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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 23,1-6
1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주님의 말씀이다.
2 ─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3 그런 다음 나는 내가 그들을 쫓아 보냈던 모든 나라에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은 출산을 많이 하여 번성할 것이다.
4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5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6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 2,13-18
형제 여러분,
13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코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예수님, 그분은 누구신가?'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전례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곧 예수님은 양떼를 돌보는 '진정한 목자'임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이 '참된 목자'의 상이 곧 메시아의 표상임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당시의 제도권 지도자들(왕들, 사제들)이 하느님의 양떼인 백성들을 보살피지 않고 오히려 죽이고 흩어버리고 헤매게 하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양떼들을 보살필 ‘진정한 목자’를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목자가 다윗의 후손에서 날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분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실 '우리의 정의'(예레 23,6)이신 주님으로 '참된 목자'인 ‘메시아’로 예고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참된 목자'”는 단지 양떼를 흩어지지 않게 하고 헤매지 않게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흩어진 양떼를 인도하고, 헤매는 양떼를 보호하는 분, 양떼를 하나 되게 하고, 평화를 주시는 분'으로, 곧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로 제시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에페 2,14-15)
이토록 예수님께서 우리 사이의 갈라진 장벽을 허물고, 우리를 새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에페 2,14-16)시키시고 평화를 이루신 '착한 목자'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일이 오늘 우리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할 일입니다.
서로를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는 일’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배려하는 모습'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측은히 여기는 모습'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파견 받은 사도들이 돌아와 보고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지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시편 작가가 들려주는 진동을 듣습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
(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 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호세아서>에서 울려오는 진동을 듣습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호세 2,16-22 참조)
그렇습니다.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외딴 곳까지 먼저 달려온 군중을 보시고(마르 6,32 참조)는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마르 6,34)
그래서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길 잃은 양들을 먼저 돌보는 '목자'로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애틋한 사랑의 발로로 타인의 상황에 마음 아파함이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를 그냥 둘 수 없는, 차마 못 견디는 마음입니다.
사랑 때문에 안달이 나고 몸살이 나서 사랑을 건네주지 않고는 차마 못 베기는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안달이 난 바로 그분’을 만납니다.
그토록 '가엾은 마음이 드신' 그분께서는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마르 6,3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것이 진리임을 아셨습니다.
그들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 외엔 결코 그 어떤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분이 바로 '참된 목자'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목자가 되려면 먼저 ‘진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우리는 진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은 양들을 측은히 여기는 애틋한 마음이요, 참된 진리를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참된 진리가 되여야 할 일입니다.
그리기에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양식을 얻는 양이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그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오, 주님!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부화뇌동은 No! 화이부동은 Yes!>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마르 6,34ㄱㄴ)
오늘 연중 제16주일은 진정한 양과 목자의 관계를 얘기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목자는 ‘우리의 정의’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둘째 독서에서 목자는 ‘우리의 평화’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종합하면 주님은 ‘우리의 정의와 평화’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정의正義이고 평화平和인지 성찰省察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성찰은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反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니, 나는 주님을 나의 정의와 평화의 목자로 모시는 착한 양인가?
세상의 정의 평화 투사를 나의 정의와 평화의 목자로 생각지는 않는가?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쫓지 않고 나의 정의와 평화를 주장하지는 않는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착한 양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길잃은 양들입니다.
사실 양들의 인도자들이어야 할 수도자 성직자들이라고 하는 저희가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지 않고 정치가들을 열렬히 추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길잃은 양들인 경우가 많아 참 안타깝습니다.
옛날 ‘어머니 부대’라는 극성 여성들이 있었고, 요즘은 ‘개 딸’이라는 극성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인 둘의 공통점은 복음이나 보편성 같은 것을 따르지 않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정치가를 무조건적으로 따른다는 것인데, 어떤 때 저희 일부 수도자들과 일부 신자들이 이러합니다.
주님의 정의를 가지고 여도 야도 모두 비판하고 예언해야 하는데, 비판과 예언은커녕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의가 주님의 정의를 따르는지 잘 식별해야 하는데,
우리가 주님 정의를 따르는지 세상 정의를 따르는지 어떻게 알 수 있냐 하면,
우리의 정의가 주님의 평화를 이룩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의는 물론 불의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며칠 전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불의와는 갈라서야 하지만 화이부동(和而不同)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부화뇌동은 말고 화이부동은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인데,
우리는 종종 부화뇌동하거나 독불장군처럼 자기 정의만 주장하여 화이부동할 줄 모르고 주님처럼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참 목자이신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는 양들인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러니까 성직자는 성직자의 자리에서, 가정의 부모나 단체의 장들은 가정과 각 단체에서 이제 주님을 대신하여 양들을 주님의 정의와 평화로 인도하는 목자가 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목자 의식입니다.
