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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서장(西藏)을 향한 비행(飛行)
흑의검왕은 정신을 집중하며 절세적인 내공구결을 뇌리에 떠올렸다.
'역천현공(逆天玄功)으로 진기 운용을 거꾸로 해보자.
성공한다면 잠재력을 건드리지 않고 내상을 치유시킬 수 있다.
실패하면 우리 셋이 다 죽겠지만….'
흑의검왕은 운명을 하늘에 맡기는 기분이 되었다.
'오… 상왕(上王) 정의무성(正義武聖)의 영혼이시여! 저의 간절한 소망이오니 한순간만 힘을 주십시오.'
흑의검왕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다가 한순간 진기운용의 방향을 거꾸로 했다.
그의 몸 근처에 우레 소리가 났다.
장강의 물결같이 흐르다가 거대한 절벽에 막혀 소용돌이를 이루는 듯하던 그의 진원지기가
구결을 일으킴에 따라 뒤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낙헌지의 잠재력이 그의 진원에 따라 움직였다.
"크으으!"
흑의검왕은 막강한 반탄력에 오장육부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휩싸였다.
두 손을 떼어놓고만 싶었다.
"하압!"
흑의검왕은 기합소리를 내며 운명을 시험해 보는 쪽을 택했다.
극심한 고통을 무릅쓰고 역천현공을 계속하자 낙헌지의 기해혈(氣海穴)에서 강한 힘이 일어났다.
잠재력에 비한다면 훨씬 약했지만 흑의검왕의 진원지기보다는 세 배 강한 힘이었다.
그리고 그 힘과 흑의검왕의 진원지기가 합하기 시작하자
낙헌지의 잠재적인 반탄력이 완전히 위력을 잃고 예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내상에 의해 흐트러졌던 혈발마공(血髮魔功)이 다시 솟구치며
흑의검왕의 몸이 뒤로 벌렁 넘어져 갔다.
"아… 됐다!"
흑의검왕은 안도하듯 중얼거리다가 정신을 잃었다.
그는 일신내공의 칠 할을 잃은 극히 위급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아주 만족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으음…!"
낙헌지는 힘이 없어 다 쏟아내지 못한 정염(情炎)의 대폭발을 느끼며
금의검선자의 연약한 몸뚱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앗…?"
금의검선자는 젖가슴이 터지고 등판이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 빠져들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대감보다는 공포가 앞섰다.
'이 분을 살리기 위한 일이나… 서글픈 일이야.'
그녀는 낙헌지의 더운 숨결을 귓가로 느꼈다.
이어 두 다리가 벌어지며 아랫도리에 극렬한 통증이 전해졌다.
"흐으윽―!"
금의검선자의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전신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허벅지 사이로 전해지는 뜨거운 열류가 그녀를 아득한 나락 속으로 떨어뜨렸다
. 꽃잎 같은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낙헌지의 손에 받쳐 올려진 둔부가 들썩일 때마다 예리한 통증에 몸을 떨어야 했다.
긴 속눈썹을 타고 수정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정인(情人)을 지켜온 순결이건만 그녀는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
그렇다고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그녀의 가슴에 자리잡은 낙헌지의 존재는 이미 방심을 흔들고도 남았다.
그녀가 고통과 희열에 젖어 흐느끼는 듯한 신음소리를 내자
낙헌지는 그녀를 부둥켜안으며 몹시 만족해했다.
그는 혼몽에 젖어 이약란과 열띤 정사를 벌였다.
몸 속에 있는 정염을 모두 쏟아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고
이약란은 거의 초죽음이 되다시피 했다.
"하아악…!"
그의 몸을 휘어 감던 그녀의 흰 다리가 힘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낙헌지는 비로소 열정을 분출하며 허공에 붕 뜨는 기분이 되어 행위를 멈추었다.
땀에 젖은 두 남녀는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낙헌지는 겨우 정신을 차리며 이약란의 몸에서 풍기는 방향(芳香)을 느낄 수 있었다.
향긋한 체향은 아주 좋았다.
