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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 4,7-15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0,20-28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섬기기'>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질그릇에 담긴 보물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곧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쉬운 인간이지만, 그 속에 담긴 복음의 능력으로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고 영광을 입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온갖 환란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2코린 4,8-10)
오늘 복음에서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열정과 투신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지나치리만큼 대단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리만큼 강렬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마시게 될 잔을 같이 마시겠다고 선뜻 나섭니다.
그들의 어머니 역시 대단한 열망을 가졌습니다.
자식을 향한 그의 사랑과 열망은 다른 이들에게 눈총이 될 만큼 차고 넘쳤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열망과 투신을 나무라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를 보고 화를 내는 다른 제자들을 불러놓고서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마태 20,26-27)
‘섬기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 되고, 종이 되는 사람이 으뜸이 된다.’는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섬기지 않기 때문에 높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으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결국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아니 우리의 발을 씻기시고, '먼저'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끝내는 당신께서 섬기신 제자들에게 배반당하고도 그들을 죽기까지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참으로 당신께서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고 하신 말씀처럼, 섬기셨습니다.
그러니 섬김을 받기보다 마땅히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내려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을 낮추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단지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누군가를 희생으로 도와주고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기만 낮아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높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며, 나아가 상대방을 받아들여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죄인 하나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도, 부러진 갈대도, 꺼져가는 심지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주님 섬기기'를 배우는 학생들입니다.
묘하게도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곧 섬기면서 섬기는 그분이 되어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이 되어가고, 진리를 섬기면 진리가 되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 13,20)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내 곁에 있는 내 형제를 섬김으로써 '주님 섬기기'를 배워가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사랑하는 마음이요,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마태 20,23)
주님!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피워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고배를 마셔야 축배도>
제자들 가운데 저만 그리된 것이 아니겠지만,
주님, 제가 당신의 첫 제자가 된 것은 저의 선택이 아니라 당신 선택이고 당신에게 홀려 당신을 따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진짜 당신에게 홀렸습니다.
이것저것 재어 보고 당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도깨비에게 홀리듯 홀려서 당신을 따라갔습니다.
처자식이 있고 그래서 벌어먹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저에게 와서 느닷없이 “나를 따르라!”라고만 했는데 그냥 따라갔으니 홀린 것이지요.
그런데 저뿐 아니라 제 동생도 그리고 베드로와 안드레아도 그랬으니
저의 문제만이 아니고 당신에게 끄는 힘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 따라다닐 때 당신의 말을 듣고 있으면
당신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으며 그것은 영적인 권위였기에,
악령들도 그 말씀에 꼼짝하지 못하고 쫓겨나거나 호수도 잠잠해졌기에,
당신을 따라나선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저와 아우 그리고 베드로의 형제를 특별히 사랑해주셨지요.
죽은 소녀를 살리는 대단한 기적과 타볼산의 변모를 저희에게만 보여주셨잖습니까?
그래서 예루살렘에 거의 다다랐을 때 저희는 다른 제자들 특히 베드로가 화낼 줄 알면서도 용기를 내어 당신께 청했습니다.
당신이 왕이 되면 그 왼편과 오른편에 저와 아우가 않게 해달라고.
그때 당신은 저희에게 “내가 마실 잔을 너희도 마시겠느냐?”(마태 20,22ㄴ)고 물으셨고,
저희는 호기롭게 그 잔을 마시겠다고 하였고, 주님도 그렇게 될 거라고 하셨지요.
그러나 당신이 겟세마니에 저희 넷만 또 따로 데리고 가셨을 때 그 뜻이 무엇인지 그때라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당신은 그때 피땀 흘리시며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셨는데, 저희는 그 잔을 같이 마시지 않고 쿨쿨 잠만 자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때 저희는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것이었습니다.
