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콘서트] 최재천 교수 '생명,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下)
위클리비즈는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와 함께 '인문학 아고라: 아름다운 삶과 죽음'이란 주제로 석학들의 강의를 연재한다. 지난주에 이어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이 '생명,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한 강연을 요약해 소개한다.
찰스 다윈이 1859년에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냈는데요. 그 책에서 제일 유명한 문장 중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수능 영어반이라고 생각하시고, 영어 공부를 같이 해보겠습니다. 다윈 문장 좀 보십시오. 화려하기 이루 말할 수 없어요. 'from so simple a beginning' 아주 하찮은 시작으로부터, 'endless forms most beautiful and most wonderful' 가장 아름답고 가장 기가 막힌 형태들이, 'have been, and are being, evolved' 진화해 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다윈은 유전자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사람입니다. DNA를 모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로부터 왔을 수밖에 없다는 걸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최첨단의 생명과학 기술을 통해 다윈이 옳았다는 것을 계속 찾아내고 있습니다. 참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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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재천(왼쪽 사진)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플라톤 아카데미 강연에서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에 대해 우리 사회가 너무 무지하다”며 한국을 ‘다윈 후진국’이라고 개탄했다. / 조선일보 DB
잘못 이해되는 다윈의 적자생존
여러분, 적자생존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근데 적자생존의 원래 영어 표현은 'survival of the fittest'라고 해서 최상급을 썼어요. 그대로 번역을 하면 최적자생존이라고 해야 맞는 겁니다. 근데 적자생존이란 번역이 오히려 잘한 겁니다. 서양 사람들은 그 표현을 들을 때마다 '1등이 아니면 죽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는 다윈 선생님이 좀 실수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세상이 1등만 남겨놓고 죽는 세상은 절대로 아닙니다. 세상이 어려워지면 꼴등이 떨어져 나가는 거죠. 꼴찌만 아니면 살아남을 가능성을 갖고 사는 겁니다. 'survival of the fitter' 이렇게 비교급으로 했으면 참 좋았을 뻔했습니다.
다윈 선생님이 하신 또 하나의 말이 생존경쟁입니다. 하지만 생존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으로 반드시 남을 죽여서 피를 보라고 얘기하신 건 아닙니다. 저 같은 생물학자한테 '자연계의 가장 위대한 성공 사례가 뭐냐'라고 물으면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같은 답을 할 겁니다. 꽃을 피우는 식물과 그들을 방문해서 꽃가루를 옮겨주고 그 대가로 꿀을 얻는 곤충의 관계. 이게 왜 어마어마한 성공이냐 하면, 자연계에서 가장 '무거운' 존재가 누군지 아십니까? 식물입니다. 자연계의 모든 동물을 다 모아본들 식물 전체의 무게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입니다. 한편 숫자로 가장 성공한 집단은 곤충입니다. 수가 엄청나게 많으니까요. 이 어마어마하게 성공한 두 집단이 서로 잡아 죽여서 성공한 게 아니고 손을 잡았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가 있는데도 왜 인간은 손잡고 가는 것에 이렇게 인색할까. 제가 최근에 몇 년 동안 열심히 생각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영어로 'copetition'이라고 하는데, 경쟁의 competition과 협력의 cooperation의 합성어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게 결국은 경쟁과 협력을 어떻게 기가 막히게 조화시키느냐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학명을 '호모 심비우스'로 바꾸자
저는 이화여대에서 '환경과 인간'이라는 과목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경쟁과 협력의 조화를 연습하도록 합니다. 첫 수업 때 학생들에게 자발적으로 몇몇이 모여서 위원회를 만들게 합니다. 그럼 학생들이 '자전거도로 개발위원회' '자연사박물관 건립위원회' 등 별의별 것을 다 만들어요. 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 내가 속해 있는 위원회가 전체로 점수를 잘 못 받았는데, 내가 가장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을까. 그건 아마 거의 불가능할 거다. 내 위원회가 일단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같은 위원회의 다른 친구들은 다 A를 받았는데 나는 C를 받더라, 이건 못 견딘다. 그럼 남은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내가 친구들과 함께 최고의 위원회를 만들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면서 내 친구들이 잠시 쉴 때 나는 한 발짝 더 나가는 거다. 결국 세상은 그렇게 이기는 것이지 옆의 동료를 깔아뭉개면서 내가 일어서는 게 아닐 것이다."