나도 목자라는 의식 말입니다.
나는 주님의 양이기도 하지만 양들의 목자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양들에 대한 연민의 사랑입니다.
주님처럼 목자가 없는 양들에 대한 연민이 필요합니다.
양들을 그저 잡아먹고 팔아먹고 부려 먹으려고만 들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그들이 내 맘에 들기를 바라기보다 그들의 고통이 내 눈에 먼저 들어와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출 소녀가 있습니다.
나쁜 놈들은 그들을 꾀어 성 노리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래서 어떻게든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그럴 수 없는 집안 사정이라면 그들을 내 집이나 다른 쉼터로 인도하겠지요.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는 착한 양들입니까?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대신 실현하는 선한 목자들입니까?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가엾은 마음으로 챙기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많은 분이 휴가를 즐깁니다.
휴가를 통해 쉬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쉬는 방법과 우리의 쉬는 스타일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지만, 우리는 사람도 많고 시끄러운 곳으로 휴가를 떠납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으로 갑니다. 길도 막히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휴가를 다녀와서는 더 피곤해 합니다.
그렇다면 그 휴식은 바람직한 쉼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쁘고 건강한 휴식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지니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사람들을 만나고 마귀를 쫓아내며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 앞에 모여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자랑삼아 보고하였습니다.
자기가 아침에 계획한 것을 열심히 살고 저녁에 삶을 되돌아보며 하루의 시간을 예수님께 보고하는 것은 저녁기도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고 하셨습니다.
왜 외딴곳을 선택하셨을까요?
동안에 열심히 할 일을 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주님의 일이었는지 내 일이었는지를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혹 하느님의 일은 접어두고 인간적인 일에 매달린 것은 아닌지 내적으로 반성하고 채울 시간을 가져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일에 치이면 마지못해 억지로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일은 신성한 노동이 아니라 부역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휴식을 잘해야 합니다.
어느 수도원의 두 수사가 원장으로부터 들에 나가 밀을 거두어들이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두 수사는 낫으로 밀을 베어 단으로 묶어나갔습니다.
한 수사는 시간마다 쉬곤 하는 데 반해 한 수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었을 때 보니 쉬면서 일한 수사가 쉬지 않고 일한 수사보다 훨씬 더 많은 밀을 베어 놓았습니다.
열심히 일한 수사는 어떻게 그런 결과를 가져왔을까 궁금해했는데 쉬면서 일을 한 수사가 말했습니다.
“저는 틈틈이 쉴 때마다 제 낫을 갈았습니다.”
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일에 파묻혀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불분명할 때, 가족과 잘 지내고 있는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잘 모시고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회복하는 시간이 휴식입니다.
쉼을 잘못하면 안 쉰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식을 잡수실 겨를조차 없이 바쁘시더라도 한적한 곳을 찾으셨고 이른 아침에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때때로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성체조배는 바로 훌륭한 휴식입니다.
자주 성체 앞으로 오십시오. 피정이나 성지순례도 꼭 필요한 휴식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연 피정, 월 피정을 해야 합니다.
피정이란 말 그대로 시끄러운 곳을 피해 고요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교회법으로, 수도회 규칙으로, 정해놓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깊은 만남을 통해 자기 소명 의식을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대개는 침묵 피정을 합니다.
동안에 말을 많이 하고 살았으니까 침묵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내적 성장의 토대를 다지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 청주교구 신부 수가 200명입니다.
신부 전체가 모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 피정을 할 때는 특별히 주교님의 허락을 받은 분 외에는 모두 참석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부님이 건의했습니다.
침묵을 해제해 달라!
일 년에 한 번 전체가 모이는데 동안의 삶을 서로 나누며 선후배 간의 끈끈한 정도 쌓고 친교의 장을 만드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느냐?
그래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침묵이냐? 해제냐?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절대다수의 신부님께서 침묵을 선택하셨습니다.
한번은 부산교구 정명조 주교님께서 피정 지도를 하셨는데 첫 시간에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피정은 절대 침묵 피정입니다."