볼에서 느껴지는 탄력 있는 젖가슴의 감촉 또한 포근했다.
"흐흑흑…!"
나지막한 여인의 울음소리가 낙헌지의 두 눈을 번쩍 뜨게 했다.
"아… 아니?"
낙헌지는 모든 것이 꿈인 줄만 알고 있다가 자신의 품안에 여인이 안겨 있다는데 크게 놀랐다.
"낭자…?"
낙헌지가 이약란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굳어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녀의 매끄러운 나신과 자신의 알몸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럴 수가! 대체…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이약란은 소리 없이 흐느꼈지만 서러운 눈물은 아니었다.
순결을 잃어버린 허전함과 차마 그를 직시할 수 없는 수줍은 때문이었다.
이때, 이제껏 닫혔던 방문이 열리며 청의를 걸친 절세미녀(絶世美女)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추수(秋水) 같은 눈망울은 맑고도 깊었고,
그린 듯 곱고 가는 아미(蛾眉)에 오똑한 코를 지닌 경국지색이었다.
안타깝게도 너무도 흰 얼굴빛은 병색이 완연했다.
낙헌지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 당신은…?"
낙헌지가 부끄럽고 놀라 탄성을 발하자
청의미녀가 손에 쥐고 있던 보따리 하나를 낙헌지에게 던져 주었다.
"그 안에 흑삼 한 벌과 신, 그리고 맹주가 지니고 계시던 소지품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습니다."
여인의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귀에 익었다.
여인은 낙헌지의 실로 건강한 나체를 보고 살짝 홍조를 띄웠다.
그녀는 금의검선자의 언니 청의병선자 이옥란이었던 것이다.
낙헌지가 금의검선자를 버리지 않는다면 청의병선자는 낙헌지의 처형(妻兄)이 될 것이다.
청의병선자 이옥란은 소문같이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동생과 살을 섞은 직후의 미청년 앞에 나서는 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남녀지간의 정사에 대해 전혀 상관하지 않는 몸이라 생각하는 듯싶었다.
낙헌지는 이약란과 급히 떨어지며 보따리 안의 의복으로 대충 몸을 가렸다.
이약란은 낙헌지의 넓은 등뒤에 숨어 언니를 눈치를 살필 따름이었다.
이옥란은 여전히 혼절해 있는 흑의검왕의 맥을 짚어 보고는 말을 이었다.
"같이 들어 있는 금호각은 맹주가 타고 갈 금시단정학(金翅丹頂鶴)을 부릴 수 있는 물건입니다
. 개방 태상방주 천결신개께서 기증해 주셨지요.
준비가 되는 대로 나오셔서 석진영을 추격해 주십시오."
이옥란은 말을 마치고는 밖으로 걸어나갔다.
낙헌지는 움츠린 채 나신을 가리고 있는 이약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낭자의 헌신적인 희생 덕분에 소생이 살아나게 되었소."
"아… 아니옵니다."
평소 이약란은 사내와 같은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한 남자의 여인으로 되자 누구보다 여성스러움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낙헌지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워낙 화급한 일이라 공자를 더 이상 붙잡을 수가 없군요.
부디 소녀를…기억해 주세요."
낙헌지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하늘에 맹세코 당신을 잊지 않겠소."
그는 그녀의 따스한 피부에 접하자 다시 욕정을 느꼈지만
한가하게 운우를 즐길 시간이 없는 것이 한이었다.
옷을 입고 물건을 챙기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낙헌지는 청의병선자 이옥란과 함께 거대한 금빛 단정학 한 마리 앞에 이르게 되었다.
단정학은 거대한 날개를 푸득거리며 자태를 뽐내었다.
과연 당세의 영물답게 깃털이 매끄러웠고,
울음소리는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주리 만큼 청아했다.
낙헌지의 손에는 금호각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 위에는 용호문(龍虎紋)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 무늬를 사용하는 문파는 천하에서 가장 많은 제자들 거느리고 있는 개방이었다.