당신마저 마시고 싶지 않았던 그 쓰디쓴 고배를 당신의 대관식 때 마실 축배의 샴페인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축배의 샴페인은 고배를 마신 다음임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목마르다!” 하시며 돌아가셨고, 축배를 마시려던 우리는 그래서 더 쓰디쓴 고배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때야 같이 마시자던 잔이 수난의 잔이라는 것을 깨닫고, 성령을 받고 나서야 그 잔을 같이 마실 수 있게 되었으며,
지상 왕국의 첫 자리를 주십사 한 저는 너무 죄송한 나머지 순교의 첫 자리를 주십사 청하였고 그래서 그렇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고배를 마셔야지만 진정 축배도 마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야고보가 되어 짧게 써본 회상기인데 이런 회상기를 쓰게 된 것은 어제 경험 때문입니다.
너무 덥기에 일찍 행진을 출발한 저희는 한낮에 진부령을 넘고 있었습니다.
평지를 걸어도 지치고 입이 탈 지경인데 막바지에 고개를 넘으니 그야말로 입이 바짝바짝 타 말려 들어가는 느낌이었을 때 마침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서 가지고 오신 겁니다.
그때 제 입에서 이런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지옥이 있었기에 천국이 있는 것이다!"
고배를 마셔야지 축배도 있는 겁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을 보여주세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보여주신 가난과 평화, 겸손과 봉사의 모습으로 교회를 이끌고자 교황 이름으로 프란치스코로 선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되신 후 추기경단 앞에서 순명 서약을 받으셨는데, 교황좌에 앉아서 받은 것이 아니라 추기경들이 서 있는 자리로 내려와 선 채로 순명서약을 받으셨습니다.
그 후 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 앞에 나타나 고개 숙여 인사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황금색 망토를 걸치지 않으셨고, 빨간 구두를 새로 마련하지도 않으시고, 평상시 신던 검은색 구두를 신으셨고, 방탄차를 타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서로가 소통하려면 가림막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한국 방문 중에도 한국에서 만든 경차를 타셨고, 인간적으로 출세하신 그분은 세상 것을 누리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삶을 살고자 애쓰십니다.
그 삶이 끝까지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존경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가 내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충실하게 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존경을 권위에서 오기보다는 권력에서 오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을 존경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 권력은 10년을 못갑니다.
권력을 소유했던 우리 역대 대통령이 얼마나 존경받고 있나요?
성철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님, 이태석 신부님이 권력을 추구했다면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을까요?
지금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주목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복음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을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머니로서 아들이 잘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줄서기를 잘하고 청탁을 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벌써 치맛바람이 불었나 봅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도 불쾌하게 여기며 화가 나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도 한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공정한 경쟁으로 생각했든, 그 형제들의 무례에 화가 났든,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 20,27-28)고 하시며 생각을 바꾸도록 새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모두의 속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스승 예수님께서 몸소 섬기는 삶에 본을 보여주셨다면 제자는 당연히 그 삶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제자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상대로부터 대접을 받으며 권력을 휘두르려는 마음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양다리 걸치기 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 하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며 상대방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세상은 높이 오르는 자에게 머리를 숙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더 많이 낮아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성장하려면 제대로 분노하라!>
오늘은 성 야고보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도 있지만, 오늘의 야고보는 요한과 함께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이들은 야망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들의 어머니는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높은 자리에 앉으려면 그만큼 고생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시게 될 잔이 온유함과 겸손의 잔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야고보는 열정이 넘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섬기는 삶을 열정적으로 살았을 것이고 그렇게 순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열정이 어디서 나올까요?
예수님을 박해하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불을 내려 멸망시켜버리려고 분노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사실 열정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모든 성취는 바로 ‘분노’에서 시작됩니다.
1948년 가난한 어촌에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나, 가발공장, 식당 등에서 일하였고, 총으로 쏴 죽이고 싶을 정도로 폭력이 심한 남편을 피해 단돈 100달러를 갖고 미국으로 식모살이를 떠난 여자.
미국에서는 식당에서 일하며 대학을 다녔고, 76년 미 육군에 들어가 소령으로 예편, 50세가 넘은 나이에 하버드 박사과정에 다니는 여자, 서진규.
