 이명박씨만 일본식 이름으로 지었을까에 대해서도 항간에 말들이 있다. 인터넷에 뜬 이명박 자서전 내용 이명박은 1941. 12. 19. 경북 영일군(현 포항시)의 한 시골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6 25때 누나와 막내 동생을 눈앞에서 잃는 아픔을 겪었고, 초등학생 때부터 김밥을 팔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낮에는 풀빵을 구워 팔아가며, 고학으로 동지상업고등학교 야간부를 졸업하였다. 병역에 대한 인터넷 의혹 이명박씨가 현대에 입사한 것은 1965년 7.1일이라 한다. 인터넷이 제기한 의혹에 의하면 이명박씨는 폐결핵 기관지 확장으로 병역을 면제받고 불과 몇 개월 만에 현대에 입사하여 술도 많이 마시고 일도 열심히 했다고 한다. 당시 폐결핵은 중환자인데 그런 몸으로 어떻게 현대건설 강릉 경포대 신입사원 수련회에서 있었던 술대작 현장에서 정주영과 모든 사원들이 다 취해서 쓰러졌는데 이명박 혼자 남았는가. 중환자가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해도 그 자체로 이해가 되지 않는데 이런 폭음 대회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대략 이정도의 의혹이다. 몸이 이정도로 튼튼하다면 이병박씨는 병역을 면제받기 위해 회 가루를 마셔 폐결핵으로 판정받은 게 아닌가. 이런 의혹도 제기돼 있다. 병역에 대한 이명박의 자서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왔다.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 거의 공짜로 준 책을 얻어 공부하여 1961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 2학년(1962) 1학기를 마치고 자원입대 하였으나, "쯧, 너 임마, 이런 몸은 군대에서도 안 받아 줘"라는 말과 함께 기관지 확장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논산 훈련소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아 쫓겨 나왔다. 1964년 굴욕적인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6.3 시위를 주도하여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아, 반년간 복역하고 풀려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작은 규모의 중소기업이었던 현대건설에 공채로 입사하였다. 40°C 를 넘나드는 태국의 밀림을 헤치고, 실눈조차 뜰 수 없는 중동의 뜨거운 모래바람을 온 몸으로 맞서며 전세계 해외건설 현장에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며, 1인당 국민소득 80달러에서 8,000달러가 될 때까지 나라경제를 키우는 데 큰 일익을 담당하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해외와 국내의 현장에서 일한 그는 입사 5년 만에 이사직에 오르고, 12년 만인 서른 다섯 나이에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현대건설의 최고 경영자(CEO)로 취임, 세상은 그를 '샐러리맨의 신화'라 불렀다. 네티즌들이 위와 같은 의혹을 제기한 것에 대해 이명박은 지난 6월에 4명을 형사고발한 모양이다. 이명박 자신이 해명해야 할 것들 공인의 행적과 공인의 과대포장은 공론의 장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가 오사카에서 태어났든, 포항 근교에서 태어났던 그건 문제가 아니다. 단지 이명박씨가 속였느냐, 아니냐가 문제인 것이다. 인터넷에 뜬 자료와 그의 자서전과는 너무나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정치인들에 늘 속아온 우리로서는 이명박의 자서전을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터넷 자료를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다. 그의 병역문제와 아들의 병역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구구한 이야기들이 떠돈다. 인터넷이 이런 일로 시끄러운 것을 보면 아직도 의혹들이 깨끗하게 해명돼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명박은 대학교 2학년 때인 1962년에 자진 입대했는가, 아니면 1965년 졸업 후에 징집이 됐는가? 대학교 2학년 때 폐결핵을 앓은 학생이 3학년 때 고대학생회장이 됐고, 4학년 때 간첩이 배후 조종한 6.3사태에 주역이 되었다면 이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다. 건강상으로 믿어지지 않고, 정부를 증오하던 학생이 자진 군대에 입대했었다는 것도 이해가지 않는다. 당시 폐결핵은 지금의 암 정도로 여겨졌던 난치병이었다. 필자의 집안에도 폐결핵으로 앓아 사망한 사람이 있어서 이건 잘 안다. 이명박의 자서전을 보면 이명박은 구름 위의 거룩한 인물이다. 하지만 공식석상에 아들이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나왔고, 그런 아들을 히딩크와 함께 사진을 찍게 해준 자세는 그리 거룩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김구의 각색된 자서전을 보고 김구의 환상에 빠지듯이 이명박의 자서전에 빠진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이런 거품 때문에 대한민국이 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에 대한 확인된 자료 이명박의 고향은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덕성2동 옛날 이름 덕실이고, 한나라당 이상득 의원과는 어머니가 다른 형제라는 첩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필자가 확인할 수 없는 것이기에 확실한 정보는 아닙니다. 미확인된 첩보인 만큼 앞으로 여러 사람들에 의해 확인돼야 할 사항입니다. 그 지역 사람들의 말로는 덕실 역시 청송, 거창 … 등등의 지역과 함께 빨치산들이 많이 활동했던 지역이라 합니다. 1941년생인 이명박은 운동권이었습니다. 