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기 사격에 의한 양민학살"은 거짓말이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때의 국방부 특조위 결론을 바로잡아야! 趙甲濟
국방부 5·18조사결과가 번복되지 않고 ‘국가가 공인한 사실’로 굳어지면 조종사들은 나치 유대인 학살범처럼 취급될 가능성이 있고, 국군과 국가도 전(全)세계 앞에서 학살집단으로 취급될 것이다. ‘5·18 당시 계엄군의 헬리콥터가 시민을 향해 사격을 했다’는 주장은 1988년 국회의 광주특위 때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후 광주사태에 대한 국가적 조사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헬기 사격은 부정되었다. 2017년 1월, 광주광역시 의뢰로 전일빌딩을 조사·감정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은 이 탄흔들이 “헬기가 호버링 상태(일정한 고도를 유지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고도만 상하로 변화하면서 사격한 상황이 유리하게 추정된다”고 밝히면서 새삼 논란이 됐다. 국과수 발표 몇 달 뒤인 2017년 5월 취임한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은 5·18 기념식에서 “새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에 노력하고, 헬기 사격까지 포함해 발포의 진상과 책임을 반드시 밝혀 내겠다”고 말했다. 곧이어 문 대통령은 ‘1980년 5·18 광주사태 당시 신군부가 시위대를 대량 살상하기 위한 헬기 사격을 계획했고 실제 전일빌딩 기총 사격으로 일부 실행됐다’는 주장과 관련, 이 두 가지 문제를 특별 조사하라고 송영무(宋永武)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5·18민주화운동 헬기 사격 및 전투기 출격대기 관련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이건리/이하 5·18특조위)’가 설립되었다. 2017년 9월 출범한 5·18특조위는 5개월의 활동기간을 거쳐 2018년 2월 ‘5·18 기간 동안 광주지역에서 공지협동작전의 일환으로 헬기 사격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계엄군은 5.21. 헬기를 이용하여 일반시민에게 위협사격을 하였고, 무장을 하지 아니하고 시위를 하는 시민들에 대하여 직접사격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5.21. 헬기 사격은 무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인 것으로서 계엄군 진압작전의 야만성과 잔학성 그리고 범죄성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또한 시민들과 물리적 충돌을 하고 있는 과정에서 실시되었던 지상군의 사격과 달리 헬기 사격은 사전 계획적·공세적 성격을 띠고 있다. (중략) 대량살상 능력을 갖춘 무장헬기까지 동원하여 사격을 하고 시민을 살상하는 행위는 집단살해 내지 양민학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5·18특조위가 국군을 ‘양민학살’ 집단으로 몰아가며 기존의 국가적 조사 결과를 뒤집은 논리는 이렇다. 〈계엄군 지휘부가 문서로 ‘헬기 사격 실시’를 지시했고 이를 하달 받은 현장 지휘관들의 헬기 조종사들에 대한 구두명령이 있었다 → 헬기가 무장한 상태로 작전활동을 했다 → 특조위 면담 조사에서 5명의 헬기 조종사들이 무장헬기의 출동사실을 시인했다 → 당시 사실상 발포를 허용하는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으며 자위권 발동명령이 하달된 상태였다 → 평시보다 엄중한 군법이 적용되는 비상계엄하에서 헬기 사격 명령을 받은 헬기 조종사들이 헬기 사격 명령을 무시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다 → 따라서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헬기 사격이 존재했다는 뚜렷한 증거다.〉 굉장한 논리적 비약이다. ‘땅은 젖지 않았지만 날이 흐렸기 때문에 비가 왔을 것이다’는 식이다. 5·18특조위의 조사 발표에 따라 국방부는 1980년 5월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공식 인정했고, 송영무 국방부 장관도 “우리 군이 38년 전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역사에 큰 아픔을 남긴 것에 대해 국민과 광주시민들께 충심으로 위로와 사과를 드린다”고 발표했다. 언론도 5·18특조위의 발표를 비판 없이 수용해 받아썼다. “무장 상태로 비행했지만 사격은 하지 않았다”는 당시 조종사 전원의 일관된 증언은 묻혔다. 헬기 사격을 했다는 사람도, 그 사격으로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확인하지 못했는데 비무장 시민들에 대한 헬기 사격이 국가적으로 인정됐다. 5·18특조위는 헬기 조종사들의 “헬기 사격은 하지 않았다”는 증언은 묵살하면서도 “헬기 사격을 봤다”는 목격 증언에는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조사결과보고서’는 ‘헬기 사격을 직접 목격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은 헬기 사격 사실을 보다 뚜렷하게 증명하고 있다’면서 목격자들의 진술을 정리했다. 이들의 증언은 1995년 검찰·국방부 합동조사에서는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닌 전문(傳聞)이었거나 헬기의 기체 성능이나 무장화기의 특성 등을 몰라서 한 주장으로 평가되었었다. 5·18특조위는 그 증언들을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증거로 다시 끌어낸 것이다.