그녀는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에서 ‘이만큼 성공하기까지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반항심과 복수심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항심과 복수심, 곧 분노에 대해 제대로 알아봐야 합니다.
서진규 씨는 정말 남편과 세상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살았을까요?
물론 그들로부터 당연히 무시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복수심은 결국 자기를 향해야 했습니다.
참다운 복수는 자신이 그러한 처지로 살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내는 것입니다.
그녀는 분명 누군가에게 - 아마 부모 중 적어도 한 명 일 수 있을 것입니다 – 사랑받았습니다.
사랑 안에는 ‘기대’가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왜 우리 몸의 회충이나 모기를 사랑하지 못할까요?
기대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태아는 기생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태아를 사랑합니다.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러한 기대를 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 기대에 못 미칠 때 분노하는 것입니다.
만약 타인이나 세상만 탓한다면 그 사람은 사랑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러한 처지를 타인의 탓을 하며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분노는 이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데 나는 물 위로 뛰어내릴 용기조차 내고 있지 못하다면 분노가 일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처럼 박차고 뛰어내릴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이 용기가 바로 분노에서 나옵니다.
분노는 나를 사랑해 준 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솟아나는 나를 변화시킬 유일한 힘입니다.
‘그릿(GRIT)’의 저자 앤절라 더크워스는 아버지로부터 “네가 아무리 내 딸이긴 하지만, 머리가 나쁘니 성공하긴 어려울 거다. 재능이 없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기 힘들어.”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이 말이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뭐랄까, 단순히 ‘내가’ 재능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기보다는, 재능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내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성공에 관한 연구를 계속 진행했고, 10년이 넘어가는 연구에 다들 시간 낭비라고 했지만, 그녀가 43세 되던 해 전 세계 단 20명의 천재만 받는다는 맥아더 상을 받게 됩니다.
분노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살 존재가 아님을 증명해내야 합니다.
앤절라 더크워스는 그릿을 기르기 위해 “작은 일이라도 완료하는 습관”을 만들어보라고 말합니다.
거창할 필요는 조금도 없고, 오히려 지킬 수 있는 아주 작은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대신에 정한 계획은 ‘무조건’ 끝까지 완료해야만 합니다.
끝까지 해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지금 드는 힘보다는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난 여기까지야.’라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는 누구도 자신이 갈 수 있는 한계까지 가보지 못했습니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건 재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중간에 포기했기 때문이에요.”
야고보는 이러한 분노로 그리스도를 닮아갔던 사도입니다.
우리가 왜 주님께서 주시는 잔을 마실 수 없을까요?
저는 특별히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제 자신에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도를 바치면 나의 죄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분께 계속 아픔만 드리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저를 발전시켰고 그 길을 바로잡아주는 거울과도 같은 것은 『하.사.시.』입니다.
말씀은 이렇게 내 안에 분노를 불러일으켜야 하고 그것이 나를 분명 그리스도의 삶과 닮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특혜 같은 것은 없습니다>
1)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두 사도의 어머니를 등장시킨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르는데, 이야기의 전체 내용을 볼 때 어머니가 등장한 일 자체에 중요한 의미는 없습니다.
두 사도의 요청은 앞의 19장 28절의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마태 19,28)
사도들이 열두 옥좌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열두 옥좌를 약속하셨습니다.
두 사도가 요청한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와 왼쪽 자리는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두 자리입니다.
기왕이면 높은 자리를 달라는 뜻으로 요청한 것일까?
아니면 자기들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는 요청은 다른 사도들에게는 낮은 자리를 주시라는 요청과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도들이 그 말을 듣고 불쾌하게 여긴 것은, 즉 화를 낸 것은(24절) 당연한 반응입니다.
2)
예수님의 답변은 거절도 아니고 승낙도 아닙니다.