"금호각을 부는 방법은 모두 열 가지입니다.
위로 오를 때에는 길게 두 번을 불고 내릴 때에는 짧게 세 번을 붑니다."
청의병선자는 야릇한 눈빛으로 낙헌지를 바라보며
금호각을 불어 금시단정학을 부리는 방법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낙헌지는 청의병선자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억력을 발휘해
그녀가 한 번 말하자 열 가지 호각부는 법을 완벽히 외웠다.
'하인 출신이라는데 언행에 기품이 있다. 강호가 평화로워진다면…
약란이와 이 사람의 혼약을 서둘러야겠어.'
병선자는 급히 고개를 젓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금시단정학은 흑응보다 두 배나 빨리 납니다."
"석진영이 이틀 전에 떠났다면 두 배 빨리 난다 해도 늦지 않겠소?"
"아닙니다. 석진영은 여인과 함께 타고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흑응은 한 번 날아올라 오천 리를 계속 날지 못합니다.
더욱이 등에 두 사람을 태우고 있으니 그리 빨리 날지는 못할 것입니다."
병선자 이옥란은 아주 영특했기에 모든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고있었다.
"그럼 따라잡을 수 있겠구려?"
"아슬아슬합니다. 만약 칠마가 서정 당고라산에서 나와 그를 마중한다면 잡기가 불가능합니다."
낙헌지는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다.
"칠마가 당고라산 안에 머물며 석진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기를 바래야지요.
그렇게만 된다면 석진영을 당고라산에서 천 리쯤 떨어진
서역(西域) 어딘가에서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알겠소."
낙헌지의 입가에 비장한 각오가 떠올랐다.
청의병선자가 그의 사내다움에 은근히 마음을 졸였다.
낙헌지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여린 손목을 굳게 쥐었다.
"실패하게 되면 낙헌지라는 이름의 석 자는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오.
성공하면 곧 낭자 곁으로 돌아와 낭자에게 한 가지 일을 사죄하겠소."
"사죄라니오?"
"낭자를 속이고 있는 일이 있소."
이옥란은 고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슬며시 손을 뺐다.
"소녀를 속이다니요?"
"아…차마 내 입으로 말하지 못할 일이오."
낙헌지는 마음에 큰 짐을 지고 있었다.
검보이선자를 대할 때마다 그는 죄인이 되어야 했다.
그 자신이 두 자매의 아버지인 백의검제 이궁을 죽인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두 자매의 귀에 들어간다면 낙헌지는 그녀를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이오."
낙헌지는 더 이상 말하기 거북해 입을 꾹 다물었다
. 청의병선자는 그의 준수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대협은 지금 무림맹주의 자격으로 떠나시는 것입니다.
대협이 떠나신 후 무림맹은 일단 해체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협이 석진영을 따라 잡는다면 무림맹은 다시 모일 것이고,
그 일이 실패로 끝난다면 강호의 협의도(俠義道)는 영영 은거에 들 것입니다."
"명심하겠소."
낙헌지는 그의 세심한 안배에 감탄하고 말았다.
"어서 떠나십시오. 금시단정학은 잘 먹고 푹 쉬어 가장 빨리 날 수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 장도에 행운이 있기를 빌겠습니다."
청의병선자는 다소곳이 말하다가 뒤로 물러났다.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다.'
낙헌지는 그녀가 병을 않아 아주 허약하다는데 못내 가슴 아팠다.
'뜻을 이루고 살아 돌아오게 된다면…
제일 먼저 청의병선자에게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영약을 찾아다 줘야지.'
낙헌지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다가 금시단정학 등에 올랐다. 안장이 마련되어 앉기 편했다.
"가자!"
낙헌지는 크게 외치며 금호각을 입술 사이에 물고 두 번 길게 불었다.
삐익― 삐익―!
호각 소리가 모산의 정적을 깨뜨리는 동시에
금시단정학이 날개를 쫘악 펴고 곧바로 수십 장 높이로 날아올랐다.
고고학성(孤高鶴聲)이었다.