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의 쟁점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증언자는 당시 출동했던 육군 31·61항공단 소속 헬기 조종사들이다. 이들은 지난 30여 년간 일관되게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무장한 채 출동했지만 한 번도 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2017-2018년 국방부 5·18특조위 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19년 11월30 故 전두환(全斗煥) 전(前) 대통령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사자(死者)명예훼손 재판도 이 헬기사격에서 비롯됐다.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故 조비오 신부를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했다. 검찰은, ‘조비오 신부와 5·18 희생자, 그 유가족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기소했다. 기소의 주된 근거는 ‘5·18민주화운동 헬기 사격 및 전투기 출격 대기 관련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이하 국방부 특조위)의 ‘5·18 당시 국군의 야만적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조사결과였다. 전두환 재판은 ‘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판가름하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런 중요한 재판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판결을 한 광주지법 형사8단독 김정훈 부장판사는 헬기 사격의 실체에 대해 113페이지의 판결문에서 단 한 줄의 설명으로 갈음한다. 〈1980. 5. 21.경 광주천 불로교 및 양림동, 대의동, 학동시장, 기독병원 일대 등에 헬기 사격이 있었고…〉 -전두환 전 대통령 사자명예훼손 판결문 중 누가, 언제, 어디서, 무슨 헬기를 타고, 어떤 무기로, 어디를 사격했고, 그 사격으로 누가 죽고, 누가 다쳤으며 어떤 피해가 발생했는지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국방부 특조위 조사보고서와 대동소이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자명예훼손 1심 판결문이 계엄군에 유리한 측면도 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목격한 바와 같이 1980. 5. 21. 광주에 무장상태로 있었던 505항공대 또는 506항공대 소속의 500MD 헬기가 위협사격 이상의 사격을 하였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했을 뿐 국방부 특조위가 주장해온 ‘집단살해’ ‘양민학살’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다. 국방부 특조위는 ‘헬기 사격’을 ‘국군에 의한 국민 학살’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시민을 향한 조준사격’이 아닌 ‘위협사격’에 한정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판사는 국방부 특조위 조사결과를 참조할 뿐 “이 법원이 그 조사결과에 구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국방부 특조위 보고서가 사실상 부정된 것이다. 5·18특조위가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을 재판에 비유하자면 살인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한 것과 같다. 5·18특조위 발표대로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조종사들은 ‘양민학살범’이 된다.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려면 완벽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5·18특조위 조사결과보고서에는 완벽한 증거는커녕 비약과 추리만 있다. 어떻게 이런 조사를 근거로 조종사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었는가? 더 섬뜩한 것은 이런 부실한 조사가 아무런 반론도 없이 국가적 사실로 인정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중대한 사안에 객관적 증거 없이 ‘야만적 사격’이 있었다는 발표를 하는 것을 묵인한다면 이는 국가 기관에 의한 역사 조작을 용인하는 것이 된다. 적어도 국방부 장관은 이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선언, 대한민국 국군의 명예를 지키고 현대사의 왜곡을 막았어야 했다. 국방부 5·18조사결과가 번복되지 않고 ‘국가가 공인한 사실’로 굳어지면 조종사들은 나치 유대인 학살범처럼 취급될 가능성이 있고, 국군과 국가도 전(全)세계 앞에서 학살집단으로 취급될 것이다. 5·18특조위는 이런 끔찍한 연쇄반응을 생각하고 이런 무서운 결론을 내렸는가? 5·18특조위의 “1980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의 헬기 사격으로 양민이 학살됐다”는 발표도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처럼 재조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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