두 사도가 높은 자리를 욕심낸 것을 꾸짖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를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는 말씀은 “나의 수난에 참여하는 일이 먼저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 8,17)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상속자가 되기 때문에 ‘메시아 왕정’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열두 옥좌도 당신의 왕정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옥좌에 앉으려면 예수님의 고난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묵시록을 보면, 열두 사도는 하느님 나라의 열두 주춧돌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묵시 21,14).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에페 2,20) 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사도들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한데,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 특별함이 어떤 모습이 될지, 그것은 그날이 되어봐야 알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열두 옥좌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일을 수행한다고 해도 ‘섬기는 자리’입니다.
3)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특혜나 특권 같은 것은 작용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라고 해서, 또는 고위 성직자라고 해서, 또는 무슨 업적을 쌓았다고 해서, 무조건 그 나라에 들어가서 옥좌에 앉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든지 고위 성직자든지 누구든지 간에 심판과 자격 심사는 지극히 공정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자격 심사는 “신앙인으로서 신앙인답게 충실하게 살았느냐?”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높은 자리를 욕심내지 말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부터 하여라.”, 즉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먼저다.” 라는 뜻입니다.
4)
25절-28절의 말씀은 ‘낮춤’과 ‘섬김’에 관한 가르침인데, 이 가르침은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즉 “세속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따라가면 안 된다.”, 또는 “너희는 세속 사람들처럼 살면 안 된다.”입니다.
신앙인은 안 믿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목표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이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남을 섬기는 사람만 있는 나라, 그래서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형제가 되어서 모두가 모두를 섬기기 때문에 그 나라에서는 높은 자리나 낮은 자리를 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참 좋은 삶의 이정표 - “성 야고보 사도”>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시편 126,5)
우리의 순례 여정의 복된 결과를 보여주는 시편 화답송 후렴이 위로와 힘을 줍니다.
오늘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성 야고보 사도하면 떠오르는 산티아고 순례길이요 이에 대해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산티아고Santiago’는 ‘성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입니다.
2014년 꼭 다녀온 지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산티아고 길에 있는 듯 하며 죽을 때까지 그러할 것입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 프랑스 땅인 ‘생잔피에드포르’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최종 목적지인 성 야고보의 유해가 모셔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이르기까지 800km 2000리에 이르는 길이었고, 미사도구와 아이패드가 든 14kg 정도의 배낭을 메고 33일 동안 매일 평균 20-32km를 걸었고, 우직할 정도로 새벽마다 매일 강론을 쓴 후 미사를 봉헌하고 아이패드를 통해 강론을 홈페이지에 올리고 도반과 함께 걸었던 순례길이었습니다.
콤포스텔라라는 뜻은 ‘별들이 쏟아지는 들판’이란 뜻으로, 별의 인도로 사도의 유해를 발견했기 때문이란 전설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는 날마다 새롭게 전개되는 풍경에 늘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처럼 생각되었고, 순례중 가장 행복하고 기뻤던 때는 미사 후 간단한 아침식사 후 이마에 헤드랜턴을 하고 새벽길을 떠날 때였습니다.
순례 여정 중 떠남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그래서 자주 ‘떠남의 여정’이란 제목의 강론도 나눴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곳도 하루요 곧 싫증이 나고 떠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어느 곳에 도착하든 우선 물색한 것이 미사드릴 장소였습니다.
마지막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을 때 감동적인 ‘산티아고 입성’이란 제하의 강론 일부를 소개합니다.
“이냐시오 형제와 저는 2014년 9월27일 오전 10:30분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 기뻣노라’ 시편 말씀 그대로, 기쁨에 나는 듯, 발걸음도 가볍게 단숨에 마침내 꿈에 그리던 대망待望의 산티아고 대성전, 주님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산티아고 입성!’, 마치 승전보를 알리듯 한국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카톡으로 소식을 전했고, 진정성 가득 담긴 축하인사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최측근 사도인 베드로, 요한과 달리 왜 최측근 사도인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첫 번째 순교 후, 왜 그 멀리 땅끝같은 스페인 산티아고 대성전에 유해가 모셔졌고, 이베리아 반도의 수호성인이 됐는지 궁금할 것이고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전설같은 일화에 의하면, 사도는 생전에 스페인지역에서 선교를 했고, 순교 후 그쪽 제자들이 사도의 유해를 모셔갔다는 것이며, 그 유해를 발견한 자리가 현재의 산티아고라는 것입니다.
