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쁜 버스
정익현
나는 버스가 밉다.
버스는 운전하는 나를 수시로 성가시게 한다 버스는 차선을 참 쉽게도 바꾼
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옆 차선은 항상 그의 것이다. 그 큰 몸으로 방향 지
시등을 켜기가 무섭게 숫탉이 암탉을 희롱하듯 슬쩍 다가오면 나는 겁이 난
다.
그리고 그는 정류장에서도 엉거주춤 꼴사납게 서 있다. 주변에 불법으로
주·정차한 차들로 인하여 부득이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더
라도 진입하기 좋게 주행 차선 하나를 반쯤 점렴하여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대중교통 수단이라는 이유로 양보를 강요하는 버스가 미워서 가끔 경적을
울리고 버텨 보지만, 비웃기라도 하듯 큰 덩치로 밀고 들어오면 오히려 기분
만 더 상한다. 그런데, 이러한 내 생각을 바꾸어 놓을 게기가 생겼는데 그것
은 다름 아닌 교통사고 였다. 내차가 뒤를 심하게 받혀 그 길로 공업사로 들
어갔다.
이리하여 할 수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었고, 이참에 걷기도 할겸 버
스를 주로 이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개x도 약에 쓸려면 없다.”고 그렇게
자주 다닌다 싶고 성가시게 굴던 버스가 좀처럼 오지를 않는다. 오랜만에
도착한 버스가 반가워 뛰어가 보면 행선지가 틀리기 일쑤였다.
이렇게 하여 며칠을 어렵게 이용하다 보니 나름대로 색다른 정취도 있었고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에는 옆집 문을 잘못 열고 들어간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으나 곧 적응이 되니 오히려 편안했다. 차비를 내고난 다음 그
냥 서서 옆사람을 곁눈질 해 보거나 굳어진 허리도 움직여 보고 어쩌다 자
리가 나면 앉아서 차창 밖을 쳐다 보고만 있으면 되었다.
버스안은 노인, 아주머니, 젊은 직장인, 학생이 대부분이고 50을 바라보는
내 또래의 중년남자는 드물었다 짐을 바닥에 내려 놓아도 좋으련만 누가 빼
앗기라도 하는 것 처럼 짐 보따리를 잔뜩 부둥켜 안고 있는 할머니는 내 가
슴을 짠하게 한다 '쿵쾅 쿵쾅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리자 옷차림새 보다 훨
씬 세련된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버스안의 사람들은 다 들어야 한다는 듯이
큰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는 아주머니는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주위는 아랑
곳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문자메시지에 열중인 '엄지 공주’ 여학생은
나로 하여금 세대 차이를 느끼게 한다. 그 학생은 그 작은 기계에 이세상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생각 할 것이고 나는 그것이 단지 통화를 하기
위한 쇳덩이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어떻게 보면 버스안은 모두가 제각각이다. 짧게는 몇 분 길게는 몇 십분을
우리는 좋든 싫든 버스라는 작은 공간 속에 함께 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엄청난 인연인데 그런 인연을 애써 외면할 필요는 없으리라 또 만남과 이별
이 승·하차라는 형식을 빌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버스
는 폐가처럼 을씨년스럽고 냉기가 돌지만 승객으로 차있는 버스는 우리의
삶을 담는 그릇이 되어 따뜻한 온기가 흐른다. 수많은 사람들과 정답게 악수
를 나누었을 이 손잡이 여러 사람들의 엉덩이를 어루만진 저 의자들 모두가
버스안의 정다운 소품이다.
갑자기 상큼한 비누 냄새가 여러 상념에 빠져있는 나를 깨웠다 내 앞의 젊
은 여인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아직도 남아 있는 비누 냄새
의 묘한 여운을 느끼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창 밖은 또 다른 세상이
었다.
새로 짓고 있는 건물 개업 준비로 분주한 점포 셔터를 내린 집, 인도를 오
가는 여러 표정의 행인들 무심코 지나쳐 버린 광경들이 차창을 통하여 새롭
게 들어 온다. 일종의 '훔쳐보기'에서 오는 스릴과 함께.
버스가 육거리 시장에 도착하자 밖은 새떼가 북적거리는 탱자나무 울타리
처럼 소란스러웠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노점상, 장보는 사람들, 장류장
에서 손님을 태우는 택시. 버스문이 열렸는데도 사람이 타지를 않는다. 웬
할아버지가 행선지를 묻느라고 갈길이 먼 버스의 문을 막고있다. 운전기사는
일일이 대답을 해주며 불편한 몸을 이끌고 천천히 올라오는 노인을 기다리
고 있다.
이렇듯 버스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한편의 단막극처럼 부담이 없고 때
로는 정겹다. 도심의 번잡을 피해 한산한 도로를 찾아서 이용하다 보니 같은
시내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줄을 미쳐 몰랐다. 아니 몰랐다기 보
다 외면하고 지냈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나 만나게 되어 목례정도 나누는 윗층 아저씨를 귀가
길 버스에서 만나 함께 걷게 되는 것도 뜻밖의 즐거움이다.
정신없이 빠른 디지털 시대에 버스는 아직도 아날로그적인 맛을 가지고 있
다. 느림의 미학! 질주하는 말은 아름답지만 뛰어다니는 소는 걱정거리가 아
닐까? 시내를 벗어난 교외에서 가끔 과속으로 달리는 시내버스를 보면 고삐
풀린 망아지를 보는 것 같아 위태위태하다. 그렇지만 우리의 발이 되어주는
버스는 고맙고 미더운 존재다.
아파트가 지어져 이웃간에 벽을 만들고, 컴퓨터로 인하여 사람들은 사람을
멀리하게 되었다. 자가용은 속도와 편안함을 추구 하여 우리는 그 속에서
혼자이다. 그래, 가끔 사람 냄새가 그리웁고 가슴이 허전하면 버스를 타자.
그것도 육거리 시장을 지나는 버스이면 더욱 좋겠다.
나는 오늘도 운전을 한다. 버스가 또 다시 예의 그 큰 엉덩이를 슬쩍 들이
민다. 오늘 따라 그것이 여인의 엉덩이 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앞서 가세요 이-쁜 버스!"-
첫댓글 느림의 미학! 질주하는 말은 아름답지만 뛰어다니는 소는 걱정거리가 아닐까? 시내를 벗어난 교외에서 가끔 과속으로 달리는 시내버스를 보면 고삐 풀린 망아지를 보는 것 같아 위태위태하다. 그렇지만 우리의 발이 되어주는 버스는 고맙고 미더운 존재다.
정신없이 빠른 디지털 시대에 버스는 아직도 아날로그적인 맛을 가지고 있
다. 느림의 미학! 질주하는 말은 아름답지만 뛰어다니는 소는 걱정거리가 아
닐까? 시내를 벗어난 교외에서 가끔 과속으로 달리는 시내버스를 보면 고삐
풀린 망아지를 보는 것 같아 위태위태하다. 그렇지만 우리의 발이 되어주는
버스는 고맙고 미더운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