금영(金影) 하나가 충천함과 동시에 낙헌지의 모습도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아…!"
금의병선자는 낙헌지가 날아가는 방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곳 중원에서도 뜻을 이룬 칠마전이 아닌가?
서장은 그들의 아성(牙城)이다.
맹주가 성공하기 거의 힘들다는 것을 안다.
천기(天機)는 그들의 편이지 우리들의 편은 아니니까."
청의병선자는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물에 젖는가 하더니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창백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오나 맹주가 천하를 구하지 못한다면 누가 할 수 있겠어요?"
저 하늘 멀리서 학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진인사(盡人事) 대천명(待天命)이 아니겠소?
악(惡)이 아무리 강해도 선(善)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오."
어느새 삼 리 밖으로 날아간 낙헌지의 천리전음술(千里傳音術)에 의한 말소리가
긴 메아리를 만들었다.
***
서역(西域)으로 드는 길목도 가을색이 한창이었다.
만추의 절경이 영륭리남산맥(永隆里南山脈)을 타는 듯 붉게 물들고 있을 때
하늘 위에서부터 훌훌 떨어져 내리는 금빛 노학(老鶴) 한 마리가 있었다.
끄― 아― 아―!
유난히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는 노학은
이백 년 수령을 가진 영물로 천하에서 가장 크고 힘센 학이었다.
날개를 다 펴면 길이가 삼 장에 달하는데 그 위 금으로 만들어진 안장 하나가 있었다.
"수만 리를 쉬지 않고 날았으니 여기서 이 각 정도 쉬어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안장 위에 앉아 있는 미끈한 용모의 흑삼청년 하나가 있었다.
뭇 여인이 한 번이라도 대하면 그대로 방심이 허물어져 버릴 영준한 용모였다.
그의 눈가에는 검은 그늘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지난 하루 내내 모산에서 여기까지를 직선 거리로 가로질렀다
. 그런데 그들의 모습은 발견하지 못했다. 아… 이미 엎질러진 물이란 말인가?"
노학을 타고 내려온 청년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피우융―!
저 멀리 허공을 찢으며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향전(響箭) 하나가 있었다.
흑삼청년에게서 오 리 떨어진 곳에서 발사된 향전은
저 멀리 허공까지 날아가며 큰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일까?'
청년은 호기심을 느끼다가 천이통(天耳通)을 일으켜 주위를 살피게 되었다
. 그러다가 곧 긴장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접근해 오는 강호 고수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떤 자들일까?'
경미한 파공성을 내며 접근하는 무사들의 수는 이 십에 달했다.
아마도 향전은 청년이 학을 타고 날아내리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
어떤 무림 집단의 보초에 의해 발사된 신호전이었던 모양이었다.
"시비를 일으키기는 싫은데…!"
청년은 학에게 명해 비상을 명하려다가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서는 자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를 들은 것이다.
"얼마 전에는 소전주가 흑응을 타고 날아오시더니, 헤헤…
이제는 신기한 학 한 마리가 날아들었군. 새들의 잔칫날인가?"
창로한 목소리에 이어 컬컬한 음성이 화답했다.
"곡주님의 말에 의한다면 개방에만 한 마리 있다는 금시단정학이라는 것이네.
사람이 타고 있을지 모르니 조심해야 하네."
"흐흐…중원 이외의 땅은 이미 칠마전의 세상이 되었고,
이곳은 흑응곡(黑鷹谷)과 환영림(幻影林)의 전진 총타가 되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사람이 타고 있다면 죽으러 오는 것이지."
그들의 말에 흑삼청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과연 병선자의 지혜는 대단하군.
그녀가 말한 방향을 따라 날아온 것이 주효했다.
그녀가 말한 지점에서 석가 놈의 종적을 발견하게 되었군.
백의검제가 자신의 명예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살리려 했던 여인답구나!'
흑삼청년은 학의 등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 그의 눈빛은 어느샌가 혈광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곳은 중원이 아니다. 서장과 중원의 중간인 서역(西域)이다.