절대 침묵이란, 내가 침묵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문 여닫는 소리, 발걸음 소리까지도…
왜 그렇게 침묵을 강조하셨겠습니까?
세상이 시끄러우면 시끄러울수록 그만큼 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주님의 뜻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란하고 들뜬 마음으로는 결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고요함 속에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거울에 비추어진 내 속을 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이 며칠간 시간을 내서 피정하기란 힘듭니다.
그러나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 말씀은 좋은 휴양지에 가서 먹고 마시고 즐기라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휴가를 내서 성지순례를 하시는 분이 계시고, 어떤 분들은 가족과 더불어 요양원이나 복지시설에 가 봉사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들은 중환자실에서 똥, 오줌을 받아내고 식사 수발도 하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배우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일깨웁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들의 휴가는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의 휴식입니다.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휴가를 내서 성경 연수에 참석하시는 분도 있고, 피정하며 주님 안에서 쉬기도 합니다.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어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정에서 실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른 아침, 일상을 시작하기 전 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 시간, 침묵의 시간을 꼭 챙겨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예수 성심 상이나 성모님 상 앞에서 하루를 살피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도록 자기를 봉헌하면서 주님과 더불어 시작하고 주님과 함께 마치면 얼만 좋겠습니까?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쉼이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쉰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높은 곳에, 귀한 곳에, 천상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기도 하셨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분께 능력이 있고 힘이 있으며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휴식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보다 먼저 그 휴식 장소로 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파김치가 되어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데 군중에게 떠밀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충분히 짜증이 날 만한데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 같아 오히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과 자비심으로 가득 차, 귀찮고 짜증이 날 법한 상황에서도 꾸준한 사랑의 길을 가십니다.
과연 우리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있는가?
사람들이 나를 피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미리 가서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처럼 주님의 뜻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를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세상 것엔 바쁘고, 주님 것엔 관심이 없으면서도 주님의 복을 청하는 모습이라면 부끄럽습니다.
오늘만큼은 외딴곳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꼭 챙기시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왜 쉬어도 피곤할까?>
오늘 복음은 참다운 ‘쉼’이 무얼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온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찾는 수많은 군중이 몰려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쉬게 내버려 두고 당신이 직접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들의 쉼을 존중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아서 만성 피로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삶의 에너지를 얻는 참다운 쉼은 무엇일까요?
오늘 제자들처럼 사명을 다 마치고 와서 그 파견한 분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도’와도 연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휴식은 현실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힘을 얻는 과정입니다.
현실의 모든 어려움은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일이 고되다고는 하지만, 일도 관계가 좋으면 견뎌낼 수 있습니다.
관계가 안 좋으면 아무리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더라도 그 자리가 지치고 고생스럽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관계를 위한 에너지를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쉬고 나서도 다시 사람들을 만날 힘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면 쉰 것이 아닙니다.
현실 도피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 도피와 쉼을 잘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현실 도피는 그것을 하고 나서 다시 일자리나 가정으로 돌아갈 힘이 생기지 않지만, 참다운 쉼은 다시 도전하고픈 용기가 생깁니다.
MBTI라는 성격유형 검사에서 ‘I’와 ‘E’의 차이점이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성격이 ‘E’로 외향적인 사람은 사람을 만날 때 힘을 얻고 반대로 ‘I’인 사람은 혼자 있을 때 힘을 회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격의 유형일 뿐 무엇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굳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회복해야 하고 사람을 만날 때 에너지를 빼앗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 에너지를 빼앗기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기도하실 때 에너지를 회복하셨습니다.
사람은 진정 혼자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내 자아로부터 괴롭힘을 당합니다.
잠을 자도 악몽을 꾸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이 자꾸 자신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고 일어나도 피곤합니다.
어차피 만나려면 나에게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존재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나를 이웃을 사랑하라고 파견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이때 기도가 진정으로 휴식이 됩니다.
EBS ‘선생님이 달라졌어요’ 제5화에서 보령의 한 초등학교 여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너무 벅찹니다.
아이들에게 고함만 지르게 되고 아이들은 선생님을 마녀나 마귀라고 부릅니다.
지친 선생님은 이제 학교를 그만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제작팀은 가르침은 먼저 관계라고 말해줍니다.
관계를 어떻게 잘 할 수 있는지 교육합니다.