저는 한 15년 전부터 학계에다가 "우리 인간의 학명을 좀 바꿔 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르는데, 호모라는 속(屬)에 우리가 속해 있는 겁니다. 근데 참 신기한 게, 이 세상의 많은 생물들이 한 속 안에 여러 종이 있기 마련인데, 저놈의 호모 속 안에는 지금 딱 한 종밖에 안 남았어요. 이놈의 호모 사피엔스는 자기랑 비슷하게 생긴 놈들이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꼬락서니를 못 봐줍니다. 우리처럼 자연계에서 배타적인 동물은 전 처음 봅니다. 주변에 있는 우리 비슷한 놈들을 몽땅 다 제거해 버리고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그래놓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현명한 인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피엔스가 'wise' 즉 현명하다는 뜻입니다. 근데 현명합니까? 저는 헛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우리가 그렇게 현명했으면 이렇게 미세 먼지 만들어 놓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아야 되는 겁니까? (대도시 미세 먼지 대부분은 자동차 배기가스 등에서 만들어진다·편집자 주) 예전에 우리가 아가미로 숨 쉬던 시절이 있었어요. 물에서 살던 물고기 시절에는 미세 먼지가 아가미에 붙으면 물로 씻으면 됐어요. 근데 허파라는 걸 진화시키고 난 다음엔 허파는 뒤집어서 씻을 수가 없어요. 그때는 미세 먼지가 이렇게 우리를 공격하게 되리라는 걸 생각 못 한 겁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까 자연계의 모든 다른 생물과 공생(共生)하겠다는 뜻에서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로 거듭나야 한다고 떠들고 다닙니다.
어차피 DNA 존재라면… 한바탕 즐기다 가자
유전자의 관점에서 삶을 설명하다 보면 한 해에 한두 번씩 꼭 겪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학생이 수업 후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저한테 얘기합니다. "삶이 그렇게 진짜로 허무한 것입니까?"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나도 그랬다. 처음 DNA의 존재에 대해서 배우고 난 다음에 엄청난 허무주의에 빠져서 목숨을 버려볼 생각까지 한 적도 있었다. 근데 그 단계를 넘어서서 끊임없이 읽고 연구하고 공부하다 보니 어느 순간에 그 고개를 넘게 되더라. 넘고 나니까 마음이 굉장히 평안해지는 게 온다."
어차피 DNA가 그냥 저를 만들어서 이 세상에 내놓은 겁니다. 제가 무엇을 한들 DNA의 손바닥 안에 있습니다. 기왕에 그런 것 그냥 제가 한바탕 기가 막히게 즐기고 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게 DNA한테 도움이 되면 참 좋은 거고요.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까 제가 뭘 꼭 이뤄야 된다는 강박관념도 없어지고,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이유도 없습니다. 왜? 제가 포기해도 DNA한텐 아무 상관 없으니까요. DNA는 또 다른 존재를 가지고 실험을 합니다. 그러니까 저도 그냥 저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한바탕 신나게 즐기고 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주 마음이 평안해지는 겁니다.
인간이란 동물은 DNA의 존재까지도 알아버린 대단한 존재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은 왜, 다 알고 계셨을 텐데도 우리에게 뱀을 보내서 그 지식의 나무를, 생각의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꼬드기셨을까. 저는 알면서 우리에게 그러셨을 거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인간에게는 지식을 탐구하게끔, 진리를 탐구하게끔 허락해주신 것이죠.
우리는 앎을 추구하게끔 허락받은 동물입니다. 뭐 하러 한자리에 머뭅니까. 오늘 밤 이렇게 많은 분이 여기 모이신 이유도 다른 재밌는 일도 많으실 텐데 뭔가 새로운 것을 알아야겠다는 그 열망 때문에 이렇게 모이신 것 아닙니까? 이렇게 많은 분이 지식을 탐구하기 위해서 모이는 이 나라, 복 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