이곳은 칠마전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곳이다
. 사마외도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악의 땅이니,
피를 뿌린다 하여 지신(地神)이 노여워하지는 않으리라.'
살기를 폭사시키는 흑삼청년은 바로 낙헌지였다.
그는 제 이대 중원무림맹의 맹주라는 놀라운 자격으로
막중한 임무를 띠고 모산에서 수천 리를 날아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두 명의 황의노인 숲을 뚫고 날아왔고, 그 뒤로 이십여 명의 자의인들이 바짝 뒤쫓아 나왔다.
"저기다!"
"역시 사람이 있군. ㅋㅋ… 흑응곡 영내에 날아내리다니 간담이 큰 놈이군."
두 명의 흑의노인은 허공에서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흑응신법을 완벽히 익히고 있었다.
"차앗―!"
"흑응귀애(黑鷹歸涯)―!"
황의노인들은 일직선을 그으며 달려들다가 단정학 등에 타고 있는 낙헌지를 발견하는 순간
좌우로 흩어져 낙헌지의 양옆으로 내려섰다.
흙먼지 하나 일으키지 않는 놀라운 경신법이었다.
'이역(異域)의 무공이 중원의 무공보다 강하군
. 중원에서도 이런 경공을 가진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낙헌지는 두 노인의 신법에 진심으로 감탄해 했다.
황의이노를 쫓아온 이십여 명의 청의검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근처를 엄밀히 포위했다.
"웬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화의노인 중 얼굴색이 유난히 흰 자의 말이었다. 무상백귀(無常百鬼)가 그의 별호였다.
그와 나란히 달려온 또 하나의 황의노인은 무상흑귀(無常黑鬼)로
얼굴이 유난히 검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
"개방의 신물이라는 금시단정학을 타고 온 것으로 보아 중원인인 듯한데?"
그들의 한어(漢語)는 아주 능숙했다.
중원을 점령할 때를 대비해 한어를 갈고 닦았음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낙헌지는 숨을 내쉬다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중원에서 왔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느냐 묻는다면 가르쳐 주겠다.
나는 벗을 찾아 이역만리 온 것이다."
"벗…?"
"너의 벗이 누구냐?"
무상쌍귀(無常雙鬼)는 낙헌지를 하인 다루듯 하면서도 감히 덤벼들지는 못했다.
낙헌지의 안광으로 상대가 상승 내공의 소유자임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낙헌지는 둘을 쓸어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의 벗은 석씨 성을 갖고 있다. 그를 알지 모르겠구나?"
"석씨? 설… 설마 소전주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
무상쌍귀는 크게 놀라며 서로를 보았다.
낙헌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한시름을 놓았다.
'병선자의 바람대로 놈이 아직 칠마전에 들어가지 않았다
. 하하, 칠마가 그를 마중 나오지 않다니 천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가슴을 짓누르는 부담과 화급함이 해소되자 아주 편안한 기분이 되었다
. 칠마가 출현하지 않는 한 누구도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천옥룡(南天玉龍)을 찾아왔다."
"으음… 남천옥룡이란 중원인이 부르는 별호이고, 우리들은 진천마군(震天魔君)이라 부른다."
무상쌍귀는 낙헌지의 정체를 알 길 없어 눈알을 떼굴떼굴 굴렸다
. 행여 석진영의 친구일 수도 있기에 섣불리 공격하기도 어려웠다.
무상쌍귀는 칠마전에서 호법(護法) 지위를 갖고 있었다.
얼마 전 칠마전에 합병된 흑응곡의 좌우쌍호법(左右雙護法)이었던 자들로
경신법과 지공(指功)에 탁월한 재간을 갖고 있었다.
"소천주님이 여기 오신다는 것을 어찌 알고 찾아왔느냐?
그리고 네놈이 어떤 신분인지를 말해 봐라."
"진천마군인지 남천옥룡인지 하는 사람에게 나를 데려다 다오
. 그러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낙헌지가 천천히 학 등에서 내려섰다.
"정체를 먼저 밝혀라!"
