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소리 - 이우성
꽃은 해마다 다시 피지 사람은 아니야
흰 꽃 모자를 쓴 할머니가 또박또박 발음합니다
공원 담장을 태우려는지 철쭉과 개나리가 이글거리고
거기 모시고 가면 살아서는 못 나오실 거예요
바람이 한 말인가
제가 벌써 서른아홉이에요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를 떠올리며 작게 말했습니다
늙는 소리 들어봤니
불안은 오후에 진부해지는 것
팔과 얼굴과 배를 쓰다듬는다
부드러워서 이게 혹시 시간의 촉감이 아닐까 생각하다 목에 손을 가져다 대는데 떨림이 느껴지지 않는다
죽었니
벌써
엊그제 모종이었잖아
할머니가 꽃을 안고 나오셨습니다
꽃 피는 소리 들어봤니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아 예쁘다 하셨습니다
*시집/ 내가 이유인 것 같아서/ 문학과지성사/ 2022
# 놀랍도록 완성도 높은 시를 발견하고 얼른 오늘의 글거리로 삼는다. 이 시인처럼 자신과 관련된 사람을 관찰한 후 이렇게 밀도 있게 꿰뚫어 보는 작가는 드물다.
감탄하면서 읽는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출신인 이우성 시인은 언어를 주무르는 힘이 있다. 한국일보를 거쳐 등단한 시인들의 무서운 전통이기도 하다.
모름지기 시에는 즙(汁)이 들어있어야 하는데 다소 낯선 즙이지만 적당히 여백을 주면서 침 분비를 활발하게 만드는 오묘한 맛이다.
조카 뻘의 서른아홉 새파란 중년에게 나는 인생 공부를 한다. 내가 다섯 살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할머니도 이렇게 봄이 오는 것을 안다.
요양원에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거라는 싯구가 섬뜩하다. 거기다 늙는 소리는 대체 어떤 소리일까. 꽃 피는 소리 듣지 못했으니 꽃 지는 소리 또한 못 들었다.
나이 먹을수록 마음으로 듣는 바람 소리와 친해져야 하는 법, 귀를 순하게 하면 늙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나. 꽃 피는 요즘에 딱 어울리는 시다.
## 어제 창원에 사는 절친이 꽃 지는 소식을 전했다. 올초에 약속하기를 4월 초순에 내려가는 거였는데 친구는 꽃이 너무 일찍 피어 벌써 벚꽃이 져버렸다고 했다.
하긴 서울도 이미 벚꽃이 지기 시작했다. 옛부터 꽃 피는 4월이라고 했듯이 이렇게 일찍 꽃이 질 때가 있었던가.
매화, 산수유 빼고는 꽃 피는 3월도 어색한데 이제 꽃 지는 3월이라니,, 목련과 개나리는 벌써 졌다.
나는 너무 일찍 핀 꽃을 보면 공연히 불안하다. 꽃은 일찍 필수록 일찍 진다. 벌과 나비가 꽃 찾아올 채비도 하기 전에 꽃이 지면 어쩌나. 꽃은 좋지만 제때 와야 한다.
너무 일찍 핀 탓에 꽃축제를 계획했던 지자체들이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자칫 꽃 없는 축제가 될 판이다.
행사를 앞당기고 싶어도 이미 행사 관련 업체와 계약이 되어 있어서 그마저도 힘들다고 한다.
어쩌면 해마다 이런 일은 반복될 것이다. 일찍 피면 그만큼 일찍 지는 것이 자연 이치다. 봄날 열흘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제는 꽃 피는 4월이 아니라 꽃 지는 3월이 될 판이다. 고운 꽃을 보면서도 한편 우울한 이유다. 그렇더라도 걱정일랑 잠시 미루고 일단 아직 남은 꽃구경부터 하자.
그리고 꽃들에게 다정히 말을 걸자. 오느라 애썼다고, 피느라 고생했다고, 내년에도 꼭 다시 만나자고,,
### 오래 전 진해에 벚꽃 구경을 간 적 있다. 버스 터미널에서 노부부가 다투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아내를 향해 일방적 화풀이니 다툰다기보다 혼내고 있다는 말이 맞겠다.
할머니가 지갑을 잃어 버린 모양이다. "이 썩을 할망구야 우짤끼고? 칠칠맞게시리 지갑을 어따 흘렸노?"
할머니는 완전 혼이 나간 표정이다. 이미 지갑을 찾아 터미널 곳곳을 몇 바퀴 돈 듯했다.
그날 꽃 구경 하는 내내 그 노부부가 생각났다. 돌아 오는 길에 관광버스 안에서 흥겨운 뽕짝 선율에 맞춰 허리를 흔들어대는 중년들이 보였다.
버스 안의 춤판이 요즘은 금지된 오락이지만 옛날에는 꽃 놀이 갔다 오는 길에 버스 통로에서 춤추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행여 그 할머니도 지갑 잃어버린 것을 잊고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었으려나. 내가 이렇게 늙어 가는데 그 할머니는 여직 살아 있으려나.