가장 일찍 나와 아이들에게 하이 파이브를 하고 집에 돌아갈 때는 아이들을 일일이 안아줍니다.
친절하게 바뀐 선생님을 보며 아이들도 선생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학교 가는 게 즐겁습니다.
이제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한 준비가 됩니다.
이것이 참다운 쉼입니다.
쉼의 목적은 파견에 있습니다.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유방암이 온몸에 전이된 상태의 선생님에게 아이들이 노래를 불러줬고 차차 암세포가 사라져 완치되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 그러합니다.
암세포는 몸이 허물어진 상태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몸의 설계도와 같습니다.
그분과의 만남으로 우리 DNA가 회복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그러면 다시 아이들을 가르칠 힘과 용기가 생깁니다.
기도와 쉼은 아예 처음부터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봉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야 길을 잃지 않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도 나를 파견하는 말씀을 찾아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고 제자들과 사람들이 당신을 찾자 바로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라고 하셨습니다.
새벽이 아버지를 만나 힘을 얻고 다시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받으시는 일이 그분에게는 기도였고 휴식이었습니다.
기도가 휴식이 되면 뒤로 미룰 수 없습니다.
잠을 자고 식사를 하는 것처럼 먼저 이것을 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사랑하도록 파견받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이만이 온전히 파견하시는 분 안에서 쉴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위기는 기회입니다!>
이백명 삼백명은 아니지만, 육칠십명 아이들을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여름 신앙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젊은 형제들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프로그램 진행하랴, 물놀이 따라다니랴, 동선 체크하랴, 정신이 없습니다.
저는 주방 근무라 새벽 6시에 홀로 미사를 봉헌합니다.
특별한 체험입니다.
아무 탈 없이 신앙학교가 잘 진행되었으면 하는 지향으로 초스피드로, 그러나 정성껏 미사를 봉헌합니다.
미사 끝나자마자 주방으로 달려가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침 끝나면 점심 준비, 점심 끝나면 시장, 그리고 저녁...단 한 순간도 자리에 편히 앉아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강철 체력을 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요즘입니다.
정말이지 다들 몸은 피곤하지만 신명나는 하루하루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펼쳐나갔던 초기 교회 공동체의 모습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신명나게 전개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크게 매료시켰습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쉴 틈도 없었으며,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피로는 누적되었고, 수면부족으로 인해 건강까지 염려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걱정되었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 31)
밀물처럼 밀려드는 고객들, 양떼들로 인해 힘겨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기중천, 의기양양했던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모습, 그런 모습과는 너무 비교되는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청소년과 청년들, 급격한 고령화 현상, 동력을 상실한 공동체의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하는 안타까움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초기 교회 공동체가 그토록 군중들을 매료시킨 비결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운영 노하우를 배워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우리 교회로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요즘 교회의 위기라고 합니다만, ‘위기는 기회’라는 말도 있습니다.
위기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다시 한번 일어서라고, 다시 한번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그래서 철저하게도 쇄신되고 거듭나라고 주신 은총의 기회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조금 더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이들, 교회로부터 매력과 흥미를 잃어버린 이들이 눈을 번쩍 뜨고 되돌아올 수 있도록, 더 많은 행복거리들 찾아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파에 시달려 지치고 힘겨워하는 양들에게 기쁨과 희망, 열정과 첫 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가 되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피정>
1)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야기를 보면, 활동을 마친 제자들이 ‘기뻐하며’ 돌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10,17), 열두 사도의 경우에도 그렇게 ‘기뻐하면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이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박해도 받았을 것이고, 여러 가지 고통도 겪었을 것이고...
그래서 정신적으로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겠지만, 육체적으로는 체력이 모두 소진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돌아와서 보니, 예수님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일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쁘게 일하시는 것을 보면서 사도들은 자기들만 쉴 수는 없었을 것이고, 쉬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도와드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쉬면서 힘을 재충전할 수 있도록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라고 지시하십니다.
예수님은 일만 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즉 신앙인들을 혹사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휴식이 필요할 때에는 쉬라고 명령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도 사도들과 함께 가셨기 때문에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는 “우리 함께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외딴곳’은 사람들이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사도들의 휴식을 위해서,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등의 ‘일’을 잠시 멈추셨습니다.
사람들을 ‘버리고’ 가신 것은 아닙니다.