"신분을 밝히는 것이 예외가 아니겠느냐?"
무상쌍귀가 언성을 높이자 낙헌지의 눈에서 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중원 속담에 이런 것이 있다. 관짝을 보고서야 눈물을 흘린다는 말이 그것이다.
너희들이야말로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어리석은 자들이구나."
"그… 그래?"
"역시 적이구나!"
무상쌍귀는 그제서야 낙헌지가 칠마전의 적임을 확신하며 만반의 준비자세를 갖추었다.
"흥…!"
낙헌지는 주의를 쓸어보며 냉소적인 미소를 짓다가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그의 허리에는 백룡검(白龍劍)이 매달려 있었다.
백룡검에는 황금빛 수술이 매달려 아름답게 흔들리고 있는데,
그것은 청의병선자가 낙헌지의 무훈을 빌며 달아준 것이었다.
"뒈져라!"
흑귀에 비해 성질이 화급한 무상백귀가 기합소리를 내며 냅다 십지를 쳐냈다.
피피핑―!
푸른 지력이 일어나 낙헌지의 가슴에 그대로 구멍을 낼 기세였다.
"하하…중원 절학도 만만치 않다!"
낙헌지가 기다렸다는 듯 검을 길게 끌어내며 순간적으로 무수한 검영(劍影)을 만들어 냈다.
우르르르― 릉―!
벼락치는 소리가 일어나 마인들의 고막에 고통을 안겨 주었다.
뇌음칠검(雷音七劍)!
하지만 뇌공문의 창시자 뇌공자(雷公子)가 살아 있다 해도
낙헌지같이 정교하게 시전하지는 못할 것이다.
허공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검기가 일어나 십 장 안을 휘감았다.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모를 무시무시한 검법 앞에 흑응곡의 무사들은 살이 베이는 참담함에 젖었다.
"크으으…!"
"아악…!"
뇌음칠식이 펼쳐졌다가 회수되자 근처가 작은 시산(屍山)으로 화했다
. 단 일 초에 모두가 즉사한 것이다.
살아 있는 자는 제일 성급히 낙헌지를 향해 달려들었던 무상백귀 하나뿐이었다.
"크으으…이럴 수가?"
무상백귀는 피비린내에 취해 바들바들 떨었다.
그는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다 여기면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진정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일 성질이 급한 놈이 제일 겁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네놈 하나만을 살려둔 것이다.
바른 대로 말하기만 하면 죽이지 않겠다."
낙헌지는 미끄러지듯 다가서 그의 목에 백룡검의 차가운 검신을 갖다 댔다
. 백귀의 주름진 살가죽이 조금 갈라지며 핏방울이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으으…살… 살려 다오. 살… 려 주시오."
백귀가 혓바닥을 안으로 꼬부리고 말을 더듬었다.
"바른 대로 말하겠느냐?"
"말… 말하겠소. 알고 있는 것은 다… 다 말하겠소."
백귀는 사신을 만난 듯 두려워했다.
일 초에 형제와 동료를 날려버린 낙헌지의 잔혹한 수법은
그에게 더할 수 없는 공포심을 주었던 것이다.
낙헌지는 나직하면서도 강하게 말했다.
"석진영은 어디 있느냐?"
"석… 석소전주는 흑응곡에 계시오. 두 시진 전에 돌아오셨소."
"이곳이 칠마전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 이곳은 삼 년 전부터 칠마전의 전진 분타가 되었소
. 그러기에 더 이상 흑응을 타고 날아가지 않으셨던 것이오."
낙헌지는 턱을 어루만졌다.
"왜 아직 머물러 있느냐? 칠마령을 찾았다면 의당 칠마전으로 떠나리라 믿고 있었는데?
설마 칠마가 와 있는 것은 아니냐?"
무상백귀는 아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전… 전주는 칠마령이 당고라산(唐姑라山)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칠마전을 비우지 않으시겠다고 맹세하신 분이오
. 그 분은 오시지 않으셨소. 대신 두 분이 소전주를 마중 나오셨소
. 소전주는 지금 두 분과 연회중이시오.