고대 총학생회장을 하면서 한 때 박대통령을 괴롭힌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명박ᐨ이재오ᐨ손학규는 현재 6.3동지회 3인방이며, 6.3사건은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를 만들어 박정희 정권을 전복하고, 남침을 유도하려던 사건이었습니다. 이명박은 4학년 때 6.3사태를 주도했습니다. 2005년 5~6월은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려고 엄청난 군사력을 한반도에 배치했던 시기였습니다. 우리 국민의 함성에서는 방독면을 사고, 제독약품을 준비하고 있었던 긴장의 계절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이명박은 8~9월에 평양에 가서 ‘낡은 평양시내 건물들을 리모델링’해 주는 대가로, 김정일을 만나게 해 달라고 뜻을 전달했습니다. 평양에 선물을 주기 위해 벌써 200억원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다음은 이에 대한 기사입니다. “서울시 고위관계자는 27일 ‘시청 실무팀이 평양 시내 리모델링과 경평축구대회 부활 등에 대한 협정을 맺기 위해 금강산과 평양을 2차례 방문해 협상을 벌였다’면서 ‘북한 측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고 밝혔다. 북한측은 서울시가 낡은 평양시내 건물들을 리모델링해 줄 것을 요구했으며, 서울시는 이시장이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들어갈 것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 보장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는 이미 경평축구대회 부활과 관련해 2004년 5월 서울시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조례안을 제정했으며 200억원의 기금을 조성했다.”(노컷뉴스, 2005.5.27) 청계천을 좌익의 로고 전태일에 바쳐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청계천을 과대 포장하여 이명박의 경영능력을 띄워 올렸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 캠페인을 조선ᐨ동아가 벌인 것입니다. 그런데 5.8㎞ 청계천의 하이라이트는 ‘전태일 거리’입니다. 알맹이에 해당하는 평화시장 요부에 전태일 동상이 서고, ‘전태일 브리지’도 조형돼 있습니다. 동판으로 만든 블럭이 깔린다는 700m의 거리가 바로 ‘전태일 거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전태일은 민노총이 만들어 낸 ‘가공된 영웅’이요 공산주의 상징입니다. 청계천을 공산주의의 상징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모르고 청계천을 걷는 시민들은 김대중과 황석영 등 공산주의자들이 바친 전태일 헌시를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공산주의 쪽으로 경도돼 갑니다. 사람들은 도심에 물길이 생겼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 좋다고 말들 하지만 청개천을 만들기 위해 희생된 가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에게는 그 희생이 보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눈에는 눈앞에 보이는 것만 봅니다. 손톱의 가시만 볼 줄 알지 내장 썩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태일은 누구인가? 한국 노동운동은 목사집단인 ‘한국도시산업선교연합회’(강원용 목사 계통)로부터 출발했습니다. 1964년 3월, 혁신계 교회 목사 300명이 ‘한국도시산업선교연합회’, 약칭 ‘도산’을 구성하여 도시산업 근로자에 대한 선교를 한다는 구실로 성경 교리를 소위 ‘해방신학’, ‘민중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근로자들을 의식화시키고 선동하여 노사분규를 연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위의 도시산업선교 사업이 탄압을 받게 되자 1976년 11월에 영등포에서 결성된 ‘사회선교협의회’가 중심이 되어 제조업체들에 은밀한 방법으로 지하조직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1981년 말, 경기지역에 비밀 지하교육기관인 ‘다락원’을 설치하여 4개월 코스로 합숙훈련을 시키면서 소위 ‘도산이론’을 무장시켜 주었습니다. 1개 기에 30~40명, 1982년 말까지 1년간 배출된 200여명의 전문세포들은 구로, 인천, 부천, 성남 지역의 문제가 많은 기업체로 ‘위장취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1980년대 후반을 민주화가 꽃피는 시대, ‘혁명’을 실천할 결정적인 시기라고 판단하여 노동자들을 혁명의 주력군으로 전력화하였습니다. 근로조건 향상, 인금인상 등을 목적으로 하는 기존의 노조를 어용노조로 매도하면서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용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사장실 점거ᐨ협박ᐨ린치ᐨ파괴ᐨ방화ᐨ분신 등 온갖 불법투쟁을 연출해 냈습니다. 이런 위장취업자 제1기생이 바로 손학규인 것입니다. 학생을 선봉대로 노동자 및 농민을 주력군으로 하는 연대투쟁을 통해 수많은 기업을 무너뜨렸지만, 당시 국민들은 이를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습니다. ‘민주노조’의 목표는 임금인상이나 근로조건 개선 같은 것이 아니라 자본가를 몰아내고 노동자에 의한 기업지배를 목표로 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이들은 ‘통일노동’을 내세워 반미ᐨ친북 노선을 선포하면서 전교조, 전공노, 386 정치세력과 연대하여 기업전복ᐨ대한민국 전복을 기도해 왔습니다. ‘민주화’의 부대마크를 단 ‘386세포’들의 투쟁목표는 대한민국 전복입니다. 이것이 현 민주노총의 정체요 노선인 것입니다. 