산티아고에 대한 풍부한 자료는 인클레멘스 신부의 <나는 산티아고 신부다>라는 책에 있습니다.
산티아고에 관한 기존의 책 중 가장 풍부하고 중요한 자료가 포함된 책일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분으로부터 작은 이정표 표지석과 여러 “Camino de Santiago(성 야고보의 길)”이란 글자와 더불어 무수한 화살표가 표시된 양말을 선물받고 이 또한 섭리로 깨달아 어제부터 오늘 지금까지 신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 이정표 표지석과 무수한 화살표에서 착안한 강론 제목이 바로 “참 좋은 삶의 이정표, 성 야고보 사도’입니다.
주님을 가리키는 삶의 이정표, 어찌 성 야고보 사도뿐이겠습니까?
모든 성인들이 삶의 이정표가 되고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주님을 가리키는 삶의 이정표들입니다.
잠시 삶의 여정중 옛 어른이 주신 귀한 가르침도 나눕니다.
“내 앞에 스승이 있었듯이 나 또한 누구의 스승이 된다.
그래서 어른은 발자국을 함부로 내지 않는다.”
<다산>
“아이들 앞에서는 속이지 않으며, 바른 방향을 향해 서며, 비스듬한 자세로 듣지 않는다.”
<예기>
삶의 순례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뒤따라오는 동료들을 배려하여 제대로의 이정표 따라 반듯하게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더불어 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정말 참 좋은 삶의 이정표 따라 제 방향으로 제대로 좋은 도반과 함께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정표를 잃으면 길을 잃습니다.
산티아고 길은 평생 순례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산티아고는 30일 전후로 끝나지만 우리 삶의 순례 여정은 죽어야 끝나니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도상途上의, 즉 길위의 존재들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제하의 제 좌우명 시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하루하루 우보천리의 자세로 궁극의 목적지인 아버지의 집을 향해가는 ‘귀가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사부 베네딕도 성인은 당신 제자들의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했고 오늘 복음과 일치합니다.
우리의 영성이 있다면 섬김의 영성뿐이요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일 뿐입니다.
단번에 이뤄지는 섬김이 아니라 평생 배우고 실천해야 할 섬김이기에, 섬김을 배워가는 섬김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라 정의할 수도 있겠습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의 모든 수행이 주님을 섬기는 방편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섬기고 싶은 사랑에, 형제자매들과 나누고 싶은 사랑에, 날마다 목숨을 걸고 쓰는 제 강론이요 살아 있는 마지막 날까지 그렇게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강론 후반부 말씀은 아직은 철부지같은 사도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유언같은 말씀이고, 제 사제서품 상본 성구도 이와 똑같은 내용의 ‘마르코 복음 10장 45절’ 말씀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여기에 근거해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교황을 ‘종들의 종’이라 명명했고, 저는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 뿐이라 강조하곤 합니다.
주님은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담아두신 보물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 섬김의 사랑이라 저는 감히 주장합니다.
에바그리우스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이자 수도영성의 대가인 가브리엘 붕게가 쓴 개인기도의 수행에 관한 “질그릇” 책을 금요강론 때 나눈 기억이 생생합니다.
다음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질그릇 같이 허약한 우리 안에 부어지는 주님의 생명이, 섬김의 열정이, 섬김의 사랑이, 섬김의 힘이 우리를 지칠줄 모르는 용기백배, 종신불퇴, 백절불굴, 불사조不死鳥의 정신으로, 섬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 예수님의 생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끊임없이 선사되는 예수님의 생명이, 예수님의 사랑이, 섬김의 열정이 우리 모두 순교적 섬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하루 '부엔 카미노!(Buen Camino!)', 좋은 여정되시기 바랍니다.
“뿌릴 씨를 가지고 울며 가던 그들은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돌아오리이다.”