연회가 끝나는 대로 칠마령이 당고라산으로 옮겨질 것이오."
"둘이라니?"
"오전주(五殿主)와 칠전주(七殿主)가 오셨소."
낙헌지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별호를 대봐라!"
"오… 오전주님은 비마(飛魔)시며…그리고 칠전주님은 선마(扇魔)라 불리고 있소
. 두 분께서 친히 마중 나와 계시니 소전주가 어찌 급히 칠마전으로 가시려 하겠소?"
"으음…!"
낙헌지는 희비의 교차를 느꼈다.
칠마령이 칠마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반가운 말이었다.
그러나 공포스런 칠마 중 둘이 여기 와 있다는 것이 두렵기만 했다.
'내가 실패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아…나의 무공으로 칠대사마(七大邪魔) 중 둘을 막을 수 있을까?'
낙헌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의 표정을 살피던 무상백귀는 간특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 본전(本殿)은 칠마령을 찾은 후 의식을 성대히 거행할 것이오.
그 다음 중원으로 들어가 강호제파(江湖諸派)를 차례차례 접수하겠지.
하지만 과거 무림맹 소속이 아닌 사람이라면 두려워할 것은 없소.
전주는 살생보다 관용을 택하시기로 결정하신 바 있으니까."
"닥쳐라!"
낙헌지는 그에게 호통을 쳐 입을 다물게 하고는 잠시 생각에 들었다.
'이 길로 흑응곡으로 가는 방법밖에 없다
. 두 명의 노마(老魔)와 싸우게 될 때 과연 승리인가 패배인가?'
낙헌지는 마음을 쉽게 정할 수 없었다.
사부로 모신 오대거마 역시 신신당부할 정도로 칠대사마는 공포적이었기 때문이다.
― 칠대사마 중 어느 하나 너에 비해 약자는 없다.
그러니 칠마전이 강호에 나올 경우 숨어 훗날을 꾀해라!
낙헌지는 오대거마 도움이 간절하기만 했다.
'사부와 네 분 사숙이 무저갱에서 나오지 못하는 신세가 아니라면
칠마 정도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텐데…
그렇다고 칠마를 무저갱 안에 끌어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결국 내가 막아야 한다.'
낙헌지는 그 누구도 자신을 돕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는 수 없군."
그는 흑응곡으로 가서 칠마령의 한쪽을 놓고 담판을 지으리라 마음을 굳혔다.
"흑응곡의 자세한 위치를 말해 봐라."
"흑응곡은 입마령(立馬嶺) 아래에 있소. 과거 대무신국(大武神國)이 바로 현재의 흑응곡이오."
"허어, 정의무성이 세워 육십오 년 간 천하제일로 군림하다가
하룻밤 새 멸망했다는 대무신국의 땅 마저 칠마전에 들어갔단 말인가?"
낙헌지는 대무신국이란 말에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그리고 입마령이라는 지명도 낯익게만 여겨졌다.
무상백귀는 입마령의 위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외부인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오.
당신은 그 전에 잡히고 말 테니까.
운 좋아 들어간다 해도 두 분 전주를 이길 수는 없소.
차라리 이대로 도망가는 것이 목숨을 보전하는 유일한 방도…끅!"
무상백귀는 나름대로 낙헌지를 비호하다 그의 손가락 아래 점혈되어 정신을 잃었다.
"너 따위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낙헌지는 금호각을 빼물었다.
긴 호각 소리가 두 번 울리는 순간 금시단정학이 날개를 펴고 곧바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제 성공하면 너를 다시 만날 것이고 실패하게 된다면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 것이다."
낙헌지는 금시단정학이 사라질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한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훗훗……, 그렇군. 지옥제일검이 하듯 하면 되겠군"
낙헌지는 쾌재를 부르며 자신의 손 아래 죽은 자들의 시체를 살폈다.
그는 시체들의 소지품을 샅샅이 뒤졌다.