2)
예수님께서 잠시 ‘일’을 멈추신 것에 대해서,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당신도 쉴 수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과 지금의 상황은모순되지 않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요한 5,16-18)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아버지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나도 쉴 수가 없다. 안식일이라고 해도...”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단 한 순간도 중단되지 않는다. 안식일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보살피고 보호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 그러니 나도 안식일을 ‘초월해서’ 일할 수밖에 없다.”
이 말씀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하시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지, “나는 휴식이 필요 없다.”가 아닙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는 휴식이 필요 없겠지만, 사람이신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잘 때가 되면 자야 하고, 먹을 때가 되면 먹어야 하고, 일하다가 지치면 쉬어야 하고...
3)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는 일”을 우리 교회는 ‘피정’이라고 부릅니다.
피정은 잠시 ‘일’을 멈추고 쉬는 ‘휴식 시간’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 기운을 얻는 ‘재충전 시간’입니다.
그 새 힘은 하던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력의 한계가 있고, 힘을 재충전하지 않으면 지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쉬지 않고 일하다가 너무 지쳐서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까지 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잘 달리는 자동차도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 들러서 기름을 넣어야 합니다.
잠시 주유소에 들르는 것은 달리는 것을 중단하는 일이 아니라, 더 잘 달리기 위해서 힘을 충전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전례나 기도에는 피정의 성격도 들어 있습니다.
좋은 예가 ‘주일미사’입니다.
한 주간 동안 인간 세상에서 힘들게 살다가 주일에 성당에서 미사참례를 하는 것은 일을 멈추고 피정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미사를 통해서 새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 힘은 다음 한 주간을 잘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살아갈 힘을 재충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일을 안 지키는 사람은 그 힘을 받지 못해서 점점 힘을 잃다가 결국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4)
예수님과 제자들이 ‘외딴곳’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제자들도 쉴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조금 관점을 바꿔서 그 상황을 바라보면, 몰려든 군중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참된 안식’을 얻으려고 예수님에게 온 사람들이고,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면서 ‘참된 안식’을 주실 때, 사도들도 그 가르침을 함께 들으면서 새 힘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 착한 목자 파스카 예수님 영성 살기 - “정의, 평화, 연민”>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시편 23,1)
오늘 7월21일 연중 제16주일 화답송 후렴 시편은 늘 들어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말마디를 바꾸어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어라.” 바꿔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자 빛이신 주님을, 희망이자 기쁨이신 주님을 잊어 뿌리없이 표류하는 삶이요 어둠 속에 방황하는 혼란한 삶입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착한 목자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런 착한목자 주님을 잊고 살기에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김수환 추기경의 묘비명이기도 합니다.
아주 예전 어느 분이 돌아간 아내의 묘비명을 청하기에 주저없이 이 시편 성구를 추천한 적도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시편 가사도 마음에 평화와 위안을 줍니다.
“파아란 풀밭에 이몸 뉘어주시고,
고이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시니,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
참 감사하게도 착한 목자 주님은 우리를 생명의 잔치, 이 거룩한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해 미사잔치 참석하고 있는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생명의 미사잔치를 선택한 여러분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연중 제16주일은 제29회 농민주일이기도 합니다.
한국천주교회는 1995년 추계정기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농민주일을 맞이할 때 마다 생각나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요한복음 15장 1절,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는 참 멋진 고백입니다.
어떤 직업보다도 농업에 종사하는 농부들은 하느님을 가장 닮은 분들임을 깨닫습니다.
농사의 80%는 하느님께 달렸다 고백하는 농부들을 보면 하느님을 닮은 수도승같다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오늘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인 박현동 아빠스의 담화문 내용 일부를 소개합니다.
“농민주일은 농민을 위한 날이자 농민들의 열정과 노력의 결과를 소비하는 도시 생활인을 위한 날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회복하고 생태적 회개의 삶을 살아가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갑시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마침 어제 수도원에 피정 온 청년들이 청했던 강의 제목입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삶을 위해 평생 노력해야 함을 참 많이 강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삶’은 바로 우리 삶을 평가하는 잣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삶의 영원한 모델이 바로 착한 목자 예수님이요, 오늘은 착한목자 영성에 대해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정의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은 정의로운 분입니다.
구약에서 특히 강조된 정의와 공정입니다.
시편이 노래하는 하느님은 공정과 정의의 주님입니다.
“주님께서는 정의를 실천하시고 억눌린 이들에게 공정을 베푸신다.”