(시편 125,6)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
저는 걷는 걸 좋아합니다.
어린이 날 선물을 받겠다고, 한강 다리를 건너서 남산까지 걸어간 적이 있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2시간가량 되는 거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매일 걷고 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길’이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원하는 목적지를 안내하는 이정표입니다.
내비게이션은 원하는 목적지까지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합니다.
도착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도 알려줍니다.
방향이 틀렸으면 새로운 길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길은 목적지를 안내하는 도구입니다.
다른 하나는 길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제주도에는 ‘올레길’이 있습니다.
이제 길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 자체가 목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지나온 날을 생각합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을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 길을 걸으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오늘은 야고보 사도의 축일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입니다.
어부였던 야고보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동생 요한과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와 더불어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산티아고에는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였던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있는데 그 위에 대성당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산티아고는 성 야고보의 스페인 발음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까지 가서 선교를 하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왔으나 헤롯 아그리파 왕에 의해 44년에 순교했습니다.
제자들은 그의 유해를 수습해 스페인으로 향했지만 풍랑 때문에 배가 난파돼 유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814년 펠라지우스 수도자가 갈라시아 지방의 벌판에서 한밤중에 별빛이 강렬하게 비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 가서 야고보 성인의 유해를 발굴했는데 그 장소를 콤포스텔라(Compostela)라고 불렀습니다.
‘별이 비추는 들판’이란 뜻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야고보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하고 있습니다.
길게는 800킬로가 넘은 길을 걷기도 합니다.
짧게는 100킬로의 길을 걷기도 합니다.
왜 사람들은 그 먼 곳까지 가서 순례의 길을 걸을까요?
불편한 잠자리를 기꺼이 감수하고, 벌레에게 물리면서까지 순례의 길을 걸을까요?
도시에서는 채울 수 없는 위로와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빠른 속도와 편리함으로는 채울 수 없는 기쁨과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과 자본으로는 채울 수 없는 영적인 충만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야고보 사도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식의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어머니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높은 권력과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삶입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희생하며,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빈틈 많은 사람>
미국 심리학자 에론슨은 대학생을 대상으로 유쾌한 실험을 했습니다.
연구진은 퀴즈왕을 뽑는 대회인 척 퀴즈쇼 장면을 녹음했습니다.
그리고 쇼 장면의 음성 파일을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누구를 퀴즈왕으로 선발할지 투표하게 했습니다.
음성 파일에는 네 명의 참가자가 등장하는데, 첫 번째 참가자는 문제를 대부분 맞췄고, 두 번째 참가자는 반도 맞추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참가자는 첫 번째 참가자처럼 문제를 대부분 맞췄고, 네 번째 참가자는 두 번째 참가자와 같은 정답률을 보였습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그리고 두 번째와 네 번째 참가자가 똑같은 것 같지만, 여기서 다른 점 하나가 있었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참가자에게는 퀴즈 도중 옷에 커피가 쏟아지는 돌발 상황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에론슨은 대학생들에게 네 사람 중에서 가장 호감 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예외 없이 모두 세 번째 참가자를 지목했습니다.
즉, 정답을 모두 맞혔지만, 커피를 옷에 쏟은 참가자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실수 효과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빈틈없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에게 빈틈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는 빈틈없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나의 모습은 완벽한 자기 모습입니다.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힘을 쏟고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겸손하라고 강조하신 것은 쓸데없는 힘이 아닌, 중요한 곳에 힘을 쏟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랑에 온 힘을 쏟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양옆에 앉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을 올립니다.
치맛바람을 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시고, 그들은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제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도망치고 맙니다.
또 다른 제자들은 이런 청을 올렸다고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삶에 있어서 흑역사를 다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복음에 등장시켜서 부끄럽고 부족한 자기의 모습을 세세대대 알립니다.
그들의 영웅적인 모습만 남겨도 될 것을, 왜 이런 모습을 남겼을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빈틈 많은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지금 얼마나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느냐입니다.
과거의 부족한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사랑하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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