좀도적 중의 좀도적이나 시체에서 물건을 빼앗는 일을 한다.
물론 그에게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여기 있군."
낙헌지는 자신의 뇌음검식 아래 허리가 끊어져 죽은 자의 옆구리에서
가죽주머니 하나를 찾아들었다.
가죽주머니를 열자 나뭇갑 하나와 조그만 약병 다섯 개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붓과 수염이 있었다.
그것은 역용(易容)을 하기 위한 재료들로 낙헌지가 시체더미를 뒤진 이유였다.
이 백 장 갔을까?
낙헌지는 옹달샘 하나를 발견하고 샘가에 주저앉아 나뭇갑과 약병을 살폈다.
"만반의 준비는 아니지만 칠마전 무리들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백절마 사숙의 절기를 이용한다면 충분하다."
낙헌지는 나뭇갑 안에 든 분말을 물에 잘 개었다.
범인으로는 힘든 정교한 작업이었지만
낙헌지의 재능은 그 누구와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잠깐만에 용 눈알 만한 역용환(易容丸) 하나를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역용환을 얼굴 위에 발라 모양을 변화시켰다.
"코를 약간 낮추어야겠군. 그리고 입술을 조금 얄팍하게 해야겠다."
낙헌지는 옹달샘의 수면을 거울 삼아 얼굴을 비춰 가며 역용환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백절마에게서 배운 화신법(化身法)에 따른 역용으로 천하에서 가장 교묘한 기예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낙헌지는 매섭고 치밀한 용모를 가진 청년으로 변모되었다.
"후훗……, 이 정도면 진짜 석진영이 봐도 모를 것이다."
낙헌지는 눈을 감고 목청을 가다듬고 시작했다.
'변성(變聲)까지 해야 들키지 않는다.'
낙헌지는 석진영의 음성을 되새기고는 목청을 가다듬고 변성술을 구사했다.
"나를 아느냐?"
약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그의 청아한 목소리를 대신했다.
"하하하… 나는 지옥제일검이다!"
낙헌지는 석진영의 모습과 음성을 완벽하게 모방했다.
다음으로 축골공(縮骨功)을 펼쳐 키를 반 자 정도 줄였다.
한 식경이 흘렀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며 단풍잎을 흩날리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샅샅이 뒤져라!"
"일차 추격대가 실종되었다.
적이 침투해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모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수상한 자를 발견하는 대로 신호를 보내라!"
수백 명의 강호인들이 낙헌지가 있는 곳을 향해 무더기로 접근하고 있었다.
'내 손에 죽은 놈들을 찾는군.'
낙헌지는 그들 마저도 해치울까 하다 상대의 수가 너무 많아 곤란함을 느꼈다.
그는 울창한 숲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는 입마령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입마령까지 오십 리라고 했지.
일다경이면 입마령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 다행히 날이 저물었으니 칠마전의 두 마두가 밤을 새워 서장 칠마전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낙헌지는 밤을 친구로 여겼다
. 밤이 아니었다면 활동하는데 큰 지장이 있었을 것이다.
'한시가 급하다.'
낙헌지는 석진영의 모습이 되어 흑응곡이 있다는 영륭리남산맥의 입마령을 향해 날아갔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잠영미종술(潛影迷踪術)을 펼쳤기에
그를 향해 다가서던 자들 중 어느 하나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
낙헌지는 인기척을 느낄 수 없는 곳에 이르렀다.
"이제 천하의 운명은 이번 싸움에 달려 있다."
낙헌지는 조여드는 긴장을 풀기 위해 길게 숨을 들이켰다.
"가자!"
가히 질풍 같은 신법이었다.
낙헌지는 중원천하에서 가장 강한 고수답게 서역 하늘 아래에서
밤새조차 놀라게 할 신법을 발휘하며 야음을 가로질렀다.
첫댓글 대무신국. 그리고 입마령!!!!!
즐감하고갑니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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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즐감~!
즐감요!!!!!
감사히 잘보았습니다
ㅈㄷ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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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했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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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