구호들의 일부를 정리해 봅니다. “노동자와 사용자는 공존관계가 아니라 적대관계다.” “사용자를 폭력으로 타도하고, 계급해방(노동해방)을 이룩하자.” “사용자는 쓸어버려야 할 한줌의 적이다.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자.” “구걸하여 얻느니 싸워서 빼앗자.” 처음부터 자본론, 계급투쟁론, 민중운동사 같이 어려운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감상적이고 정열적인 20대의 노동자이면 누구든지 공감하는 쉬운 내용을 가지고 입맛을 들이게 했습니다. 현장 근로자들의 불평과 불만을 수집ᐨ정리하고 기업주와 기존의 순수한 노조집행부의 약점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공분을 갖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1970년 11월 13일, 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한 가난한 노동자 전태일을 희생양으로 삼아 분신케 한 후, 그의 죽음을 극도로 활용했습니다. ‘전태일 수기’를 제작하여 전태일을 노동계의 영웅으로 미화시킨 후, 이를 교육자료로 활용함과 동시에 일반 국민에게는 군부독재에 대한 비인간성을 부각시키는 데 활용했습니다. 그 외에도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노동의 새벽',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빼앗긴 일터' 등 노동자의 삶을 비참하고 절망적인 내용으로 노래한 소설, 수기, 시 등을 읽게 하여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고 투쟁의 눈을 뜨게 한 다음, 서서히 근로기준법, 노동조합관계법 등 실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해주었습니다. 어제까지도 “열심히 일하고 알뜰히 생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순진한 근로자들도 ‘1,000만 노동 형제의 해방을 위해 이 한몸 바치는 노동전사’로 둔갑합니다. 현 사회를 문제투성이로 보고, 정부를 타도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야 하는 영웅이라도 되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순진하고 못 배운 젊은 근로자들에게는 소영웅심을 불러일으키고, 일반 대중에게는 자본가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투쟁의 정당성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저들은 순진무구한 근로자를 골라 ‘불화살투사’로 만들었습니다. 풍물패를 동원하거나 중요한 소식이 있다는 등의 기회를 만들어 사람들을 불러모아 몇 명의 몸에 신나나 휘발유를 뿌리고 칼을 높이 들게 하여 비장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 후, “개, 돼지로 사느니 차라리 죽자.” “내 한몸 불살라 천만 노동형제를 해방시키자.” 등 끔찍한 구호를 외치게 합니다. 그리고 쓰리꾼들이 하듯이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게 한 후 누군가가 성냥불을 그어 던집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 불화살인 것입니다. 1970ᐨ80년대에 발생한 인간 불화살이 된 노동자는 17명, 그 중 전태일이 제1호입니다. 이 17명의 불화살 중에는 위장취업한 대학생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모두가 위장취업한 대학생들이 점찍은 가난하고 순진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결국 분신한 노동자들은 꼬임에 빠진 희생양들이라 할 수 있으며, 전태일이 그 첫 케이스였던 것입니다. 좌익의 국가전복 행위 가려주는 이명박의 발언들 2005년 12월 20일, 이명박 시장은 오전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의 모임인 새정치수요모임이 청년층과의 교류 확대를 위해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마련한 ‘대학생아카데미’ 행사에 첫 번째 강연자로 초청됐습니다. 사립학교법과 관련하여 정치권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념 논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정치권에서 국가정체성이 어떻다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정체성 논란을 이해할 수 없다.” “21세기에 누가 국가정체성을 가지고 그러느냐.” “국가정체성에 대한 승부는 이미 갈렸다. 그 승부가 끝났는데도 대한민국은 그 문제를 가지고 지금도 왈가왈부한다.” “우리 자식들을 전교조에 맡길 수 없다”는 한나라당의 사학법 투쟁을 비난하는 말이었습니다. 국보법 폐지 등 4대 입법과 관련하여 그는 “되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국민의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선ᐨ동아를 포함한 애국자들은 4대법안을 4대악법이라 불렀지만, 이명박은 열우당 편에 서서 가결되면 기분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민생에만 관심이 있고, 이념문제는 관심이 없다는 식으로 이념논쟁을 폄하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많은 재산을 사회에 헌납할 생각은 없느냐”는 한 대학생의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20년간 CEO를 하며 재산을 모았지만 현재 대기업 CEO의 1년치 연봉보다 적다. 내가 일궈낸 재산에 대해 나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는 거짓말입니다. 김대중이 “무재산 가족이 되겠다”는 거짓말과 유사합니다. 