(시편103,6)
“그분은 정의와 공정을 사랑하시는 분, 주님의 자애가 땅에 가득하다.”
(시편 33,5)
“빛처럼 정의를 떠오르게 하시며, 대낮처럼 공정을 밝히신다.”
(시편 37,6)
“그가 당신의 백성을 정의로,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통치하게 하소서.”
(시편 72,2)
“행복하여라. 공정을 지키는 이들,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
(시편 106,3)
끝없이 이어지는 강조되는 정의와 공정의 삶입니다.
정의와 공정, 오늘 우리 사회를 비춰주는 거울같은 말마디입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정의와 공정이 무너짐에서 시작됨을 봅니다.
힘없는 백성이 하느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지도자들에게 바라는바 정의와 공정이었고, 이는 만민이 지켜야 하는 도리요 실행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현자들은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잠언 21,3)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흘림이 웬말이고,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말이냐?”(이사 5.7) 탄식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서 역시 일치합니다.
미래의 임금 메시아를 통해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바로 오늘이 바로 그날이요 그분은 우리의 착한 목자 예수님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바로 주님의 우리의 정의라고 명명되는 분이 바로 착한 목자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이런 공정과 정의가 없는 사랑과 평화는 얼마나 공허하겠는지요!
애당초 불가능한 가짜 사랑, 가짜 평화입니다.
둘째, 평화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정의”에 이어 “주님은 우리의 평화”입니다.
정의와 평화는 한 세트입니다.
그래서 교구마다 ‘정의평화위원회’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분이 우리의 착한 목자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산상설교중 참행복에 관한 다음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랄 불릴 것이다.”
(마태 5,9)
전쟁과 평화입니다.
평화를 원하는데 역설적으로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영적전쟁을 수행하는 우리 믿는 이들, 특히 수도자들은 주님의 전사, 평화의 전사라 부릅니다.
후대 예수님의 제자들은 착한목자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의 참 평화이심을 깊이 깨달았고 우리는 바오로의 고백을 통해 배웁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셨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평화이신 주님은 우리 모두 착한 목자 주님을 닮은 평화와 화해, 일치의 새인간으로, 참으로 자유로운 새인간으로 창조하셨고,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새롭게 깨닫는 진리입니다.
셋째, 연민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계시되는 착한 목자 예수님은 연민의 사랑을 지니신 분입니다.
불교용어로 대자대비하신 착한목자 예수님입니다.
힘겹게 복음 선포 활동을 하다 돌아와 보고를 받은 주님은 지친 사도들에게 휴식을 명하십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외딴곳에서 가서 좀 쉬어라.”
참으로 착한 목자 주님의 배려하는 연민의 사랑이 빛납니다.
쉬지 못하는 활동 중독의 활동주의도 병입니다.
지친 심신의 힐링의 치유와 충전을 위해 때로 외딴곳의 쉼터에서 휴식은 필수요, 외딴곳에서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 보다 더 좋은 힐링은 없습니다.
영육의 휴식의 쉼터가 되고, 주님의 생명수로 갈증을 해소하는 샘터가 되며, 주님의 진리 말씀을 배우는 배움터가 되는 미사전례보다 더 좋은 치유의 안식처는 없습니다.
연민의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외딴곳에 도착했을 때 기다린 것은 쉼터가 아니라 일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먼저 와서 예수님 일행을 기다리고 있으니 참 반갑지 않은 손님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는 빛났습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면모가 약연하니 쉼이 아니라 가엾은 군중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심각한 상태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착한목자 예수님이 계십니다.
가엾이 여기는, 불쌍히 여기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연민의 사랑이 착한목자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목자없는 군중을 만나서 우선하신 일이 무지를 깨우치는 말씀 공부였음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미사의 말씀전례에 이은 성찬전례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무지를 깨우치는 진리의 말씀 공부가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만악의, 만병의 근원이 무지의 탐욕, 교만, 질투, 분노, 어리석음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착한 목자 주님을 알아가고 참나를 알아가는 말씀공부를 통해 비로소 치유되는 무지의 병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보시시에 참 좋은 삶을 원하십니까?
착한 목자 예수님의 영성을 배워 닮으십시오.
평생공부입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삶, 평화를 실천하는 삶, 연민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착한 목자 주님을 닮는 지름길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시편 54,6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공감과 연민>
2002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입니다.
어느덧 22년이 지났습니다.