*오늘 오후 우리집 부근 길에 떨어진 꽃잎들이다. 봄날 열흘이 너무 짧다.
첫댓글 하얗게 눈부신 자태를 보여주나 싶더니 꽃비를 또 다시 선물하네요
라일락이 환하게 그 자리를 대신하려 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봄이면 꽃을 보는 마음도 더 진지해집니다.
벚꽃은 일찍 피었다 지지만 기다리고 있는 다른 꽃들이 차례로 필 테지요.
다음 순서가 라일락인가요. 평화로운 밤 되세요.ㅎ
일장춘몽 하룻 밤새 꽃이 지고 엉크런 가지만 삐죽이
하늘을 덮었던 기세는 어디가고 애꿎은 하늘 보느라 고개만 아프요 ㅎㅎ
꽃진 자리마다 애기씨 꽃신 벗어 둔 자리 한 발 내딛기도 아까우니
차라리 평소 거친 시멘트 길이 홀가분 했구나 생각도 ㅎㅎ
운선님의 진지한 댓글이 꽃비처럼 처연합니다.
꽃구경 하고 나면 마음이 채워질까 했는데
짧은 봄날이 아쉬워 점점 소중해지는 요즘입니다.
어제부터 한낮에는 반팔을 입고 입네요.ㅎ
다른 때보다 일찍 연두색 새순을 돋는 은행잎이
그래도 괜찮다며 위로를 건넵니다.
늘 건강한 날들 되세요.
네 잘 보았네요
넵, 잘 하셨습니다.ㅎ
글이 물 흘러가듯이 막힘없이 유연합니다
꽃대궐을 버리고 타지로 사흘간 여행갔다왔더니 바람에 꽃잎이 다떨어져버렸어요
글에 제 사는 동네가 나와서 움찔했어요
오후에 동거할매 태우고 드라이브 한판했는데
솜사탕 같았던 꽃은 흉해졌어요
그래도 내일 오전에 마지막날 피날레로 해사와 군부대안엘 들어가볼까 합니다
꽃이 빨리 피었다가 빨리 지듯이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가려나 불안불안~~합니다^^
몸무림 님의 댓글이 너무 시적이어서 꽃비가 울다가게 생겼습니다.^^
창원에 사시나 보군요.
마산, 진해와 창원이 통합되기 전부터
자주 갔던 곳이 그쪽입니다. 묘한 인연의 도시죠.
그곳에 사는 절친 하나 때문에 곁다리 건너다리로
하나씩 친구가 늘어 한 타스 가까이 될려나요?
마산 합성동, 진해 충무동, 창원 상남동 등에
제가 서식하던 술집들은 잘 있는지 모르겠군요.
어쩌면 다찌집에서 님을 스쳤을지도,,
제가 소주도 좋은데이를 잘 마시네요.ㅎ
꽃피는 소리에 바람들어 여기저기 쏘다니는 요즘입니다.
스스로 위안하죠~
그래봤자 열흘이야..
꽃피는 소리에 한쪽 맘열고 설렘 안고 머리는 열어둡니다.
좋은 시 소개 감사합니다~^^
가희님 요즘 꽃바람이 들었군요.^^
바람 중에도 꽃바람은 좋은 거지요.
설레임 안고 머리는 열어둔다는 구절이 참 마음에 다가옵니다.
짧은 봄날처럼 꽃같은 시절은 갔지만
지금도 나름 꽃시절이라 여기며 산답니다.
가희님이 시를 보는 눈이 있어 좋습니다.
올려주신 꽃사진도 참 좋네요.ㅎ
저도 어제 집앞 천변을 걸엇는데 벗꽃이 눈 처럼
길에도 흐로는 물위로 흩날리며 떨어지더군요.
그래도 목련은 만개해 있고 영산홍은 봉우리를 오므로고 터질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늙어가는데도 늙는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을 보니 시인의 눈과귀는 역시 다른가 봅니다.
꽃비 내린 천변 사진이 한 편의 시처럼 보입니다.
대부분 꽃을 보느라 위만 쳐다보는데
아래 쪽에 눈길을 주는 리진님의 감성이 돋보이네요.
시인은 늙는 소리 듣느라 빨리 늙는다네요.
우리같은 사람들은 그저 읽는 재미와 꽃구경 하면서 보내자구요.
리진님도 늙지 마시고 아프지 마시고 좋은 봄날 되세요.ㅎ
젊어 잘 지낸 부부들은 늙어 진정한 친구가 됩니다.
유현덕님이 목격한 노부부 중 남편은 아마도 평생 부인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해 왔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슬픈 일 중 한 가지 임이 분명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
오래전 일인데도 꽃구경 할 때면 그 노부부가 생각납니다.
할머니가 간만에 나들이 간다고 곱게 차려 입은
도화색 한복이 지금도 각인되어 있네요.
슬픈 모습이긴 해도 일찍 혼자가 된 울 엄니는
못됐으나 그래도 서방이 제일이였노라 하더군요.
자식, 며느리한테는 속엣말 못하는데
서방한테 화풀이 하고 나면 속이 풀렸다데요.ㅎ