그가 앞으로 무슨 거짓말을 얼마나 하는지 우리는 지켜봐야 합니다. 2006년 7월 5일, 당대표 경선 때, 이규택 후보는 이재오 후보에 대한 사상검증 주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명박 전 시장이 골수보수로 가자는 것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참으로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명박은 사상검증을 꼴보수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사상검증을 방해한 것입니다. 2006년 6월 30일, 이명박은 또 “한나라당이 골수보수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개혁이 되지 않아 골수보수가 아닌 개혁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우당의 개혁은 옳은 것이고, 한나라당의 보수노선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2005년 10월 24일(내일신문), 박근혜는 “강정구 교수에 대한 불구속 수사지휘는 현 정권이 국가정체성을 뒤흔든 것이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구국운동도 불사하겠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손학규는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도 문제지만 강정구 교수 발언을 이념논쟁으로 끌고 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발언했고, 이명박은 아예 강정구 교수 사건에 대해 한마디 언급조차 없습니다. 작통권 문제에 대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기자가 묻는 말에 수동적으로 “작통권 문제는 차기 정부에서 다뤄야 한다”는 견해만 피력했습니다. 한국 기업에서 고속승진한 자는 눈치와 편법에 강한 사람 그가 현대그룹에서 CEO 경험을 가졌다고 하지만 한국 대기업들의 CEO는 대부분 단기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하 편법에 능한 사람들이지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마음을 움직이는 리더십을 배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국에서의 CEO는 미국이나 일본 기업에서 보는 그런 경영자들이 아닙니다. 더구나 옛날 건설업의 경우에는 “부장도 노가다, 사장도 노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명박이 잘 하는 것은 편법이었으리라고 봅니다. 그는 서울시장을 할 때 청계천 밖에 몰랐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더 큰 청계천, 즉 경부운하를 건설하겠다 합니다. 경영에 대한 소프트웨어, 즉 경영지식과 국가비전을 창출할 능력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명박에 대해서는 7가지 의혹이 있다 합니다. 이에 대해 지난 8월 14일 조선일보 등에는 이런 요지의 기사가 났습니다.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권 주자 가운데 한 명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측근인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이 이 전 시장과 관련된 각종 의혹을 적극 해명하고 나섰다. 정 의원은 13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이명박에 관한 7가지 거짓말」이라는 글을 올리고 이 전 시장 아들의 병역 문제, 재산 형성 과정 등과 관련된 의혹을 반박했다. “ ‘이 전 시장의 두 아들이 모두 군대에 안 갔다’는 의혹에 대해 “이 전 시장은 아들이 한 명이고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다.” 대꾸를 않다 보니 사실인 것처럼 굳어져 버렸다. 숨겨 놓은 자식이 있다는 의혹에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했다. 재산 형성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에 대해서도 “현대에 근무할 때 외국 손님 접대용으로 회사에서 지어 준 서울 강남구 논현동 집과 중동 대형 프로젝트를 따낸 공로로 받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 부동산 등은 모두 1970년대에 마련한 것이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사고판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이 전 시장이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결국 떨어져 탈당할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서는 “이 전 시장을 두려워하는 세력들이 퍼뜨리는 흑색선전”이라고 주장했다.” |
첫댓글 화랑사랑님.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좋은글 감사합니다.자주 연락 합시다.마음은 하나입니다.......
화랑사랑님 좋은 글이네요 ~~~자주좀 글을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래야 탄력 받아서 더욱 열심히 할수있지 않을 까요? 반갑습니다
몰랐던 부분을 알수있게 하신 화랑사랑님께 감사합니다 담에도 꼐속 부탁할께요.
화랑사랑님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경북님들 많이 홍보해주세요
정말 이나라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그 진실을 통해 대한민국을 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근혜님뿐이라는것을 확실하게 심어 줘야합니다. 그것은 우리 대한민국 박사모의 역할 인 것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앞으로 많은 활동 부탁 드립니다~~
화랑 사단님 좋은정보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