한국은 폴란드와 포르투갈을 이기고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올랐습니다.
기세를 몰아 한국은 이탈리아를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2:1로 이기고 8강으로 올랐습니다.
감독인 히딩크는 ‘I am still hungry!’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한국은 스페인과 승부차기 끝에 4강으로 올랐습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붉은 악마’가 되었고, 붉은 셔츠를 입었습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이 힘차게 외쳤던 구호와 박수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구호와 “짝짝 짜자작”으로 이어지는 박수였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구호가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구호입니다.
어린 시절 저의 기억에 깊이 새겨졌던 구호가 있습니다.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 불’이라는 구호입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학교 담벼락에도, 동네의 담벼락에도 ‘국민소득 1,000불과 수출 100억 불’이라는 구호가 신동우 화백의 그림과 함께 그려졌습니다.
당시 정부는 1980년대에 그 목표를 이루겠다고 했는데 빨리빨리의 대한민국은 4년 앞당긴 1977년에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2023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33,475달러입니다.
수출은 1,118억 달러입니다.
소득은 33배가 넘게 증가했고, 수출은 11배가 넘게 증가했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구호가 있습니다.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입니다.
구호는 목표가 되었고, 목표는 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한국교회에도 구호가 있었습니다.
1984년 한국교회는 창립 2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주례로 103위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200주년 준비의 하나로 ‘사목회의’를 개최했습니다.
103위 시성식을 기점으로 한국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10년마다 신자 수가 100만 명씩 증가했습니다.
1980년대에 100만 명이던 신자는 2020년에는 500만 명을 넘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늘어났습니다.
본당은 넘쳐나는 신자로 분가해야 했습니다.
서울과 광주에만 있던 신학교도 늘어나는 신학생을 다 받지 못해서 늘어났습니다.
수원, 인천, 대전, 부산, 대구에 새롭게 신학교가 생겼습니다.
한국교회가 창립 200주년을 준비하면서 내세운 구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빛을‘이라는 구호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하느님을 받아들였던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많은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이 땅에 하느님 사랑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하느님 사랑의 빛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1989년에 한국교회는 44차 ‘성체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03위 시성식은 우리만의 행사였다면 성체대회는 가톨릭교회의 공적인 행사입니다.
변방에 있던 한국교회는 성체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당당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신학생이었던 저는 ‘괌’에서 온 순례단의 안내를 맡았습니다. 브라질의 주교님이고, 세계적인 해방 신학자인 ‘돔 헬더 까마라’ 주교님의 강의를 직접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돕자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성자(聖者)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내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조직을 만들자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도 좋지만,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주는 것은 더 좋은 것입니다.
44차 세계 성체대회의 구호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은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공감은 연민이 되고, 연민은 조건 없는 나눔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공감과 연민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공감과 연민이 희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공감과 연민이 함께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는 슬픔과 울부짖음이 없는 세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재물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한없는 연민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영적으로 충만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당당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자기계발서를 보면,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아마 이렇게 힘차게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에 당당하게 사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생각보다 무례한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 좋은 것만 하려고 하고, 자기 싫은 것은 죽어도 싫다면서 하지 않지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기 생각만 밀고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할까요?”
당당하지만 무례하지 않아야 합니다.
당당함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상처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당당함에 자기 욕심과 이기심이 담겨 있다면 이것은 지극히 무례한 것으로 사람들과 함께하기 힘들어집니다.
저 역시 이런 무례한 사람과는 함께 하고 싶지 않아서, 거리감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소심하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우리를 소중하게 창조하신 것만을 보더라도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을 따라오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지켜주는 사람이 없으면 계속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당당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단, 여기에 조건이 붙습니다.
무례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춰서 당당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사랑해야 할 때, 움츠러들지 않고 또 숨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당당함만을 드러내는 사람은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기 힘듭니다.
자기만 사랑하고 있기에, 하느님 앞에서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나서 숨었던 것처럼, 하느님 앞에 숨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당당하면서도 무례하지 않은,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을 배워서 세상에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진정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 안에서만이 하느님 나라의 커다란 희망이 있기에 그 희망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참 목자로 다가오십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유다인과 이민족 사이에 놓여 있던 분열과 적개심의 장벽을 허물어뜨려 하나로 만드신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이렇게 큰 힘을 가지고 계신 주님과 함께하기에 우리는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간직하기에 또한 무례하지 않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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